톰 라이트의 메시아 사상 비평


김원호(dent4834@hanmail.net)


메시아라는 용어는 이방인인 우리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개념이지만 유대인들에게는 절대적으로 중요하면서도 그들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개념이기에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과연 어떠한 메시아였는지는 우리에게도 그리스도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기름부음 받은 자로서의 메시아, 즉 그리스도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성경에 대한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


이제껏 기독교 안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는 교파 간에 큰 차이가 없었지만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이제껏 우리가 이해하였던 개념과 다른 개념의 메시아를 소개하고있다.


톰 라이트가 예수를 어떠한 메시아로 규정하는지 살펴봄으로서 톰 라이트가 말하는 새관점이 정통 개혁주의와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재정의된 메시아개념


톰 라이트는 메시아의 개념과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재정의한다.


재정의된 메시아는 포로 상태에서 귀환한 백성의 중심에 있었다.


예수님은 자신이 귀환한 포로의 중심에 있었기에 자신을 재정의된 메시아라고 생각하게되었다는 것이다.


이전의 왕으로서의 메시아는 유대적 이스라엘 성전을 관리 보수(?)하였지만 재정의된 메시아는 혁명적으로 재정의된 하나님 나라 개념에 맞는 것이다.


재정의된 하나님 나라는 포로 상태에서 귀환한 백성으로 구성되었다.(예수의 도전 116)


이와같이 톰 라이트는 예수를 이스라엘을 포로 상태에서 해방시키신 분으로 규정하며 예수님을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고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메시아로 한정 시키면서 메시아를 포로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중심의 혁명적인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방인인 우리에게 톰 라이트가 말하는 메시아로서의 예수는 어떠한 분이신가라는 질문을 낳게된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메시아의 의미


1. 메시아’라는 단어는 ‘신성’의 의미를 가졌다.


2. 예수는 자신을 메시아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그 분이 자신을 신적인 존재로 생각하셨다는 의미로 여겨진다. (예수의 도전 156)


3.제 2성전 유대교인들은 예수가 부활하시기 이전에  이미 예수를 메시아라고 생각했었다. (예수의 도전108.)




유대인들이 기대하였던 메시아


라이트가 전하는 유대인들이 기대하였던 메시아는


1. 이방인을 물리치고

2. 성전을 재건하며

3. 하나님의 공의를 온 세상에 실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님은


1. 자칭 메시아가 이방인의 손에 죽으시고

2. 성전을 재건하지도 못하셨고

3.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거나 공의를 세상에 실현시키지 못했다.

(예수의 도전 203)


여기서 라이트는 예수가 이방인의 손에 죽었다고 말한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는 분명하게 유대 지도자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리스도를 죽였다고 전하고있다.


그러나 라이트는 예수의 희생을, 유대인이 아닌, 세상을 대변하는 로마 정부에 의한 것으로 규정함으로서 메시아이신 예수를 세상 정부를 대변하는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신 분으로 재정의하고있다.



예수는 어떤 의미에서 메시아인가?


1) 단순한 부활 때문이 아니다. 제2성전 유대교인들은 예수가 부활하시기 이전에  메시아라고 생각했었다. 제자들이나 제2성전 유대인들이 부활을 통하여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생각했던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이전에 예수님이 (유대주의적)메시아라고 생각했지만 부활은 이러한 생각을 확증해 주는 사건이었다.


2) 예수의 임무는 이전의 왕족들이 가지고 있었던 임무를 완성하는 것이었다. 예수께서 진정한 메시아라는 믿음은 아주 초창기 기독교에 뿌리 박혀있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께 사용한  ‘크리스토스’(Christos)라는 단어는 왕족의 색체를 지니고있었지만 이들은 위험을 감수하고 예수께 이 용어를 사용하였다.


3) 예수께서는 이스라엘의 역사가 (자신이 사역하는 시간에) 초점에 도달했다고 믿으셨다. 즉 포로상태가 절정에 도달했고 이 중대한 시점에 자신이 이스라엘의 운명을 짊어진 인물이라고 믿으셨다. 예수는 이 운명을 자신의 것으로 삼고 메시아로서 이 임무를 완수하셨다.(예수의 도전 105, 128)


4) 예수는 성전을 재건하시기 위하여 오신 분이시다. 예수가 메시아이심을 나타내는 가장 확실하고 명백한 증거는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하신 행동에서 찾을 수 있다. 예수님의 성전에서의 행하심은 개혁의 시도로 보아서는 안되고 심판의 상징으로 보아야한다.


제2성전기의 유대인이 생각하는 메시아는 이스라엘을 구출하고 세상에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는 일이었다.

유대 역사의 왕권을 가진 이들은 첫째로 성전을 짓거나 보수할 것이고 둘째는 적을 상대로 결정적인 전투를 벌이는 것이다. 유대 역사의 왕들은 적과의 싸움과 동시에 성전을 짓거나 보수하는 일을 하였다. 메시아는  궁극적으로 유대 역사의 왕들이 하는 일을 완전하게 행하시는 이로 인식되었다.(예수의 도전 108)


예수님은 이러한 과업을 이어받아서 하셨다면 예수님은 메시아로서의 역할을 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소명이 이스라엘의 메시아가 되는 것이라고 줄곳 믿으셨던 것으로 보인다.(예수의 도전 116)


5) 메시아는 혁명적이다. 예수께서는 혁명적 메세지를 전하였는데 이 이중의 혁명적 메세지는 강경파의 단순한 혁명적 메세지가 아니라 혁명의 의제까지 포함하면서 다른 모든 의제를 뒤엎을 메세지다.이러한 혁명을 통하여 예수께서는 자신의 메시아적 역할과 구속적 고난의 소명이 모두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했다.(예수의 도전 72)


6) 예수는 십자가에 대한 소명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메시아로 부름 받았다는 예수의 믿음은 십자가에 대한 예수의 소명의식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이다.(예수의 도전117)


여기서 라이트는 메시아개념을 십자가와 연결시킨다. 여기서 메시아라는 개념은 왕의 개념과 연결되며 왕의 역할과 의무는 성전을 관리, 보수하는 일이었기에 메시아의 사역은 성전을 건축하는 일과 연결된다는 것이다. 예수가 메시아로 부름을 받았으며 또한 십자가에 대한 소명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십자가를 통하여 성전을 건축하는 일이되는 것이라고 라이트는 말한다.


7) 예수는 이스라엘의 대표이시다. “예수께서는 이스라엘이 이교사상과 싸우려는 욕망 자체를 타락으로 보셨는데 이는 이스라엘이 민족주의 혁명의 온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이스라엘의 대표로서 이스라엘의 고난의 문제를 스스로 짊어지시는 것이다.


예수는 이스라엘의 대표로서 이스라엘이 할 수 없었던 이스라엘의 소명, 곧 세상의 빛이요 종이 되는 그 소명을 이루시는 것이다.이건이 바로 예수께서 이해하셨던 자신의 메시아적 소명이다.(예수의 도전 109,  129)


8) 예수는 메시아적 저주(Messianic Woes)를 감당하신 분이시다. 구원이 실현되기 전에는 심한 고난의 시기를 거친다. 즉 대환란이 닥칠 것이고, 그것을 통해 구속, 새 시대, 죄 용서가 이루어질 것이다. 슈바이처는 예수께서 이스라엘에 도래하는 시험(메시아적 저주)의 때를 보셨고 예수께서 이 메시아적 저주를 온 몸으로 받으려고 하셨다는 것이다.(예수의 도전 116)



메시아의 실현을 위한 예루살렘 입성


라이트는 예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은 야웨께서 시온으로 귀한 하신 것을 분명히 하는 것이며, 예루살렘 입성은 예수께서 메시아적 소명을 감당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라이트가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이 뜻하는 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왕으로서의 상징적 행동이다.(예수의 도전, 110) 유다스 마케베우스가 이방인을 물리치고 성소에 참 예배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들어올 때 야자수 가지를 흔들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행동도 이와같이 왕으로서 행하신 것이다?(마카비후서 10:7)


2) 오랜 기다림 끝에 야웨께서 시온에 복귀하는 것을 상징하고 구현하는 것이다.(도전169)


3)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장면은 야웨께서  시온으로 귀환하셔서 자신의 백성들과 (언약백성으로 제대로 살았는지) 정산을 하고 모든 일을 결말짓기 위해 그들을 방문하시는 것이라고 말한다.(도전172)


4) 야웨께서 마침내 되돌아 오신다는 경고다. 야웨께서 예루살렘에  되돌아 오신 것은 “평화에 관한 일을  거부했던 자들에게 내려질 끔찍한 심판을 의미한다.(예수의 도전, 172)


5)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마태복음 25장의 왕/주인의 비유에 대한 것이다.


6) 예수님은 자신이 장차 야웨의 우편에 앉게 될 것을 받아들인 후에 자신을 통하여 메시아의 소명이 실현되는 것을 예견하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


7) 야웨께서 심판자이자 구속자로 시온에 돌아오실 것이라고 예언하고서 성전파괴를 상징하고 최후의 출애굽을 경축하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신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이 이야기를 몸소 구현하는 것이다. (예수의 도전 180)



예수의 이중의 혁명적 메세지


라이트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혁명적 메세지를 전하였는데 이 이중의 혁명적 메세지는 강경파의 단순한 혁명적 메세지가 아니라 혁명의 의제까지 포함하면서 다른 모든 의제를 뒤엎을 메세지다.(예수의 도전, 72) 예수의 혁명적 메세지의 특징은 다음과같다.


1) 예수가 이루고자하는 메시아적 소명은 물리적인 전쟁에 의한 혁명 프로그램의 참여가 아닌  예수의 메시아적 소명(아래 참조)을 예수의 방법을 통하여 실현한다. 예수의 혁명의 방식은 열혈당처럼 물리적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다른 뺨도 돌려대고 십리도 가라는 메세지의 실천이다.(예수의 도전, 122)


2) 예수의 혁명은 유대적 이스라엘의 성전회복을 통한 메시아적 소명의 성취를 말하고있다. 유대적 이스라엘에 대한 메시아적 성취는 유대인들이 포로에서 귀환함과 동시에 예수가 직접 유대적 이스라엘의 성전이 되심으로 포로에서 귀환한 백성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이루어가는 것이다.(예수의 도전, 116)


3) 기존 체제를 전복하는 예수의 의제의 중심에는 제자들에게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따르고, 자신이 실현하는 대안적인 나라(즉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에 동참하라는 요청이다.



톰 라이트의 메시아 사상 비평


포로에서 귀환한 백성들을 중심으로한 하나님 나라


라이트가 예수님께 대하여 사용하는 “메시아”라는 용어는 일반적으로 기독교에서 생각하는 의미와 많은 차이가 있다.


라이트가 말하는 메시아는 유대주의적 이스라엘의 한계를 받아나지 못하고있으며, 예수를 유대인을 중심으로한 지상에서의 유대적  하나님 나라를 완성시킨 유대주의적 메시아 사상을 가지고 있다.


라이트는 예수의 혁명이 유대적 이스라엘의 성전회복을 통한 메시아적 소명의 성취라고 말한다.


라이트에 의하면, 유대적 이스라엘에 대한 메시아적 성취는 유대인들이 포로에서 귀환함과 동시에 예수가 직접 유대적 이스라엘의 성전이 되심으로 포로에서 귀환한 백성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이루어가는 것이다.(예수의 도전 116)


톰 라이트의 메시아의 개념은 하나님 나라의 개념과 긴밀하게 연관되어있다.


라이트가 보는 예수는 포로 상태의 이스라엘에 혁명적인 하나님 나라를 세운 메시아이시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에는 포로 상태에서 귀환한 백성이 중심에 있다.




재정의된 메시아


톰 라이트는 예수가 귀환한 백성들의 한 가운데 있었기에 자신을 재정의된 메시아라고 생각하게되었다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메시아는 왕으로서의 개념으로서 유대적 이스라엘 성전을 관리 보수하는 역할을 하며, 이스라엘 성전을 중심으로하는 혁명적인 나라를 세우는 사람이었다.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는 스스로 유대적 이스라엘의 성전이 되심으로 귀환한 백성들의 중심에 설 수 있었으며, 유대적 이스라엘을 중심으로하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세우는 분이셨다.


여기서 라이트는 예수의 메시아적 소명을 민족적 이스라엘로 한정 시키고 있다.


이는 그가 민족적 이스라엘을 하나님 나라의 실체로 보고있기 때문이다.


정통 개혁주의에서 보는 유대적 이스라엘은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며,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한 신자들 가운데 임한 나라를 하나님 나라의 실체로 보고있다.


하지만 라이트는 신자들의 모임인 교회를 유대적 이스라엘의 확장 개념으로 보면서 개혁주의와 차이를 보이고 있다.


톰 라이트의 메시아 개념과 하나님 나라 개념은 톰 라이트가 유대중심적 신학자임을 보여주는 증거들이다.



예수, 제2성전 유대교에서의 해방자


톰 라이트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이전에 제2성전 유대교 안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이는 톰 라이트가 제2성전 유대교의 율법적 특징이 언약적 율법주의이며, 유대인들은 구원을 얻기 위해서 율법을 지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안에 머물기 위해서 율법을 지켰다는 신율주의적 사고 안에서 그리스도를 보고있었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구원을 가져다주시는 분이 아니시며, 단지 유대인들이 구원의 은혜 안에 제대로 머물기 위해서 포로된 상태에서 해방을 주시는 유대주의적 이스라엘의 해방자로서의 메시아를 말하고 있다.



이방인의 손에 죽은 메시아


톰 라이트는 예수를 이방인, 즉 로마인들에 의해 처형된 메시아들 중의 하나로 묘사하고있다.(예수의 도전 203)


부활은, 다른 메시아들은 실패했는데 예수가 메시아로서 성공했다는 근거가 된다고 말한다.


이와같이 라이트는 예수가 유대인, 즉 이스라엘의 새로운 희망을 위해서 세상을 대변하는 로마 정부에 의하여 희생되었다고 규정함으로서 유대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한 메시아로 규정하고있다.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의 죽음은 이전까지 유대인들이 로마에 대하여 타협하거나, 도피하거나, 투쟁하는 방식이 아닌, 희생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본을 보여주신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라이트가 보는 그리스도의 죽음은 인류의 죄를 대신한 속죄 사역도 아니며, 유대인들의 손에 죽지도 않았으며, 속죄 사역을 통한 의의 전가도 잘못된 교리라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루터는 이신칭의 교리가 교회의 존립을 좌우하는 문제라고 말하고 있지만, 톰 라이트는 루터의 생각이 전적으로 잘못된 사적인 생각일 뿐이라며 종교 개혁의 교리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다.


예수가 유대인들에 의하여 죽었다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하면서 인간이 얼마나 부패한 죄인이가를 보여주는 것이기에, 인간의 부패성을 부정하며 유대적 이스라엘을 옹호하는 라이트가 받아들일 수 없는 사실이다.


혁명가로서의 메시아


라이트에 의하면 예수는 이스라엘이 포로 상태에서 돌아오는 일이 자신의 사역 안에서 자신의 사역을 통하여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예수의 도전, 75)


라이트는 예수를 포로 상태의 이스라엘에 혁명적인 하나님 나라를 세운 메시아로 규정하고있다.


라이트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혁명을 통하여 자신의 메시아적 역할과 구속적 고난의 소명이 모두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했다.


라이트는 산상수훈을 혁명의 의제가 포함하고있는 예수가 전하는 메세지로 보고있다.


라이트가 말하는 산상수훈은 열혈당과 같이 물리적 힘에 의한 것이 아닌 희생적 메세지다.


라이트는 예수가 전하는 혁명적 메세지는 포로에서 귀환한 백성들을 중심으로 세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삶의 지침으로 제시한다.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의 혁명적 메세지는 대안적인 하나님 나라에 동참하기 위해서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의 희생정신을 본받아서 예수를 따르라는 것이다.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는 구체제의 이스라엘을 전복하고 새로운 체제로서의 대안적 하나님 나라를 세운 분이시다.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유대 이스라엘의 새로운 체제다.


라이트가 말하는 메시아는 이전의 왕으로서의 실패한 메시아와 혁명에 성공한 메시아로 구분함으로서 메시아 개념을 이스라엘의 민족적 해방의 관점으로 국한 시킨다.


혁명적으로 재정의된 하나님 나라는 유대적 이스라엘 성전을 관리 보수하였던 이전의 왕으로서의 메시아가 제공하였던 개념과는 다르다.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은 그리스도의 몸된 신자들이 아닌 포로에서 해방된 이들이 중심이다.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기 위한 조건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은 죄사함을 받은 이들과는 관계가 없다.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의 구속은 아담의 후손의로서의 인간의 보편적 죄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민족적 행동방식과 포로생활에 관한 것이다.


라이트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속죄 사역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 정부에 대항하는 새로운 방식의 투쟁이다.



왕로서 성전을  재건시킨 메시아


라이트는 예수님이 유대인이 기다리던 성전을 재건하신 분이라고 기술하고 있다(예수의 도전, 108)


유대인에게 메시아는 성전을 재건하시는 분이어야했기에 예수님은 성전에서 하시는 행동을 통하여 자신이 메시아이심을 증거한다고 말한다.


이전의 왕들은 메시아로서 성전을 건축하는 일을 하였지만 예수는 스스로가 성전이 되셔서 왕으로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신 분이다.


라이트는 사도신경에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만 호칭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며, 시편2편과 사무엘하7장에 비추어보면 예수는 유대인을 구출하여 왕으로 오신 분이라고 기술한다.(하나님은 어떻게 왕이 되셨나, 351)

라이트는 메시아라는 조건을 성전 재건과 연관시키고있다.


라이트가 예수님께서 진정한 메시아라는 인식은 역사적인 이스라엘의 회복이라는 시오니즘적 메시아사상을 말하는 것이다.


라이트가 주장하는 메시아로서의 싸움은 한마디로 유대교적 메시아 사상을 벗어나지 못하고있다.


U라이트가 묘사하는 메시아 개념은 유대적 이스라엘의 회복이며 이러한 회복은 유다 마카베우스 같은 열혈당의 폭력적 모습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비폭력적 희생적 방법으로 성취되며,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를 통하여 말씀하신 것을 손수 실천하는 본을 보여주신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예수님의 비폭력적 메시아로서 성취한 것은 유대적 방식의 하나님 나라이다.


톰 라이트는 예수님께서 메시아의 싸움을 싸우시기 위하여 죽음의 길을 걸으셨다고 말하고있다.(도전130)


이런 논리라면 김세윤 교수가 지적했듯이 새관점이 기독교를 유대교에 편입시키는데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유대교가 유대인만을 위한 종교라는 개념이 상실되는 또 다른 문제에 직면하게된다.

라이트는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메시아로 오셔서 이 세상의 왕이 되셨다는 논리를 전개하지만 이런 논리는 기독교를 유대교에 편입시키려는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예루살렘 입성이 뜻하는 것


라이트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장면은 야웨께서  시온으로 귀환하셔서 자신의 백성들이 언약백성으로 제대로 살았는지 정산을 하고 모든 일을 결말짓기 위해 그들을 방문하시는 것이라고 말한다.(예수의 도전172)


시온으로서의 예루살렘은 성전의 관점서 접근하여 한다.


아담은 성전으로서의 에덴에서 실패를 하였지만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성전으로서의 예루살렘에서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순종으로 구속사역의 삶을 마감하셔야만 했다.


라이트가 주장하는 것과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은혜 안에 제대로 머물었는지를 정산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순종한 아담의 후손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질 언약 백성의 모형일 뿐이지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는 실체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라이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실체적인 하나님 나라로 보고, 예수님이 이루시는 새로운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중심은 포로에서 귀환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라고 보고 있기에 이러한 해석이 나오는 것이다.


라이트는 예수님 자신이 장차 야웨의 우편에 앉게 될 것을 받아들인 후에 자신을 통하여 메시아의 소명이 실현되는 것을 예견하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고 말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예수님이 인간으로서 선지자적 소명을 가지고있었다는 말과 유사하다.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완전한 사람으로서 죄인을 구속하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오신 것이다.


아담은 성부 하나님께 범죄하였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성부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 아니시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불가능한 것이다.


구속사가 제거된 라이트의 관점이라면 구태여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신  예수님의 성육신이 아니어도 선지자 가운데 한 사람을 택하여 할 수 있는 것이다.


라이트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이방인을 물리치고 성소에 참배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들어온 유다 마카비우스와 마찬가지 차원의 왕으로서의 행동으로 규정한다.


이는 이스라엘의 실패한 여러 왕들을 실패한  메시아로 보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의 신격을 격하 시키는 것이다.


종종 라이트는 자신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정한다는 오해를 받는다고 항변하면서 이는 자신이 받는 모함이 마치 스데반 집사가 모함을 받는 것과 유사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님의 역할은 신격을 지니지 않은 선지자도 할 수 있는 역할로서, 마치 인간이신 예수님이 신의식에 의해서 하나님의 선택으로 신이 되셨다는 개념과 유사한 논리를 전개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라이트의 논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인정하지 않기에, 구태여 예수님이 하나님의 위격을 가질 필요가 없는 것이다.


라이트는 제2성전 유대교라는 기반 위에서 초기 기독교를 해석한다.


라이트가 말하는 ‘초기’ 나 ‘아주 초창기’는 기독교가 교리의 체계를 갖추기 전의 상태를 말한다.


라이트는 어거스틴 이후의 기독교 즉 체계적으로 교리가 갖추어지기 시작한 이후의 교리에 대하여 부정적 자세를 취함으로서 개혁주의의 기반이 되는 어거스틴의 해석과 충돌을 일으키는 것이다.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

톰 라이트의 예수에 대한 해석은 어디에서도 마지막 아담이라는 관점에서 해석되지 않는다.

또한 이스라엘 성전을 성전으로서의 에덴과 대비시켜 해석하지 않는다.

톰 라이트가 해석하는 예수는 아담의 범죄와는 관계가 없으며, 오직 아브라함으로부터 출발한다.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예수는 예수의 모형인 처음 아담으로부터 해석되어져야한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메시아 사상은 에덴에서의 아담의 실패와 관련지어 해석되지 않는다.

또한 이스라엘을 에덴과의 유비적 관련성에서 해석하지 않는다.

아담이 하나님과 행위 언약 관계에 있었다는 것과 이스라엘도 하나님과 행위 언약 관계에 있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마이클 호튼은 톰 라이트의 새관점이 언약에 대한 잘못된 해석으로부터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언약의 관점에서보면 성경은 창세전 구속 언약, 아담 언약과 노아 언약, 아브라함 언약, 모세 언약, 다윗 언약, 선지자 언약, 새 언약이 유형학적으로 차례로 전개되고있음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라이트는 성경을 단지 이야기라는 하나의 틀에서만 해석하면서 유대적 이스라엘을 그 중심에 둔다.

성경 해석의 출발이 되는 창세기 1~3장은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해석하는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창세기1~3장과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관련성을 제외시킨 해석으로, 유대적 이스라엘을 제2성전 유대교라는 역사적 예수 탐구 틀에서 자의적으로 해석한다.

참된 메시아로서의 예수는 유대적 이스라엘의 문제 이전에 처음 아담의 에덴에서의 실패로부터 해석되어져야한다.


부활을 통하여 메시아되신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메시아되심은 부활을 떼어놓고서 생각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는 부활을 통하여 새롭게 태어난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새이스라엘이 되신다.


성도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로서 대제사장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약속의 성취이다.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행 13:33)”


낳았다는 말은 부활을 지칭을 지칭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냐(히1:5)”라고 기록하고있다.


5장에서도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히5:5)” 기록함으로서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분이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은 것을 보게된다.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분은 유대적 이스라엘 만의 대제사장이 아니라 모든 신자를 대표하시는 것이다.


로마서에서도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 1:4)”라고 기록함으로서 하나님의 아들되심의 근거를 부활에 두고 있다.


그리스도의 메시아되심은 부활의 첫 열매되심으로 모든 믿는 자들에게 더 이상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해방케하심 때문이다.


부활은 톰 라이트가 말하는 바와 같이 “예수가 로마에 저항하는 행동방식이 옳음을 인정받은 것”이라는 편협되고 왜곡된 유대중심적인 해석으로 제한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낳으신 새이스라엘로서의 그리스도는, 성도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초대하셨으며, 이는 혈통으로난 유대적 이스라엘이나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이 중심이 된 하나님 나라 백성이 아니라, 믿음을 근거로한 새로운 이스라엘로서의 하나님 나라 백성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일으켜 아들 삼으신 것은 구약의 약속을 근거로 한 것이며, 그리스도는 부활로 인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심으로서, 유대적 이스라엘을 넘어서, 모든 믿는 자의 맏형이 되셨다.


바울이 전하는 그리스도는 새로운 하나님 나라 백성의 탄생을 통하여 모든 믿는 자의 대표되시는 메시아이시다.



결론


바벨론 포로의 귀환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가리키지만, 이는 궁극적으로 참된 이스라엘 즉  참다윗 왕이신 예수의 구속사역으로 말미암는 종말론적 메시아왕국을 지향하고있다.


유대적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로부터의 귀환을 통하여 역사적 이스라엘의 회복을 시도하였지만 죄의 문제는 바벨론 포로 이전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교회가 진정한 하나님 나라가 되려면 대속적 사역을 통해서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새관점에서는 예수가 삶의 본을 보여줌으로서 모델이 되어 율법을 대신하는  산상수훈을 주셨다고하지만 아담의 후손으로서의 본질적 죄성을 극복할 수는 없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인간의 능력의 부족, 즉 전적인 부패와 전적인 무능력을 인식시킴으로서 대속적 죽음을 통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요구될 수 밖에 없음을 증명해주는 것이었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인간 스스로의 능력에 의지하여, 새로운 모델을 따라서, 산상수훈을 새로운 율법으로 삼고서, 종말론적인 이스라엘을 확장시키면서,  이를 신약의 교회와 연계시키려는 시도를 하고있다.


인간은 전적으로부패한 아담의 후손으로서 죄를 짓기 이전부터 본질적인 죄인이었기에 진정한 메시아는 처음 아담의 죄를 해결하는 마지막 아담이 되어야만 한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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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 따름의 대상인가?


김원호(dent4834@hanmail.net)


예수가 나에게 어떠한 분이신가는 신앙인에게 꼭 필요한 질문이다.


최근에 들어와서 예수가 따름의 대상으로 새롭게 조명되고있다.


최근 톰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는 이제껏 개혁주의에서 말하여왔던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는 우리에게 의를 전가시켜주신 분도 아니다.


그렇다면 톰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가 도덕적 윤리의 기준을 제시해주는 따름의 대상이라면 어떠한 문제가 있는지 살펴보고자한다.



1. 새로운 도덕률을 만드신 예수님


톰 라이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하시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시는 것은 그들에게 새로운 도덕률을 제시하시려는 것이다.


● 예수님이 사시던 유대인들은 이미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높은 도덕률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들에게 더 높은 도덕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도덕과는 다른 새로운 도덕률을 제공하시기 위한 것이다.


●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행실이란 하나님의 주도권과 언약에서 마땅히 흘러 나오는 것이다.(예수의 도전, 톰 라이트, 61)


톰 라이트는 유대인의 행실과 예수님의 행실을 같은 목적을 가진 다른 차원의 동일한 맥락에서 기술하고있다.


유대인의 행실과 예수님의 행실이 하나님의 주도권과 언약이라는 동일한 맥락 안에 있는 것이라면 유대인의 행실과 예수님의 행실이 같은 속성을 가지고 같은 목적과 방법으로 행하여 질 수밖에 없다.


부자 관원의 예를 들어보자.


톰 라이트는 부자 관원에게 요구되었던 것은 예수를 따르는 것으로서 이는 토라를 성취하는 것이며 토라를 준수하는 방식으로 예수를 따르는 자는 칭의 될 것이라고 말한다. (Jesus and the Victory of God, N. T. Wright, 303, 307)


토라를 잘 준수하는 것이 중요하며 이와같은 방식으로 예수를 따르는 자들은 칭의될 것이라고 말한다.

라이트는 예수를 따름에서 예수가 성전된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이전에 성전에서 제공하였던 속죄의 방식으로서, 예수를 따름으로서 이전에 성전에서 얻을 수 있었던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challenge of Jesus 112)

톰 라이트에게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마땅히 실천하는 따름과 하나님 나라의 요원이 되어 그 나라를 선포하고 그 실천을 수행하는 것은 일종의 칭의를 위한 공로로 드러난다.


라이트에게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공로적 행위로서, 종말에 이루어질 최종적 칭의의 조건이 된다.


김세윤 교수는 라이트의 종말론적 칭의 개념에 동의하면서 성화를 최종적 칭의를 위한 현재적 칭의의 관점에서 보고있다.


2. 도덕적 변화


메이첸은 “기독교와 자유주의”(86)에서 “기독교가 제공하는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이었으며 죄로부터의 구원은 즉각적인 도덕적 변화도 수반한다”고 말한다.


도덕적 변화는 훈련과 연습을 통하여 나오기 이전에 열매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자신의 저서 "그리스도인의 미덕"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삶은 훈련과 연습을 통한 삶이 되어야한다고 강조한다.

이는 성령의 열매로서의 삶과 차이가 있으며, 삶의 주체가 성령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이며, 성화의 과정에 훈련과 연습이라는 방법을 도입하는 것이다.

하지만 도덕적인 삶은 외적인 행동 이전에 내면의 변화에서 나오는 것이다.

내면의 변화가 없는 도덕적 삶은 바리세인들의 위선(hypocrite)과 다를 바가 없다.

만약에 내면의 변화가 없이 훈련과 연습을 통한 도덕적 삶이 강조된다면  인간은 질병과 어려운 환경과 위기 상황에서는 절망 할 수 밖에 없다.

참된 복음은 인간의 의지에 호소하여 사람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한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내적인 변화를 통하여 외적인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다.


3. 그리스도의 위격과 속죄 사역

인도 사람들은 종종 기독교를 아무 저항없이 수용하지만 이들에게 예수는 여러 성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예수가 따름의 대상이 된다면 복음을 전함으로 인한 박해도 없었을 것이다.

사도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이 받았던 박해는 예수를 믿음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신 위격을 가지고 계신 예수님이 따름의 대상이 될 경우에는 예수님을 속죄 사역에서가 아니라 교훈과 본이 되는 삶을 사신 최고의 선지자의 위치로 격하시키는 것이다.

속죄 사역은 오직 성부 하나님과 동등한 위격에서만 가능하며,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창세 전 택하신 자들을 위한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에 근거를 두고있다.

속죄 사역이 제거된 예수의 역할은 선지자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에게서 속죄 사역을 제거하는 것은 삼위 하나님으로서의 성자 그리스도의 위격 자체를 없애버리는 것이다,

따름의 대상이 된 예수의 교훈은 공자의 교훈과 비교되며 간디가 산상순훈을 통하여 존경할 수 있었던 선지자 수준으로 예수님을 격하시키는 부작용을 낳게될 것이다.

예수님이 따름의 대상이 될 때는 기독교와 타 종교의 차이가 있을 수 없게 되며 예수는 단지 기독교라는 종교의 성인에 불과한 인물이 되고만다.

마가복음 10장 45절에는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기록되어있다.

예수님의 사역에서 속죄 사역이 제거될 때 기독교는 더 이상 기독교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기독교는 인간이 만든 여러 종교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4. 따름과 성화

사람들은 예수를 따르는 삶에 너무 나도 관심이 많다.


그러나 인간은 예수를 따를 수가 없다


인간은 예수의 삶을 본받을 수는 있지만 속죄 사역까지 따라 할 수는 없다.


예수의 희생의 주 목적은 따름의 본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한 속죄 사역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다.


예수의 속죄 사역은 누구도 따라할 수가 없다.


예수를 따름의 대상으로 규정하다 보면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가리워 질 수 밖에 없고 기독교는 예수의 희생정신을 따르는 윤리적 종교가 될 수 밖에 없다.


칼빈은 윤리의 개념보다도 더욱 강도가 높은 성화의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성화가 없이 구원의 칭의만을 강조하는 것은 복음이 아니다.


이와는 반대로 성화를 너무 강조하다보면 성화가 구원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러한 경우가 김세윤 교수가 주장하는 유보적 칭의론으로서 성화가 최종적 칭의에 영향을 미친다는 개념이다.


또한 성화는 윤리로 대체되어서는 안된다.


인간이 생각하는 윤리와 성령의 열매로서의 성화는 기준이 다르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성화는 언약 안에 머물기 위한 수단으로서 율법을 지키는 것이다.


새관점에서 보는 산상수훈은 또 하나의 율법일 뿐이며, 이를 지킴으로서 최종적 칭의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산상수훈은 율법보다도 더 지키기 어렵기에 이를 기준으로한다면 이 세상에 최종적 구원을 얻을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성화는 로마 가톨릭에서 주장하는 것과 같이 공로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


로마카톨릭은 은혜를 말하여도 '오직 은혜'를 말하지는 않는다.


공로주의는 인간이 어느 정도는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말하지만 종교개혁자들은 인간의 전적인 부패 즉 '노예의지'를 말한다.


윤리는 성화를 대체할 수 없다.


성화는 (나 자신이 전적으로 부패했기에)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이 주체가 되시지만 윤리는 (내가 그래도 조금은 살아 있다고 생각하기에) 내가 주체가 되려한다.


내가 조금이라도 살아 있다면 따름의 대상이 필요할 것이다.


(새관점주의자들과 같이) 인간의 전적인 부패를 인정하지 않는 이들이 보는 예수는 속죄 사역의 예수가 아니라 희생정신을 보여주신 예수다.


하지만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하였고 노예 의지만을 가지고 있다면 예수를 따를 수 있는 힘은 인간에게는 없다.


오직 성령님이 안에서 역사 하실 때 예수의 길로 인도되는 성화의 삶을 살 수 있다.


성화는 성령님이 주체가 되시기에 윤리와는 비교될 수 없다.


윤리적 삶은 일반 은총의 영역에 속하여있지만 성화는 특별 은총에 의한 것이다.


인간은 누구도 속죄 사역을 할 수 없기에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 성화의 과정을 밟아가는 삶을 살아가야한다.


성화는 칭의를 위한 공로가 아니다.


현대 교회에서 실종된 윤리는 이들이 예수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5. 따름의 대상이 되실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


예수가 따름이 대상이 되어야한다면, 예수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우리가 본받아야한다.


예수를 따름의 대상으로 본다면 예수는 또 다른 기독교의 창시자가 되는 것이다.


예수와 우리는 엄연히 다른 존재이다.


예수는 100% 하나님이시면서 100% 사람으로서 죄가 없으신 분이시다.


기독교는 죄를 사함받기 위하여 죄를 가지고 있어야하는데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기 때문이다.

예수의 종교는 아무 문제가  없는 아들의 위치에서 가지는 종교이기에 우리는 그러한 종교를 가질 수 없다.

그럼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예수의 믿음을 제외한 행동양식을 따라야하는 것인데 이러한 방식은 의식구조가 없는 행동양식이 되는 것이다.

예수를 따름은 윤리의 영역에 한정되어야한다.

예수의 신성이 아닌 인성의 영역에서만 우리의 모범이 되시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예수의 인성에 국한되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의 신성을 깍아 내려서 우리의 모범이 되게끔하는 것은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 것이된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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