톰 라이트가 말하는 젊은 유대인 예수


김원호(dent4834@hanmail.net)


젊은 유대인 예수


톰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는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예수와 많은 차이가 있다.


그 가운데 한 가지는 라이트가 예수를 유대주의적인 맥락에서 삶의 새로운 행동 방식을 보여준 패기 넘치는 유대인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묘사하는 예수는 유대주의와 대립적이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이 중심이 되는 하나님 나라를 새롭게 시작한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톰 라이트는 정통 개혁주의의 기독론을 거부하며, “젊은 유대인”으로서의 예수를 새롭게 정립하고있다.


톰 라이트는 가현설적인, 혹은 반가현설적인 예수를 그리고 있다는 서구 기독교 사회의 예수에 대한 초자연성을 거부하며 좀 더 현실 세계 속에 깊숙히 관여하고있는 예수에 대한 이미지를 그리고자 예수에 대하여 '젊은 유대인'이라는 표현을 하고있다.


라이트는 이 젊은 유대인을 굉장히 위험한, 아니 무모하기 그지없는 소명에 사로잡힌 나머지 눈물을 흘리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성전을 모독한 뒤에 로마의 십자가에 달려 죽는 한 젊은 유대인으로서의 예수라고 말한다.(예수의 도전, 181)


라이트는 십자가의 예수에 대하여, 가시관에 둘러싸인 한 인간의 얼굴로서,소명을 품은 젊은 유대인이 메시아적 사명을 가지고 하나님의 초상화를 다시 그렸다고 말한다.(예수의 도전, 182)


톰 라이트가 사용하는 젊은 유대인이라는 표현은 매우 생소하다.


아마 톰 라이트는 예수를 유대인이라는 맥락에서 그리고 싶었으며, 예수의 삶의 모습이 로마에 떳떳하게 맞서는 용기있는 청년이라는 의미에서 젊다는 표현을 하고있다.


이는 매우 인간적인 표현이며, 예수를 유대교의 완성이라는 맥락 속에 집어넣고서 유대적 이스라엘이 따라가야할 모델로서 그리고 있는 것이다.


톰 라이트에게 예수의 성육신은 1세기 제2성전 유대교에서 해석되며, 성육신 하신 예수의 역할은 유대교와 대립 관계가 아닌 유대교의 완성을 위한 것이다.



새로운 도덕률을 만드신 예수님?


톰 라이트는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하시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시는 것은 그들에게 새로운 도덕률을 제시하시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예수님이 사시던 시대의 유대인들은 이미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높은 도덕률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들에게 더 높은 도덕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도덕과는 다른 새로운 도덕률을 제공하시기 위한 것이라고한다.


라이트는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행실이란 하나님의 주도권과 언약에서 마땅히 흘러 나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예수의 도전, 61)


이와같이 라이트는 유대인의 행실과 예수님의 행실을 같은 속성을 가진 동일한 맥락에서, 같은 목적을 가지고, 같은 방법으로 행하여 질 수 밖에 없는 것으로 본다.


라이트가 보는 예수의 행실은 유대인의 행동 방식의 연장 선상에 있는 것이다.


라이트가 보는 복음은 율법과 대립 관계가 아니며, 율법과 연속성을 가지고 있으며, 불연속적인 속성은 배제된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주의의 완성을 위하여 오셨는가?


톰 라이트는 돌아온 탕자 비유에서, 돌아온 탕자는 바벨론 포로에서 귀한 하는 둘째 아들로, 아버지는 예수님으로, 첫째 아들은 바리세인과 율법사로 묘사하고있다.


라이트는 아버지와 첫째 아들은 같은 집에 있으면서 평소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말한다.(예수의 도전, 52)


이를 직접적으로 표현하면, 예수님은 바리세인과 율법사와 평상시에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는데 바벨론 포로 생활하는 이들에 대한 수용에 있어서 의견 충돌을 빚었다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해석하는 탕자의 비유는, 항상 아버지 안에 있던 바리세인과 율법사들에게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을 수용하라는 것으로 이스라엘의 회복을 통한 유대주의의 완성을 말하고 있다.


라이트는 “네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것이로되” (눅15:31)의 말씀은  바리세인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었음을 암시하고있다고 본다.


즉 최후의 만찬 이전의 예수님과 바리세인 율법사는 아버지와 첫째 아들로서 평소에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보며 최후의 만찬은 둘째 아들을 받아들이는 잔치로 해석한다.


이러한 해석은 라이트만의 독특한 유대주의적인 새관점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


톰 라이트는 바울과 예수는 1세기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고 말한다.(예수의 도전, 76)


라이트는 바울이 그가 저술할 당시에 유대 유일신 사상의 한 분 하나님에 관해 말할 때와 똑같이 예수에 대하여 말하고있다고 말한다.(예수의 도전, 156)


라이트가 주장하는 유일신 사상은, 바울이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 안에 있었다는 것과 같이 예수도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 안에서 이해되어야한다는 것이다.


라이트가 말하는 유일신 사상은, 예수의 행적도 언약적 율법주의라는 1세기 제2성전 유대교의 맥락에서 해석함으로서, 예수를 유대주의의 틀 안에서 해석하려는 시도이다.


라이트가 말하는 유일신은 인간의 구원을 이루는 의의 근원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이다.


이는 구약의 이스라엘이 유일하신 하나님의 의를 근거로한 은혜 안에 머물렀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신약의 성도들도 유일하신 하나님의 의를 근거로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성도의 칭의는 그리스도의 공로에 기초한 것이며, 성도는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아야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


하지만 톰 라이트가 말하는 의의 근거는 불트만 학파인 케제만이 말하는 “하나님의 의”, 즉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이라는 의를 근거로 하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유일신 사상은 의의 근거를 성부 하나님께 통합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유대교의 성전으로서의 예수


라이트는, 성전은 유대교의 핵심적인 ‘성육신’의 상징이었으며, 예수는 진정한 성전이라고 말한다.(예수의 도전, 161)


라이트는, 예수님께서 지니신 소명의식의 중심에는 자신이 성전의 존재와 역할을 하도록 부름받았다고 믿는 신앙이 있었다는 것이고, 자신이 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하는 장소요 수단이라고 주장하셨다고 말한다.


예수는 자신의 소명이 새로운 성전으로 행동하는 것이라고 믿으셨다는 것이다.(예수의 도전, 165)


라이트는, 예수가 자신과 자신의 사명이 성전을 대체한다고 주장하셨다고 말한다.(예수의 도전120)


예수께서는 성전이 상징했던 것을 몸소 구현한 인물이라는 것이다.(예수의 도전,162)


이상에서 톰 라이트가 말하는 성전으로서의 예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언약적 울법주의 맥락에서 성전이 가졌던 의미가 예수로 대체되었다는 것이다.


라이트가 말하는 성전이 되신 예수는,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형성된 유대적 이스라엘의 완성을 의미한다.


라이트가 말하는 성전은 믿음을 통하여 참여되는 것도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성전은 둘째 아담으로서 첫째 아담이 실패한 성전으로서의 에덴을 완성시키신 것이며, 성령의 새창조로 시작된 하나님 나라 백성 가운데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라이트가 말하는 성전되신 예수는 단지 예수를 유대적 이스라엘로 편입시키는 방법에 불과하다.



종식된 유대교의 부활


톰 라이트는 예수가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유대교 세계관의 대표적인 상징에 사로잡히지 말라고 도전하는 의미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을 하셨다고 말한다.


1)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2) 내가 온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하려함이라


이는 오는 시대를 유산으로 받으려면 가족을 떠나야한다는 것이다.


즉 소유를 버리라는 명령이며, 이는 개인의 헌신을 시험하는 최고의 잣대로서, 수도원적인 도전의 원형으로 간주되었다고 말한다.


이는 다음의 이중적 경고와 함께 등장한다고 말한다.


1. 이스라엘은 성전을 짓고있는데 과연 완공할 수 있을까?


2. 이스라엘은 거룩한 전쟁을 하고 싶어 하는데 과연 이길 수 있을까?


이러한 경고는 양도 불가능한 것이 되어 버린 민족적 정체성의 싱징들에 사로 잡히지 말라는 촉구였다고 말한다.(예수의 도전, 87)


이는 예루살렘 성전 파괴와 유대주의의 종식을 설명하기 위한 무리한 적용이다.


라이트의 해석은 유대주의의 종식에 대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사라졌던 유대주의의 부활을 위한 해석이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주의의 종식을 선언하셨는데 반하여 톰 라이트는 다른 차원의 유대적 하나님 나라를 부활시키고있다.



예수의 소명과 유대교


톰 라이트는 예수가 유대교의 상징들을 몸소 구현하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고 말한다.


유대교의 상징로서는 성전과 토라, 말씀(word)과 영spirit)과 지혜(wisdom)들이 있으며, 예수는 야웨께서 온 세상을 위해 이스라엘 가운데 계시며 구원을 베푸신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라고 말한다.(예수의 도전, 179)


이와같이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는 유대교의 부활을 의미한다.



예수의 메시아적 소명


톰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 자신의 메시아적 소명은, 이스라엘의 대표로서 이스라엘이 할 수 없었던 이스라엘의 소명, 곧 세상의 빛이요 종이 되는 그 소명을 이루시는 것이었다고 말한다.(도전 129)


라이트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이스라엘이 이교사상과 싸우려는 욕망 자체를 타락으로 보셨는데 이는 이스라엘이 민족주의 혁명의 온상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며, 예수는 이스라엘의 대표로서 이스라엘의 고난의 문제를 스스로 짊어지시는 것이다.


여기서 라이트가 말하는 이스라엘의 고난은 로마에 대하여 싸우는 방식의 문제였으며, 예수는 이러한 고난을 해결하시고자 새로운 방식을 보여주셨다는 것이다.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의 메시아적 소명은 유대적 이스라엘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예수의 행동 방식


톰 라이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새로운 유대주의적 행동 방식으로 보고있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유대인들의 행동 방식으로는 다음의 세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헤롯방식으로서 로마와 타협하는 유형을 말한다.


두 번째는 이원론적 방식으로서 상황을 피해서 숨어버리는 방식이다.


세 번째로는 시카리(Sicarii)의 열혈당 방식으로서 로마와 정면 충돌하는 방식이다.


예수님의 행동 방식은 유대주의의 행동 방식과 다르며, 예수의 소명과 의제가 극적이고 충격적이라고 말한다.(예수의 도전, 48)


톰 라이트의 이러한 해석은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희생을 속죄 사역이 아니라 유대 이스라엘이 로마에 대하여 어떠한 방식으로 행동하여야 하는지 본을 보여준 방식 차원으로 해석한다.


톰 라이트가 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속죄 사역과는 관계없기에, 십자가를 통한 의도 성립되지 않으며, 전가될 의도 없기에 의의전가 교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로마에 대한 예수의 행동방식이 옳다는 것을 믿으라는 이야기로서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믿음과는 다른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유대주의적 행동방식에 대한 새로운 대안으로서, 그리스도가 유대주의를 완성시키기 위해서 오신 분으로 묘사된다.


톰 라이트는 예수가 유대적 이스라엘을 완성시키신 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반대하던 일부 랍비들은 주후 135년 이후에 메시아주의를 포기하고 사적인 종교로 변해서 토라의 준수를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고 주장한다.(예수의 도전, 205)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톰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는 유대주의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이를 근거로 기독교의 틀을 유대주의의 틀에 맞추어 재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톰 라이트의 “바울에 관한 새관점”은 개혁주의의 교리들을 분해하여 유대주의 맥락에서 다시 조립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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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라이트가 말하는 믿음의 대상으로서의 예수



톰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의 “회개하고 믿어라”는 무슨 뜻인가?


1) 정치적 의미를 지니고있다?


톰 라이트는, 요세프스가 로마의 지휘관으로 예루살렘 귀족들에게 로마에 대한 반역을 하지 말도록 설득하면서 말한 “회개하고 나를 믿어라”와 같은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말한다.


요세푸스의 말은 정치적 의미를 지니고있는 것과 같이 예수님께서 회개하고 믿으라고 할 때에는 정치적 의미를 지니고있다는 것이다.(예수의 도전, 58)


예수님과 요세푸스의 차이가 있다면 예수님의 말씀에는 종교적이고 신학적인 차원이 있다는 것이다.(25)


2) 무엇을 회개하라는 것인가?


청중들에게 자신들의 의제, 즉 요세푸스와 같이 민족주의 혁명과 같은 터무니 없는 꿈을 포기하고 예수 자신이 보여주시는 이스라엘다운 모습, 하나님 나라의 도래, 하나님의 의제를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혁명의 방식을 포기하라는 것인지 민족적인 꿈을 포기하라는 것인지 불분명하다.)


톰 라이트는, 예수가 무장 혁명을 반대한 것은 이런 혁명은 신에게 불충성하고 이스라엘이 세상의 빛이 되길 바라는 그 분의 뜻을 거스르는 방법이란 이유로 반대를 표명했다는 것이다.(예수의 도전, 59)


여기서는 방법에 대한 포기를 촉구한 것이지 민족주의적인 꿈을 포기하라는 말은 아니었다.


라이트는 예수가 믿음을 말한 것은 예수 자신이 로마에 대하여 하려는 행동 방식에 대하여 믿고 신뢰하라는 것이라고 말한다.


라이트가 말하는 믿음은 민족주의적인 꿈을 이루기 위한 행동방식에 대한 방법론적 신뢰를 말하는 것이다.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의 십자가는, 로마 정부에게 어떠한 방식으로 저항해야하는지 삶의 방식을 보여준 것이며, 제자들에게 이렇게 하는 방식이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가야할 방식이며 이러한 방식이 효과있는 방식임을 믿으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예수의 희생을 유대인이나 아니면 인간의 죄악과의 관계성에서 풀어나가지 않고 오직 로마 정부와의 관계성의 문제에서 풀어나간다.


이는 톰 라이트의 유대 중심적 사고에서 나온 것이다.


따름의 대상으로서의 예수


톰 라이트는 예수의 행동 방식이 옳다는 것을 믿었을 때는 이러한 방식을 따라서 살아야한다고 말한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행위와 말을 통하여 새로운 정체성을 지닌 백성, 새로운 가족을 창조하고자 했으며, 이들에게 요구되는 유일한 조건은 예수와 그분이 전하는 메세지를 따르는 것이라고 말한다.(예수의 도전, 97)



믿음의 내용

톰 라이트가 말하는 믿음은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믿음과 많은 차이가 있다.

용어만 같을 뿐 내용에 있어서는 전혀 다르다.

톰 라이트는 예수가 제자들에게 자기를 믿으라고 할 때 그 믿음의 내용은 예수의 행동 방식에 대한 신뢰를 가질 것을 말하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믿음의 내용을 정리하기 위해서 몇 가지 개념을 간략하게 정리해보면서 살펴보고자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

톰 라이트가 말하는 그리스도가 걸어간 십자가에서의 처형은,그동안 이스라엘이 자신들을 압제하던 이들에 대하여 하였던 행동 방식을 수정하는 새로운 방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십자가는 세상에 대한 삶의 투쟁 방식을 제공하는 것이다.

(최후의 만찬의 의미)

톰 라이트는 최후의 만찬이 예수의 성육신 사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말한다.

라이트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의 포로생활을 청산시키고자 오신 것이라고 말한다.


포로생활의 청산 방법은, 유월절 식사를 통하여 유월절을 기념하며 이스라엘이 애굽의 종살이를 청산하였던 것을 상기시키면서, 바벨론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해방을 선포하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왜 십자가를 지셨나?

그동안 이스라엘은 로마와 타협하는 이들도 있었고, 숨어 피해 다니는 이들도 있었고, 또한 격렬하게 투쟁하는 이들도 있었는데, 이러한 방식들이 모두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최후의 만찬을 통하여 포로생활의 종식과 더불어 유대적 이스라엘이 앞으로 어떻게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가야하는가를 보여주는 십자가에서의 희생이라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단일 계획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함으로서 범한 죄로 인한 이스라엘의 국가적 저주를 제거하는 죽음이었다.(박영돈. 톰 라이트 칭의론 다시보기, 136)


예수가 제자들에게 자신을 믿으라는 것은, 이스라엘이 더 이상 똑같은 범죄를 하지 않기 위해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공할 자신의 방식을 믿으라는 것이다.

예수는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서, 십자가를 통한 희생방식이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방식이고, 이스라엘이 이러한 방식을 따라 살아갈 때 유대적 이스라엘을 넘어서 이방 세계로 확장된 이스라엘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라이트가 말하는 십자가에서의 희생은 예수가 자신의 죽음을 통해 이스라엘의 구속과 온 세상의 구속이 성취될 것이라고 믿었음을 보여주는 행동이라는 것이다.(예수의 도전,169)


예수는 누구에 의하여 희생 당했나?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의 죽으심은 로마에 대한 반역에 의한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 민족이 로마에 대한 반역을 어떠한 방식으로 하여야하는지 방식의 본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

(예수의 도전,123)

예수의 죽음은  로마에 의한 정치적 희생이었으며, 예수님의 로마에 대한 의제는 이스라엘 민족이 성전을 회복하고자하는 로마에 대한 의제와 같았다.


라이트는 예수님은 성전을 회복하고자 로마에 대한 반역을 죽음을 통하여 하신 것으로서, 예수님은 혁명적인 왕으로 처형되었다는 것이다.(예수의 도전,131)


라이트는 예수가 성전을 회복하기 위해서 혁명적으로 처형을 당한 것을 믿고서 이스라엘 민족도 자신의 방식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방식이라는 것을 믿고서 이를 따르는 삶을 살 것을 요고한다.


톰 라이트는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에 처형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는 예수를 죽인 주체가 유대인이 아니라 로마였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그리스도는 유대인에 의한 희생이 아니라 세상 정부를 대변하는 로마에 의한 희생이라는  것이다.

라이트는 예수가 이스라엘을 해방 시키기 위한 메시아로서 로마 총독을 대면했으며 로마 군대에 의하여 처형된 인물이라고 말한다.(예수의 도전, 202)



부활의 의미


라이트는 예수가 처형 당한 후 하나님이 예수의 로마에 대한 혁명적 행동방식의 정당성을 입증하시기 위해서 예수를 부활시키셨다고 말한다.(예수의 도전, 25)


톰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의 부활은 로마에 대항하여 로마에 처형당한 예수의 행동 방식이 옳았음을 하나님께로부터 증명받은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옳다고 인정받은 표시로서의 부활은 이스라엘을 포로 생활에서 위대하게 복귀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에스겔 37장 시대 이후 ‘부활’은 다양한 의미를 지녔으며, 이는 포로 생활에서 위대하게 복귀하는 것과 언약이 갱신되는 것을 나타내는 이미지였다고 말한다.


부활은 이스라엘이 지닌 죄와 죽음의 문제(포로 상태)가 해결되었고 야웨께서 자기 백성과 맺은 언약을 갱신하셨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이미지였다고 말한다.(예수의 도전,198)


이와같이 톰 라이트는 부활을 유대적 이스라엘의 정치적 상황에 적용시킴으로서,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처형당함이라는 행동 방식이 옳은 것이기에, 포로에서 해방된 이스라엘은 예수의 행동 방식을 믿고서 이를 따라서 희생적으로 살 때 더 이상의 포로생활을 하지 않게 되리라는 것이다.


신약의 교회

라이트는, 오늘날의 교회는 예수가 이루신 과거의 예수와 이스라엘의 관계를 모델로 삼아 세상을 위한 존재가 되어야 하며, 예수께서 당시 유대교에서 행하시고 말씀하셨던 모든 것은, 오늘날 교회가 세상을 위해 어떤 일을 하고 어떤 모습을 지녀야하는지를 적용해야하는데, 이는 예수의 본을 따라서 해야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도전73)


톰 라이트가 말하는 교회는 이방인 가운데 세워지는 확장된 이스라엘이며, 톰 라이트는 이러한 교회의 중심에는 유대인들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확장된 이스라엘로서의 교회는, 예수를 삶의 모본으로 본을 받는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확장이 되어야한다고 말한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신약의 교회의 믿음은 유대교 안에서 예수의 행동 방식이 하나님께 인정받은 옳은 방식임을 믿으라는 것이다.


나가는 말

메이첸은 예수의 행하신 일보다는 예수 자신을 믿어야하고 예수의 죽음보다는 예수의 인격을 믿어야한다고 말한다. (기독교와 자유주의, 그레샴 메이첸, 76)

예수가 하시는 말씀을 따르는 것은 아담의 후손인 인간에게는 매우 절망적일 수 밖에 없다.

산상수훈은 표면적인 율법보다도 더욱 강화된 내면의 문제를 다루고 있기에 율법도 지킬 수 없는 인간에게는 절망적인 말씀일 수 밖에 없다.

산상수훈은 한편으론 인간이 본질적인 죄인이라는 것을 깊이 깨닫게 해주며, 다른 한편으로는 베드로와 사도들의 변화된 모습과 같이, 성령의 도우시는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감당하여야 할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율법이 하나님의 언약 안에 머물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는 새관점의 주장을 신약에 적용한다면, 산상수훈은 신약시대에 하나님의 의(케제만이 주장하는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의) 안에 머물기 위한 조건이 되는 것이며, 이는 오히려 율법의 멍에보다도 더욱 무거운 멍에을 지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예수의 희생의 방식을 믿으면서 이러한 방식을 따라서 살 것을 말하지만, 성전도 상실된 신약 시대에 이러한 방식으로는 하나님의 의 안에 머무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의 행동 방식을 믿고 따르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삶으로는, 최종적 구원에 이르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에, 예수를 더욱 믿을 수 없는 인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더군다나 한때 새관점을 강하게 비판했던 것과 달리, 새관점을 옹호하는 방향으로 선회한 김세윤 교수는, 성화를 새관점의 율법의 역할과 대비시키면서 "산상수훈은 이중사랑(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같이 사랑하라)에 대한 강해로서 서기관과 바리세인보다도 더 나은 의를 행해야한다"고 절망적인 방향을 제시하고있다. (칭의와 성화, 김세윤, 118)

이러한 새로운 기준은 성화를 구원의 조건이 되는 행함의 원리로 바꾸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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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세계관 2018. 1. 22. 23:20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 기독교 세계관에서의 문화명령 비평

 

김원호(dent4834@hanmail.net)

 

문화 명령

 

인간은 무엇인가를 해야만 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이 하는 일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인생의 삶 가운데 가장 비참한 한 가지는 의미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생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생은 비록 타락으로 말미암아 왜곡되고 일그러졌다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있기에 하나님께서는 부여한 삶의 의미를 찾아가려고한다.

 

악한 이들은 악한대로 자신의 삶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여야 한다.

 

비록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삶의 주체가 아니라고하더라도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책임을 져야하는 것이다.

 

성도는 성경에 비추어 삶의 방식이 주어지고 결정되어야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하느냐에 따라서 자신이 주체가 되어 살아가느냐, 아니면 내주하시는 성령이 주체가 되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느냐가 결정이 된다.

 

창세기 1~3장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분명히 나타내고있다.

 

창세기 1~3장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세계관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특히 창세기 1장 28절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문화 명령, 창조 명령, 통치 명령, 지배 명령등으로 불리워진다.

 

알버트 월터스는 창세기 1장 28절을 창조 명령, 혹은 문화 명령이라고 부른다.

 

알버트는 문화명령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의미를 부여한다.

 

“문화명령은 인간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창조사역이기에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더불어 인간의 타락으로 왜곡된 문화의 방향을 원래의 창조된 구조를 회복하는 방향으로 바꿈으로서 하나님께서 원래 아담을 통하여 목적하셨던 인간의 문명화를 통한 문화의 발전 계획을 계속 진행 하여야한다.”(알버트 월터스, 창조 타락 구속, 81, 이하는 쪽수만 표시)

 

알버트는 인간이 수행한 문화명령의 결과물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부여한다.

 

“하나님께서는 손수 만드신 작품을 버리시지 않으시며 문화 변혁운동을 통하여 이루어질 문화적 산물은 주님께서 재림 하실 때 폐기하지 않으시고 천국에서 보존될 것이다.”(84)

 

알버트는 문화명령을 현재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감당하여야 할 중요한 사명으로 의미를 부여하지만 여기에는 몇 가지 점검해보아야할 논점들이 있다.

 

알버트는 에덴의 속성과 에덴에서의 아담의 역할에 대하여 단지 농사를 지으면서 육체적 노동을 하는 곳으로 단순화시킨다.

 

이에 반하여 최근에 몇몇 신학자들, 특히 존 페스코J.V. Fesko나  그레고리 빌G. K. Beale등은 에덴에 하나님의 왕권을 선포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실행되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전으로서의 의미를 부여한다.

 

이들은 처음 아담이,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3중직, 즉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역할을 에덴에서 수행함으로서, 그리스도의 모형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다고 본다.

 

성전으로서의 에덴이 가나안과 이스라엘의 성전을 통하여 유비적으로 재현됨으로서, 에덴에서 요구되었던 문화명령을, 실패한 아담을 대신하여,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셨다는 개념을 적용할 때 알버트의 문화명령 개념에는 많은 수정이 요구될 수 밖에 없다.

 

아담의 3중직을 고려할 때 창세기 1장 28절의 명령은 문화명령보다는 통치명령, 혹은 지배명령이라는 수식어가 붙게된다.

 

알버트가 말하는 창조명령으로서의  문화명령에 대해서 몇 가지를 더 생각해보기로하자.



창조명령

 

알버트는 문화명령이라는 용어보다는 창조명령이라는 용어를 더 선호한다.

 

알버트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여섯째 날에 사람의 창조와 함께 완결되었으며 일곱째 날에는 안식하셨지만, 이것으로 창조 과정, 즉 창조의 발전 과정이 끝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직접적인 창조 사역에서는 물러나셨지만, 대신에 자신의 형상을 땅 위에 세우시고 그에게 그 일을 계속 할 것을 명령하셨다.

 

이제 사람들은 창조 사역으로서의 발전 사역을 계속해야만하며, 이 발전 사역에는 사회적이고 문화적 발전인 문명의 발전이 포함되어있다. (78쪽)

 

알버트는, 하나님의 창조가 6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로서, 하나님의 창조 활동을 지속적으로 이어나가야하는 사명을 부여받았으며, 창 1:28의 문화명령을 근거로 하는 문명의 발전을 위한 인간들의 문화 활동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창조 행위에 속하여있다고 말한다.

 

인간이 행하는 문화활동이 하나님의 창조 행위라는 의미에서, 알버트는 창세기 1장 28절을 창조명령이라고 부른다.

 

알버트는, 그리스도인은 창조적 회복을 위해서 하나님의 땅의 관리자로 재임용 되었기에, 그리스도인은 모든 피조계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으로 인하여 본래의 선한 구조로 회복되도록 하여야한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서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대하여 원래 가지고 있던 페러다임을 바꾸어야만 하며,  창조명령의 차원에서 문화변혁운동에 참여하여야한다고 말한다.

 

알버트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으로 다시 시작된 문화변혁운동은 사람이 경영하는 하나님의 창조 영역에 속하여있는 것으로 본다.

 

문화칼빈주의자들은, 대체적으로 문화명령cultural mandate을, 하나님께서 이 땅을 창조하신 후에 이 땅을 다스리라고 아담에게 주어졌던 창조 사역의 연장선상에서 보고있으며,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 제대로 완성 될 수 없었지만,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인해서 회복된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은 아담이 못 다 이룬 창조적 문화 명령을 이어받아 문화 활동을 창조 사역의 차원에서 계속적으로 수행해 나아감으로서, 아담에게 맡겨졌던 원래의 사명대로 문화를 회복하여야 할 것을 말한다.( Engaging God’s World, Cornelius Plantinga Jr. p32)

 

즉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다시 시작함으로서, 길들여지지 않은 문화적 사회적 환경을 원래의 선한 구조로 회복되도록, 문화명령을 지속적으로 수행하여야한다고 말한다


알버트는, 그리스도인이 수행하는 문화 명령에 의한 문화 변혁운동은, 창조적 차원에서,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수행해야할 명령으로 보고있다.(78)

 

이렇게 문화명령의 실행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문화물은 궁극적으로 천국에서 보존될 인간의 창조물이 되는 것이며, 이는 창조 사역이 마지막에 최종적으로 완성되어지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이어지는 전체 그림의 완성을 위한 한 부분이 되는 것이다.

창조명령의 실행에 의한 문화물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한 부분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예수님 재림 후에 임할 새 하늘과 새 땅이, 현재의 이 땅이 폐기되는 새로운 땅이 아니라 현재의 상태가 본래의 선한 창조 상태로 회복되어야만 한다.(116쪽)

 

즉 이 땅에서 폐기되어지는 것은 없기에, 우리의 할 일은 다만 문화 구조의 왜곡된 방향을 바로 잡는 일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마이클 고힌이 추구하는 선교적교회missional church의 문화변혁운동은,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지속적으로 수행하는 차원에서 행해지고있는 것이다.

 

선교적교회missional church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 모든 피조계가 구속받았기에, 이 땅에 있는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아담이 제대로 실행하지 못한 문화 명령을 다시 제대로 실행하여야 하는) 하나님의 땅을 관리하는 관리자로 임명 받은 사람들이다.(117쪽)

 

알버트의 창조 명령 개념에는 다음과 같이 몇 가지 논의할 점들이 있다.

 

1) 에덴을 성전이 아닌 농업과 기술적 문명의 원시상태로 보고있다.

 

2) 아담의 역할이 제사장, 선지자, 왕이 아니라 기술을 발전시켜야할 과제를 가진 이로 보았다.

 

3) 창조 명령을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의 왕권을 실행하는 통치 명령의 차원에서 보지 않는다.

 

4) 아담을 오실 자의 모형으로서 마지막 아담과 연계시키지 않는다.

 

5) 그리스도를 아담이 실패한 창조 명령, 즉 통치 명령을 다 이루신 분으로 보고있지 않다.

 

6) 문화 명령, 즉 통치 명령의 실행을 신자의 몫으로 보고있다.

 

7) 문화 명령, 즉 통치 명령을 이 땅에 시작된 안식의 영역인 하나님 나라로서의 교회와 연계시키지 않는다.

 

8) 신자의 역할이 지상 명령, 즉 대위임령이 아니라 문화물의 천국 보존을 위한 문화 변혁 운동이라고 보고있다.

 

9) 성도가 행하여야 할 창조적 발전을 아담이 실패한 문화 명령의 재실행으로 규정함으로서 그리스도가 완성하신 안식의 영역을 다시 완성시키려하고있다.

 

10) 하나님의 형상을 왕으로서의 통치 개념보다는 창조적 능력과 연계시키고있다.

 

11) 에덴에서의 상태를 종말론적 축복과 영생이라는 안식을 위한 행위 언약 아래에 있었던 상태로 보지 않는다.

 

12) 에덴에서의 아담과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과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성도를 유형학적으로 대비시키지는 않는다.



그리스도는 문화명령을 완성하셨는가?

 

일반적으로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 운동을 하는 이들이 보는 관점과 마찬가지로, 알버트는 모든 피조계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으로 인하여 본래의 선한 구조로 회복되기 위해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땅의 관리자로 재임용 된 것으로 본다.(117쪽)

 

이에 그리스도인은 아담이 실패한 창조명령을 이어 받아서 계속적으로 창조 사역을 감당하여야 하는지에 대하여 생각해 보아야한다.

 

알버트의 세계관을 이어받은 리처드 미들턴은, 그리스도인이 행하여야 할 과제로서, 문화명령을 대위임령보다도 한 차원 높은 사명으로 보면서, 그리스도인은 문화명령을 다시 시작 하여야한다고 말한다. (리처드 미들턴, 새 하늘과 새 땅, 257쪽)

 

죄는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라는 것을 하지 않는 죄와 하지 말라는 것을 하는 죄가 있다.

 

하라는 것은 적극적 순종을 요구하는 것이고, 하지말라는 것은 최소한도로 금지된 것만 하지 않으면 되는, 소극적 순종을 요구하는 것이다.

 

성전으로서의 에덴에서는 이와같이 두 가지 순종의 요구가 있었다.

 

창조명령이라고하는 문화명령에는 아담에게 최대한도로 적극적 순종이 요구되었으며, 선악과 금령에는 아담에게 최소한도로 소극적 순종이 요구되었다.

 

아담은 일차적으로 통치명령을 제대로 행하지 못함으로 다스려야할 대상으로부터 유혹되는 결과를 낳음으로서 2차적으로 선악과 금령을 범한 것이다.

 

이 두 가지는 긴밀하게 연관되어있으며, 아담은 이 두 가지 모두에서 불순종 한 것이다.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두 가지 순종은,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신 적극적 순종과 십자가에서의 속죄 사역을 통한 수동적 순종으로 완성을 시키셨다.

 

에덴에서 요구되었던 두 가지 순종의 완성이 안식으로 귀결되어야했었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의 요구와 저주를 충족시키심으로 안식의 주인이 되실 수 있으셨다.

 

마태복음 11장 28절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의 말씀을 하실 수 있으셨던 것은 에덴에서의 요구를 그리스도께서 충족시키셨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 회복하신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직분은 아담이 원래 가지고 있었으나 상실되었던 직분이었다.

 

그리스도가 마지막 아담이시면서 안식의 주인이 되신 것은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통치 명령과 선악과 금령, 그리고 불순종의 죄값을 다 치루셨기에 가능한 것이다.

 

창세기 1장 28절의 명령이,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완성이 되었다면, 리처드 미들턴 뿐만이 아니라 알버트 월터스의 주장도 설득력을 상실하게된다.

 

창세기 1장 28절의 요구는 행위 언약의 요구를 통한 안식이라는 종말론이 내포되어있으며,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통치 명령은 일정한 검증의 기간 후에는 영원한 생명과 축복이라는 안식이 약속된 것이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 상에서 다이루셨다고 선포하신 것은 마지막 아담으로서 첫번 째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행위 언약을 다 이루신 것이다.

 

행위 언약은 신자에게 전가될 그리스도의 공로의 근거이며,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안식을 위한 행위의 근거였다.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한 안식의 성취는 창세 전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이라는 언약적 맥락에서 이해되어야만 하며, 창세기 1장 28절의 명령은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해석되어져야 할 것이다.

 

이는 행위언약 개념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부담스러운 주장이다.

 

알버트가 선교적교회 운동을 하는 마이클 고힌과 “창조 타락 구속”을 공동 저술 할 수 있었던 것은 행위 언약에 대한 공통적 거부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는 마이클 고힌의 선교적교회의 이론적 근거인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가 행위 언약 개념을 거부하는 칼 바르트에게서 나왔기 때문이다.

 

알버트의 “창조 타락 구속” 패러다임은, 칼바르트와 마찬가지로, 창세 전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과 행위 언약 개념을 배제하고있기에, 행위언약 개념을 수용하는 개혁주의 신학과 부조화를 이룰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행위언약은 종말론적 안식을 위한 요구 조건이다.

 

에덴에서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두 가지 명령, 즉 적극적 순종을 요구하는 문화명령과 수동적 순종을 요구하는 선악과 금령은 종말론적 안식을 위한 행위언약으로서의 명령이었다.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요구에 대한 적극적 순종과 율법의 저주에 대한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은 행위언약에 대한 요구를 충족시켜준 공로적 행위으로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이루신 이 두 가지 의를 신자에게 전가시켜주심으로서, 행위언약 아래있던 자들을 의롭게 만드실 수가 있으셨던 것이다.

 

에덴에서의 문화명령과 선악과 금령은 이스라엘에서 율법을 통하여 유비적으로 재현republication되었으며,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요구에 대한 순종을 통해서, 문화명령과 선악과 금령에 대한 요구를 충족시키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창조명령을 다시 수행하여야한다는 주장은,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신 율법의 요구를 다시 수행하여야한다는 주장과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명령과 선악과 금령은 안식을 위한 요구조건이었으며, 신자는 이미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안식 안에 거하는 자이다.

 

바울의 서신서는, 그리스도인이 창조명령을 다시 수행함으로서 문화물의 천국보존을 위한 문화변혁 운동에 참여해야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것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으며,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것은 복음 전파에 대한 지상 명령, 즉 대위임령(마 28:19~20)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다.

 

성도에게 요구되는 것은 교회를 교회답게하며, 이 땅에 교회를 세우고 확장시켜나가는 것이기에, 이는 창조 명령을 통한 창조적 문화변혁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문화명령의 지속성

 

알버트는 창조주 하나님을, 무대를 마련하시고 무대 뒤로 물러나 계신 감독으로서의 하나님으로 묘사하고있다. (81쪽)

 

그렇다면 아담의 타락으로 무대 공연의 중단되었다면 그리스도가 무대 공연을 마치셨는지, 아니면 우리에게 맡기실 것인지가 궁금해진다.

 

알버트의 말대로라면 그리스도는 아담이 중단한 무대 공연을 하지 않으신 분이 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 두 번째 아담이라는 용어를 붙이는 것은 잘못된 용어가 된다.

 

그리스도께서 아담이 중단한 무대공연을 지속해야한다면, 과연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인해서 다시 무대에 설 수 있는 자격이나 능력이 생겼다는 것인가?

 

설령 인간이 다시 무대에 설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 땅이 에덴에서와 같이 다시 시작 할 수 있는 구조를 보존하고있는가?

 

여기에 대해서 알버트는 대부분 긍정적인 대답을 한다.

 

알버트가 수용하고 있는 톰 라이트의 말을 빌리자면, 성경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이는 우리가 만들어가야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데이비드 웰스의 말을 빌려본다: “라이트는 자기 논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이상한 예화를 든다. 가령 5막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 세익스피어의 희극이 오늘 4막까지만 발견되었다고 한다면, 우리가 최대한 충실하게 5막을 만들어서 희극을 완성시켜야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처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용기있는 기독교, 데이비드 웰스, 136).

 

알버트가 창조 명령을 다시 수행함으로서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완성하자는 말은, 성경의 이야기가 미완성된 상태이기에 우리가 이를 마무리하자는 톰 라이트의 주장과 유사하다.

 

성전으로서의 에덴과 그리스도의 적극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의 개념을 생각할 때, 인간의 문화 활동을 통한 창조적 발전은 안식을 이루신 그리스도 안에서는 의미가 없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안식은 에덴에서 요구되었던 통치 명령으로서의 문화 명령의 성취에 의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문화 명령은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3중직의 개념과 관련되어 생각되어져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아담에서와 같이 그리스도와 연합된 신자에게는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역할이 주어진 것이다.

 

이 세 가지 직책은 문화 활동과 같은 사회적 구조보다는, 영적인 하나님 나라의 구조에 맞추어져있는 것이다.

 

알버트는 하나님의 형상의 본체이신 그리스도의 3중직이 성도 안에서 실현되어야하는 것보다는 오직 창조적 발전이라는 논리를 하나님의 형상에 접목시킨다.

 

타락과 더불어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는 내적 구조의 붕괴와 더불어 외적 구조만이 남아있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회복된 내적 구조는 오직 영적인 구조로 제한된다.

 

영적인 구조를 외적인 구조로 바꾸는 눈에 보이는 교회 마저도 인간의 부패된 죄성을 그대로 보여주고있다.

 

조직으로서의 교회마저도 제대로 부패의 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불신자들과 공유되는 사회 문화의 구조를 바꾸는 것은 더더욱 현실성이 없다.

 

인간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더라도 여기에는 생명이 상실된 외적 구조만이 남아있다.

 

진정한 생육과 번성은 신자로서의 아브라함의 영적인 자손을 그릿,도의 지상 명령을 통해서 확대시키는 것이다.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자가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은 역사적 이스라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생육과 번성은 지상 명령으로서의 그리스도의 대위임령(마 28:19-20)을 실행함으로서, 참된 아브라함의 자손을 확장시킴으로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알버트가 지속적으로 수행하자고 권하는 구조의 방향전환은 이미 생명이 상실된 외적 구조에 대한 것 뿐이다.

 

그리스도의 순종과 안식은 잃어버린 내적 구조의 회복이며, 여기에 진정한 생명이 있으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시작된 안식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완성될 것이다.

 

메러디스 클라인이 말하는 종말에 이루어질 상위 구조upper-register와 하위 구조lower-register의 만남에 부합되는 하위 구조는 오직 내적 구조로서 그리스도께서 시작하신 안식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통치 명령은 그리스도의 안식 안에서 성취되었지만, 통치 명령이 지상 명령, 즉 대위임령으로 대체됨으로 인해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연속되어질 결과물은, 창조 명령에 의한 창조적 문화 변혁의 성과물이 아니라, 복음 전파에 의하여 결실을 맺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문화변혁운동의 근거

 

알버트는 주님이 손수 만드신 작품을 버리지 않으시며,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하나님의 창조와 우리가 그것을 문화적으로 발전 시킨 것을 폐기하지 않을 것에 대한 확신이 있다고 말한다. (84)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에서는 에덴을 초기 구석기와 같이 발전하지 않은 원시적 상태로 보며 문명의 발전에 대하여 긍정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비록 문화 형태는 죄로 인하여 손상되었지만 문화의 근본요소는 아직 선하게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문화는 회복될 것이고 이는 문화변혁운동에 참여하는 근거가 된다.

 

하지만 문명의 발전이라는 속성에는 많은 부분 화석 연료의 사용이 필수적이며 화석연료를 사용하는 산업과 엔진은 죽음이 전제된 화석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신칼빈주의자인 엔디 크라우치는 자신의 저서 “컬쳐 메이킹”에서 자동차 미니쿠퍼나 불고기등이 천국에서 보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알버트 월터스는 발전 과정에서의 도시화, 산업화 혹은 내연 엔진 등을 배척할 이유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적인 측면에서 볼 때 문명의 발전은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의존을 줄임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저하시킨다는 점늘 고려해야만 한다.

문명의 속성 가운데 한 가지는, 인간의 필요를 하나님과 관계없이 인간 스스로 해결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삶에 있어서 생기는 문제의 원인이 많은 부분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손상에서 오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하나님과 관계없이 인간의 기술로 스스로 해결함으로서 점점 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창조 타락 구속"에서는 발전이라는 것이 인간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속성에 대하여는 생각하지 않고, 발전 자체를 구조의 선한 방향에 포함시키려 하고 있다.



문화물의 천국보존에 대한 주장들

 

알버트는, 문화변혁cultural transformation에 의한 결과로서의 문화물은, 다가올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최종적으로 완성되는 것이기에,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은 문화 활동을 통하여, 계속되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과정에 동참함으로서, 하나님과 협력하여 천국에서 보존될 문화를 완성시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알버트는, 하나님께서는 손수 만드신 작품을 버리시지 않으시며, 문화 변혁운동을 통하여 이루어질 문화적 산물은 주님께서 재림 하실 때 폐기하지 않으시고 천국에서 보존하실 것이라고 말한다.(84쪽)

 

이는 카이퍼가, 문화물이 종국적으로 새 하늘과 새 땅에 영입되며, 또한 주님은 손수 만드신 작품을 버리시지 않으신다고 하는(송인규, 일반 은총과 문화적 산물, 12쪽) 주장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알버트는 정화된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사람들의 문화적 소산들이 포함될 것이며, 이러한 문화적 소산은 우리가 지금 경험하는 것과 연속성에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86쪽)

 

플란팅가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는 것들, 즉 치유와 정의와 어둠에 대하여 지적인 빛을 발하는 것과,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도움이 되는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것들은 다음 생애에서도 보존이 될 것이다”고 말한다.(Plantinga, Engaging God’s World, 137–38.)

 

톰 라이트의 관심사는 신칼빈주의자인 알버트 월터스와 플란팅가의 관심사와 비슷하기에, 알버트는 자연스럽게 톰 라이트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알버트에게 도움을 준 톰 라이트는, 현재 개조된 세계가 보존될 것을 말하면서, 세계를 개조하는 작업이 장래 하나님께서 만드시고자 하는 세계에 연결될 것이라고 본다.

 

톰 라이트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언제나 그렇듯이) 이원론적이며 반창조적이라는 비난을 가한다.(예수의 도전, 톰 라이트,  267)

 

라이트는 현세계에서 성령의 능력 가운데 수행된 일들은, 성령님께서 미래로부터 현세로 오셔서, 사람들과 교회를 형성하시고 준비하시고, 미래를 위해 일하게 하신다고 믿기 때문에, 새 하늘과 새 땅에서도 잔존할 것이라고 말한다.(resurrection of the Son of God, N. T. Wright,  p285)

 

반두르넨은 “톰 라이트는 현세적 하나님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현세의 문화 활동을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이어질 문화라는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이해하고 접근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현재 우리가 하는 일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새 창조의 일부가 될 것이며 이는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이며 하나님의 미래까지 지속될 것이라는 신 칼빈주의의 입장과 매우 비슷한 주장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하나님의 두 나라 국민으로 살아가기, 반드루넨, 21~24쪽)

 

라이트는 예수님의 부활과 더불어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미 실현되었으며, 새 하늘과 새 땅은 이미 이 땅에 실현된 하나님 나라의 완성으로 보고있다.

라이트는, “부활은 현재 우리가 복음을 위해 열심히 하는 일이 낭비되지 않을 것임을 뜻한다(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톰 라이트, 257)”고 말한다.

이는 부활 시에 도래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현재 우리의 행함의 결과들이 보존되리라는 것이다.

라이트는 현재적 하나님 나라와 미래적 하나님 나라가 연속 선상에 있으며,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 요구되는 것은 지속적인 훈련과 연습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한다.(그리스도인의 미덕, 톰 라이트, 71)

라이트가 주장하는 이러한 연습의 필요성은, 미래적 하나님 나라(새 하늘과 새 땅)가 현재적 하나님 나라의 연속선상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라이트에게 이미와 아직의 개념은, 이미 이 땅에 실현되어 드러난 하나님 나라가 다만 지상에서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라이트는 사후 천국의 세계를 인정하지 않는다.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 톰 라이트, 50)

라이트에게는 현재만 있으며, 현재는 미래의 완성을 위한 진행 과정 가운데 있는 것이기에, 미래의 완성을 위하여 성도가 이 땅에서 무엇인가를 하여야한다는 것이다.

현재적으로 행하여지는 외적인 행위는 마지막 심판에 태워없어질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데이비드 반 드루넨은, 문화물이 천국에서 보존될 것이라는 가정 하에서 문화변혁 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구속적 변혁주의 문화관”이라고 부른다.

 

반드루넨은 오직 우리의 존재만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들어간다고 말하면서,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이 땅의 제도와 활동은 급작스럽게 그리고 철저히 종결될 것이라고 말한다.(반 드루넨,하나님의 두 나라 국민으로 살아가기, 34쪽)

알버트는 요한계시록의 말씀(계 21:24,26)에서 땅의 왕들이 정화될 인류의 문화적 유산을 가지고 새예루살렘에 들어갈 것을 말하지만(85쪽), 반 드루넨은 문화물의 천국보존의 근거로 가장 많이 인용되고 있는 이 요한계시록(21:24~26)의 말씀이, 땅에 속한 왕들과 나라들이 장차 올 세상으로 문화적 산물을 가지고 오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자기 구원자 그리스도께 찬양 드리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라고 말한다.(데이비드 반드루넨, 하나님의 두 나라 국민으로 살아가기, 278쪽)

 

알버트의 주장대로, 요한계시록의 말씀(계 21:24,26)이 땅의 왕들이 정화될 인류의 문화적 유산을 가지고 새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심판이 천국 입성후에 이루어지게되는 모순점을 드러내게된다.


새 예루살렘은 오직 신자만이 들어가도록 허락되었기에(계21:27, 22:14~15), 여기서 말하는 나라와 왕들은 그리스도인임에 틀림없고, 여기서 언급되는 왕은 하나님의 백성을 묘사한 것(계3:12, 5:9, 20:4)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성경에는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베전2:9)라고 기록하면서 성도들을 왕과 나라와 백성으로 묘사하고있다.

요한 계시록에 대한 반 드루넨의 해석은 같은 구절을 가지고 문화물의 천국 보존의 근거를 삼는 송인규(일반은총과 문화적 산물, 294~)의 해석과는 대조를 이루고 있다.


어거스틴, 루터, 칼빈은 신칼빈주의자들이나 새관점의 톰 라이트, 브라이언 맥클라렌과 같은 이머전트들의 주장과는 대조적으로, 그리스도인의 문화 활동과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 세계에 대한 소망을 분명하게 구별 했다.

 

반드루넨은 이 땅에서의 인간의 문화는 한시적이고 없어질 임시적인 문화temporary culture라는 것이다.(David VanDrunen, Living in God’s Two Kingdom, p 25).

 

또한 반드루넨은, 그리스도인은 일반나라에 속한 문화생활과 활동보다는 교회 생활과 사역이 삶의 중심이 되어야한다고 말한다.(David VanDrunen, Living in God’s Two Kingdom, p131~)



두 아담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의 패러다임에 결핍되어있는 것 가운데 한 가지는 두 아담의 대비 구조가 없다는 것이다.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역할은 기독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에 들어와서 신학이 기독론 중심에서 신론 중심으로, 구원론보다는 하나님 나라 개념으로 중심이 이동된 것이 알버트의 “창조 타락 구속”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현상은 신칼빈주의 전체에 걸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반드루넨은 최근의 신칼빈주의를 논하면서 “아마 신칼빈주의에 대하여 먼저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이들이 성경의 이야기를 ‘창조, 타락, 구속’의 이야기로 표현한다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Living in God’s two Kingdom, David Vandrunen, 17)

 

“창조, 타락, 구속”은 성경의 이야기의 근본되는 윤곽이지만, 이는 좀처럼 두 나라 교리에서 강조하는 두 아담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이야기라는 측면만이 아니라 명령과 언약과 교훈등 다양한 특성들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알버트는 톰 라이트가 즐겨 사용하는 이야기라는 용어를 적용한다.

 

반드루넨이 신칼빈주의 작가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생각들에 동의하지 않는 가장 중요한 점은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이나 구속이 바로 핵심적인 회복restoration이면서 동시에 재창조re-creation라는 것이다”” (Living in God’s two Kingdom, David Vandrunen, p. 18).

 

바울이 아담을 오실자의 모형이라고 기록하였던 것과 같이 아담과 그리스도는 핵심적인 연관성을 갖는다. (롬 5:14)

 

아담은 그리스도의 모형으로서 아담의 역할은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다.

 

아담에게 창조적 발전이 요구되었다면 그리스도에게도 창조적 발전을 이루시는 분이되어야한다.

 

아담은 하나님과 행위 언약 안에 있었으며,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는 행위 언약을 다 이루신 분으로서 언약의 종결과 안식으로의 귀결을 선언하신 분이시다.

 

언약 신학에서 아담의 실패는 노아 언약, 아브라함 언약, 모세 언약을 통하여 유형학적으로 재연되면서 그리스도의 새 언약으로 귀결되는 모습을 보여주고있다.

 

마지막 아담으로 귀결되지 않는 알버트의 “창조 타락 구속”은 또한 언약 신학적인 관점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다.

 

아담에게 주어졌던 통치 명령은 안식으로 귀결된다.

 

아담의 실패는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완성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3중직은 아담이 에덴에서 상실한 것이었다.

 

아담에게 주어졌던 통치 명령은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안식의 주인이 되실 수 있으셨던 것은 통치 명령의 성취에 의한 것이다.

 

하지만 알버트는 통치 명령으로서의 문화 명령을 성도가 다시 시작하여야할 명령으로 규정하고있다.

 

이는 그리스도의 공생애 사역과 통치 명령이 서로 관계가 없는 것으로 보고있기 때문이다,

 

알버트는 문화명령을 성도의 과제로 인식하고서 문화명령을 실행하는 방법으로 구조의 방향성에 대한 변경을 제시하지만, 반드루넨에 의하면,문화명령은 두 번째 아담이신 그리스도가 실행하셔서 완성시키셨다는 것이다.

 

반드루네의 해석대로라면, 신칼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문화명령에 대한 재실행은, 두 번째 아담이신 그리스도가 처음 아담이 실패한 문화명령과는 관계없는 사역을 하신 분이 된다.



에덴 성전

 

알버트는 에덴을 문화적 관점에서 원시적인 미발전 상태로 보고있다.

 

가령 아담과 하와가 바퀴를 사용하였는지, 혹은 직물을 만드는 방법이나 벽돌 굽는 방법들을 몰랐을 것이라고 추정한다.(126)

 

하지만 에덴에서 아담에게 요구하였던 하나님의 관심사가 문명 기술의 발전이었을까?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과연 이러한 기술들이 하나님의 형상의 표현이었으며, 기술의 발전이 하나님의 형상을 이 땅에 구현하는 것이었을까?

 

알버트는 에덴에서의 아담을 발전이 요구되는 문화명령을 수행하여야만 하는 인물로 묘사한다.

 

아담에게 주어졌던 창세기 1장 28절의 명령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지만, 이를 문명과 관련된 문화명령, 혹은 창조명령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성전 전체에 대한 해석의 틀을 바꾸어버릴 수가 있다.

 

에덴을 성전으로 보느냐, 아니면 문명의 발전을 위한 원시적인 미발전 상태로 보느냐는 성경을 해석하는 방향을 전혀 달리할 수 있다.

 

그레고리 빌G.K.Beale이나 존 페스코J.V.Fesko를 비롯하여 최근 많은 신학자들이 에덴을 최초의 성전이라는 관점에서 보고있다.

 

이들은 에덴에서의 아담의 주요 역할을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역할로 보고있다.

 

(존 페스코J.V.Fesko의 “태초의 첫째 아담에서 종말의 둘째 아담 그리스도까지”에 대한 요약은 여기참조)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가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삼중직을 회복하신 것은 첫번째 아담이 실패한 삼중직에 대한 회복이었다.

 

에덴동산은 하나님이 거하셨던 장소로서의  성전이었으며, 아담은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을 예배하였다.

 

에스겔 28장 11~19절은 아담의 제사장 직을 명시적으로 보여준다.

 

에스겔 28장 13절의 보석은 대제사장의 판결 흉패와 일치하는데 이것들은 의를 상징한다.

 

에스겔은 두로를 하나님의 동산 에덴이라고 부른다(겔 28:13)

 

에스겔 28장 2절의 두로 왕의 “나는 신이라”라는 주장은 아담이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여기서 에스겔은 두로를 하나님의 동산 에덴이라고 부른다(겔 28:13). (부흥과 개혁사, 언약신학으로의 초대, 72~)

 

이는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직책을 회복시키신 것과도 관련이 있다.

 

통치 명령(창 1:28)에서 다스림의 대상이 되는 생물에는 들짐승(창 3:1)이 포함되어있다.

 

들짐승 가운데 가장 간교한 뱀도 아담에게 주신 하나님의 통치 명령의 대상에 포함되어있었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주신 통치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음으로서 다스려야할 대상으로부터 다스림을 받게 된 것이다.

 

선악과 범죄는 일차적으로 통치 명령을 어김으로서 나타난 결과물이다.

 

아담은 왕으로서 에덴을 다스리는데 실패했지만 그리스도는 사단을 물리치심으로 다시 왕권을 되찾으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에덴의 풍요와는 달리 광야에서 금식하신 후에 사단의 시험을 물리치셨으며, 사단을 정복하셨기에 율법의 마침이 되실 수 있으셨다.

 

어떤 신학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적극적 순종으로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셨다는 성경의 구절이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에덴에서의 통치 명령과 선악과 금령은 가나안에서 율법으로 재연republication되었으며, 그리스도께서는 첫 번째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통치 명령과 선악과 금령을, 광야에서 사단의 시험을 물리치시고 십자가에서 율법의 저주를 충족시키심으로서 완성시킬 수 있으셨다.

 

에덴에서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것은 종말론적 축복과 영생이라는 안식이었으며, 그리스도의 사역은 둘째 아담으로서 아담의 실패를 완성시키심으로 안식의 주인이 되실 수 있으셨다.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을 누리는 가운데, 지상 명령을 수행함으로서  그리스도도 안식은 전해야한다.

 

하지만 알버트는 에덴을 오직 문화적 관점에서 원시적 미발전 상태로만 보고(126쪽), 성도는 다시 문화의 발전을 위해서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지속해야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관점은 두 번째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역할에 대한 개념이 배제된 것이며, 알버트에게 그리스도는 에덴의 문화를 발전시키신 분이 아니며, 문화의 발전은 오직  성도의 몫이 되는 것이다.



문화의 발전은 구속적 창조의 과정인가?

 

알버트는 다음과 같이 구속적 창조에 대하여 말한다.

 

● 창조 사역은 발전의 사역을 통하여 계속 진행되어야한다.(78)

 

● 문화명령은 인간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창조사역이기에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더불어 인간의 타락으로 왜곡된 문화의 방향을 원래의 창조된 구조를 회복하는 방향으로 바꿈으로서, 하나님께서 원래 아담을 통하여 목적하셨던 인간의 문명화를 통한 문화의 발전 계획을 계속 진행하여야한다.(81)


● 문화의 발전 즉 인간의 문명화 단계는 창조적 발전이다.(81쪽)

 

 

 

마이클 호튼Michael Horton은, 성경을 문화와 연관시키고자 하는 관심은, 그 특성상 현대적 강박관념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마이클은 문화 그 자체를 이성이나 경험이나 전통 못지않게 믿음과 상반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문화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발견 할 수 있는 어떤 본질적인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문화 속에 있는 진리와 정의와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일반은총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문화의 배경이 되는 자연신학은 언제나 일종의 우상 숭배로 발전하기 마련이고 교회는 복음과 문화 사이의 대화를 촉진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마이클 호튼 개혁주의 조직신학 206~)

 

이머징미셔널 처치와 같은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선교적 교회를 중심으로한 문화에 대한 관심은, 나무의 나이테와 같이, 점진적 진리의 완성이라는 테마와 맥락을 가지고, 창조 과정의 점진성이라는 알버트의 창조적 발전에 동참하고있다.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의 기초적 토대를 마련한 GOCN(Gospel and Our Culture Network)의 주제는 문화와 복음의 접목이다.

 

알버트는 문화를 구속의  주제에 포함시킴으로서 선교적 교회 운동을 하는 마이클 고힌과 함께 “창조 타락 구속”을 공동 저술하면서 GOCN의 범주 안에 스스로를 포함시킨다.

 

마이클 호튼이 문화를 일반 은총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알버트는 문화물의 구조를 하나님이 창조 하신 대상으로 보면서, 문화물을  구속의 대상인 특별 은총의 영역으로 편입시킨다.



창조와 발전, 그리고 안식

 

알버트의 “창조 타락 구속”의 번역이 일부 생략된 부분이다. (78)

 

“하나님은 창조 사역에서 물러나셨지만, 자신의 형상을 땅위에 세우시고, 그에게 그 일을 계속 할 것을 명령하셨다.

Although God has withdrawn from the work of creation, he has put an image of himself on the earth with a mandate to continue.

 

(번역이 생략된 부분- 필자의 번역)

땅은 완전히 혼돈하고 공허하였다; 하나님께서는 6일간의 발전 과정을 통해서 형태를 만드시고 채우셨지만, 완전하게 형태를 만드시고 채우신 것이 아니었다.

The earth had been completely unformed and empty; in the six-day process of development God had formed it and filled it - but not completely.

(알버트는 하나님의 6일간의 창조 사역 대신에 6일간의 발전 과정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제 사람들이 발전의 사역을 계속하여야 한다.”

People must now carry on the work of development:

…..

 

그러나 이제 이것은 인간적인 땅의 발전이어야한다.

But this is now to be a human development of the earth.

 

발전이라는 용어에는 미완성이라는 개념이 포함되어있다.

 

알버트는 하나님의 6일간의 창조 사역을 통하여 이루신 세계를 발전의 개념에서 미완성된 창조 세계로 보고있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인간이  마무리해서 완성해야만 한다면, 창조 세계는 하나님과 인간의 협력에 의한 결과물이 되는 것이다.

 

위에 인용한 부분의 중간 부분은 번역(78쪽)이 생략되었다.

 

내용이 불편하여 번역을 하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알버트는, 6일간의 창조 사역이라는 용어 대신에 6일간의 발전 과정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를 있는 그대로 이해한다면, 하나님께서 행하신 6일 간의 창조 사역은 일종의 발전 과정으로서, 이 발전 과정은 아직 끝나지 않은 미완성으로, 단지 창조의 시작일 뿐이다.

 

액면 그대로 해석한다면, 하나님의 6일간의 창조는 완성되지 않은 시작의 과정일 뿐이며, 하나님께서 제 7일에 취하신 안식은 완성에 대한 안식이 아니라, 잠시 과정 가운데 쉬신 것이 된다.

 

여기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안식에 대한 개념이다.

 

율법에서 안식일은 하나님의 신성한 영역으로서 이를 범하는 자는 죽임을 당해야만 했다.

 

알버트가 권하는 인간의 창조 사역은 하나님의 안식을 완성이 아닌 미완성에서의 쉼으로 보면서 참된 안식의 개념을 훼손시키고 있다.

 

여기에는 인간이 창조 세계를 완성시켜 안식을 취하고자하는 공로적 개념이 적용 될 수 있다.

 

에덴에서 아담에게 주어진 통치 명령의 완수를 통한 안식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로서 이 땅에 하나님의 안식을 구현함으로서,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를 선언하는 것이었다.

 

에덴에서의 궁극적 목표인 안식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연장선상에서 취하는 안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안식이 이 땅에서 유형적으로 구현되는 것이다.

 

에덴에서의 목표로서의 안식을  하나님이 취하신 안식의 연장선에서 놓는 것은, 하나님의 행하심을 인간의 차원으로 격하시키거나 인간의 행위를 신적인 차원으로 높이는 행위 가운데 한 가지일 것이다.

 

그리스도만이 홀로 안식의 주인이 되시며, 안식은 어느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신성한 영역이다.

 

신자가 한 주의 시작을 주일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신자의 행함이 그리스도가 완성하신 안식으로부터 출발된다는 것을 의미이기에, 인간의 행위는 안식을 완성하기 위한 행위가 되어서는 안된다.

 

두 번째 아담이신 그리스도가 이루신 안식은, 처음 아담이 실패하였던 안식을 위한 순종을 성취하심으로 이루신 그리스도만의 영역이다.

 

그리스도가 순종을 통하여 성취하신 직분은,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3중직이다.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직분은 창조 사역과는 관계없는 상위 구조upper-register에 대한 하위 구조lower-register의 표현이다.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안식은, 성전으로서의 에덴에서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요구가 성취됨으로서 얻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두 번 째 아담으로서 첫 번째 아담의 실패를 만회하신 것이다.

 

알버트의 주장대로, 아담에게 주어졌던 일이 창조 사역이었다면,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도 창조 사역이 되어야하지만 성경 어디에서도 예수님의 사역을 창조 사역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아담에게 기대되었던 안식은, 하나님의 안식에 대한 유형적 유비typological analogy로서 이해되어야한다.

 

아담에게 기대되었던 안식은, 창조 사역을  마무리함으로서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안식의 완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안식에 대한 유형적 안식이다.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셨다는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과 같이, 그리스도가 안식의 주인이 되실 수 있으셨던 것은 순종의 의미에서 해석되어져야 한다.

 

아담에게 중요했던 것은, 창조적 발전이 아니라 순종을 통한 종말론적 안식의 성취였다.

 

하나님의 안식이 창조 사역의 완성을 뜻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안식은 순종을 통한 구속 사역의 완성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아담이 실패한 종말론의 성취를 위한 것이다.

 

구속 사역은 창조 사역과 발전의 개념과는 연계시킬 수 없는 아담이 실패했던  종말론적 안식의 성취이다.



창조적 발전과성화

 

바울 서신은 많은 부분에 걸쳐서 신자의 삶이 어떠해야하는지를 말하고있다.

 

바울 서신의 주된 관심사는 신자가 문화를 변화시키는 것보다는 신자의 내적인 삶의 변화와 영적 진보에 관한 것이다.

 

요한서신서나 베드로서신서도 마찬가지다.

 

세계관은 이 세상을 보는 그리스도인의 시각에 관한 것이다.

 

세계관의 열매로서의 행동 양식은 일차적으로 자신의 내면의 변화가 선행되어야한다.

 

외부를 보는 세계관이 내면을 보는 세계관과 연결되어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만 균형잡힌 행동 양식이 수반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타락한 아담의 후손으로서 전적으로 부패하였기에 환경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며, 단지 성령의 간섭하심과 신자의 열매로만 가능한 것이다.

 

아담의 타락 이후에 나타나는 세상의 긍정적인 요소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영역이다.

 

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지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다.

 

세상은 영적으로 타락한 상태에 있기에 이를 지탱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일반 은총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구원의 특별 은총에 의해서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 거듭난 삶을 살아가야하는 의무가 주어졌다.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삶은 내면세계의 영적 진보인 성화와 긴밀하게 연결되어있다.

 

성화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외부의 환경을 바꾸기에 앞서서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변화시켜야할 의무가 있다.

 

칭의된 자에게 요구되는 성화는 외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보다 내면의 세계를 변화시키는 영적인 진보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알버트가 말하는 창조적 발전은 영적 진보와는 다른 것이다.

 

알버트가 말하는 창조명령을 수행하는 발전은 외적인 사역으로서 행함의 영역에 속하여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대위임령(마28:19-20)은 행함의 영역보다는 영적인 영역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창조적 발전이란 개념은 육적인 영역을 영적인 영역으로 귀속시키는 개념이지만 이를 영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창조적 발전의 대상인 문화의 대부분은 타락 후에 형성된 인간 세계의 유지를 위한 한시적인 것이 대부분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것을 눈에 보이는 육적인 것으로 구현할 때 대부분 타락의 영향에서 자유 할 수가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왕보다도 눈에 보이는 왕을 원함으로서 타락에 가속도가 붙었다.

 

문화의 대부분은, 타락 이후에 하나님을 배제한 인간 사회를 구성하기 위한 체제로서, 하나님께서 죄악 가운데 있는 인간에게 한시적으로 허락한 육적인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창조적 발전의 주요 관심사는 문화변혁을 통한 문화물의 천국보존이다.

 

물론 이원론적인 것은 배격하여야겠지만, 문화변혁은 불신자들의 도움과 협력이 없이는 불가능 한 것이며, 이들과의 협력을 통해서 과연 신자가 문화를 주도 할 수 있을 지에 대하여 좀 더 심사숙고해보아야한다.

 

좀 더 효과적인 방법이 있다면 불신자들의 행동 방식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여 그들을 변화시키는 것이 바람직 할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 결과물들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보존될 지에 대하여는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한 문화변혁운동

 

알버트는 “문화 명령에 의한 문화 변혁운동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한 것이며 그리스도인이 수행하는 문화 활동을 창조명령의 차원으로 보는 것이다”고 말한다.(78쪽)

 

이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우선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개념이 정립이 되어야한다.

 

알버트는 이 세상의 모든 영역이 구속의 대상이며, 하나님 나라에 속하여 있으며, 이는 인간의 창조적 변혁 활동을 통하여 완성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데이비드 반드루넨David Vandrunen은 이 세상을 하나님의 두 나라로 구분하여 보고있다.

 

이는 이원론적 개념과는 다른 개념이다.

 

반드루넨은 이 땅의 모든 영역을 하나님 나라의 두 영역, 즉 하나님의 통치 영역과 구속 영역으로 나누고 있다.

 

그러므로 신자는 이원론적인 한 가지의 나라가 아닌 하나님의 두 나라에 소속되어있는 것이다.

 

사실 이 세상에서 사단이 패배한 이후에는 이 세상의 모든 영역은 하나님의  통치 영역에 속하여있다.

 

그리스도는 부활하신 후에 사십일 간의 지상 사역 기간에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일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되어야할 것을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의 부활 후에 세상의 모든 영역이 하나님의 권세 아래에 있지만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영역이라고 모두 하나님의 구속 영역인 것은 아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알버트는 이 세상의 모든 영역을 하나님의 통치 영역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구속 영역으로 보고있다.

 

이는 one kingdom(1K)개념과 two kingdom(2K)개념의 신학적 충돌을 일으키며 아직도 논쟁이 지속되고있는 주제이다.

 

화란개혁주의 개통의 신칼빈주의나 톰 라이트의 새관점,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를 주장하는 신정통주의에서는 한 나라one kingdom의 경향이 있으며,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 (WSCal)을 중심으로한 개혁주의는 두 나라two kingdom 개념을 지지하는 경향이 있다.

 

한 나라one kingdom개념을 주장하는 이들을 세상을 변화시키는데 관심을 집중시키는데 반하여 두 나라two kingdom 개념을 지지하는 이들은 교회 중심적인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관심을 갖는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인해서 이 땅에 세워졌으며, 그리스도가 명하신 대위임령을 통해서 확장되고 완성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을 변화시켜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모으는 지상명령, 즉 대위임령을 수단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대위임령을 기반으로하는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중심으로하는 영적인 나라인데 반하여, 문화 변혁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피조계의 회복을 중심으로하는 지상적 개념의 하나님 나라이다.

 

문화변혁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사람보다는 이 땅의 문화를 하나님 나라와 연계시키며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완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창조명령과 노아언약

 

창세기 9장의 홍수 후의 노아 언약은 타락 후에 즉시 이루어진 일반은총 상태가 언약적 형태로 재연된 것으로 본다.

 

창세기 1장 28절의 창조명령은 타락 이전의 행위언약으로서 타락 이후에는 노아언약을 통하여 변형되고 굴절된 일반 은총의 형태로 재연republication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창세기 9장 1절: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여기서는 타락 이전의 창조명령의 언어를 거의 그대로 반복하고있지만 한가지 중요한 차이는 “정복하라”는 단어가 반복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알버트가 말하는 창조적 어원으로서의 정복이 타락한 사람에게는 더 이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아담의 후손들과 새로 맺으신 노아 언약으로 창조명령을 대체하신다.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너희와 함께 한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창 9:9)

 

이는 약속된 끝날까지 오랜 세대를 거쳐 지속되는 언약을 의미하는 “영속된 언약everlasting covenant”으로 불리운다.(창 9:16)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적 약속은 일반 은총의 언약의 표시로 더욱 강화된다.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와 세상 사이의 언약의 증거니라”(창9:13)

 

하나님께서 노아와 맺으신 일반 은총의 언약은 문화명령을 새롭게 한 것이다.

이러한 과업은 두 번째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에게 옮겨졌으며,  그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로 원칙적으로 이 땅을 정복하신 것이다.

 

창조 명령 개념으로서의 문화 명령은 원래 통치 명령의 개념으로 접근되어야했다.

 

통치 명령 개념에서의 이 땅에 대한 정복은 그리스도에 의하여 완성되었기에 알버트가 말하는 창세기 1장 28절의 창조명령이 지속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리 아이언즈lee Irons는 노아 언약에서 아담에게 주어졌던 통치 개념이 제외되었다고 보는 반면에, 존 페스코John Fesko는 하나님의 형상을 땅 위에 퍼뜨려서(창 9:7) 하나님에 대하여 예배를 드리게 하는 것을 땅에 대한 정복의 개념으로 봄으로서, 노아 언약에서도 아담에게 주어졌던 통치 명령이  반복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Last Things First, John Fesko, ch4)



노아 언약

 

존 페스코가 “Last Things First”에서 말하는 노아 언약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아담의 타락 이후에 주어지는 일련의 언약들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담과 세우셨던 첫 언약의 통치 명령이 다시 반복해서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신 언약의 요소들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의 형상을 땅 위에 퍼뜨리는 것

2) 성전을 땅끝까지 확장하는 것

3) 1)과 2)의 요소를 통해 땅 위를 통치하는 것

4) 돕는 배필의 보조로 이 임무를 완성하는 것

 

노아 언약은 세대주의자들의 주장과 같이 선례가 없는 처음 언약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아담 언약과 평행관계를 이루면서 통치 명령이 반복해서 나타난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주셨던 것과 똑같은 임무를 노아에게 주셨다.

 

노아 언약에 나타나는 다음과 같은 공통적인 요소는 첫 번째 창조와 대홍수 이후의 새로운 창조 사이의 평행관계를 보여준다.

 

1) 하나님의 형상을 땅 위에 퍼뜨린다.(창 9:7)

2) 하나님에 대한 예배를 땅 위에 퍼뜨린다.

3) 1)과 2)의 요소를 통해 땅을 정복한다.

4) 노아는 이 임무를 자신의 돕는 배필과 연합하여 생긴 열매인, 후손을 통해 성취한다.

 

이에 대한 워렌 게이지의 설명이다.

 

“.... 창세기 8장의 기록은 본래의 창조에 대한 창세기 1장의 설명과 평행을 이룬다…. 창세기 8장 1절에서 하나님은 창조 전에 세상을 덮고 있던 물과 같이(창 1:2) 땅을 덮고 있었던(창 7:18-19) 홍수 위에 바람이 불게 하신다….채소밭이 생기는 장면(1:12)은 비둘기가… 감람나무 잎을 물어다 주는 장면(8:11)과 유사하다…. 하나님이 처음 세상의 창조를 마치신 후 안식하신 일은 새로운 창조가 긑난 후에 하나님께서 제사를 받으시며 쉬신 일과 일치한다.”

 

첫 창조와 대홍수 이후의 창조 사이의 평행 구조는 노아를 일종의 새 아담처럼 여기시며 노아와 새로 시작 하셨고, 첫 아담에게 주셨던 언약적 임무를 노아에게도 주셨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홍수 이후의 노아의 타락은 아담을 연상시킨다.

 

1) 노아도 에덴동산과 비슷한 환경인 포도밭에서 타락했다(9:20).

2) 아담이 나무의 열매를 따먹은 것과 같이 노아도 포도나무의 열매에서 나온 포도주를 마셨다(9:20).

3) 아담이 올곧은 자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사람이었던 것과 같이, 노아 역시 의로운 자였고 그의 세대 가운데 흠없는 자였다(6:9).

4)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했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동산에서 바람이 불 때 아담과 함께 동산을 거니셨던 장면을 연상시킨다(3:8, 6:9).

5) 노아는 술에 취해 벌거벗고 자신의 하체를 드러냈다. 이 때 아담의 죄를 하나님이 덮으셨던 것처럼(3:21) 노아의 아들들이 와서 그의 벌거벗은 몸을 가렸다(9:23).

 

노아는 행위 언약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었기에 또 다른 아담을 바라보아야했다.

 

노아 언약을 통하여 반복되고 있는 에덴서의 상황은 성전으로서의 에덴이 일반 은총의 영역으로서 보편적으로 어떻게 일반화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노아 언약을 통하여 재연되고있는 에덴의 상황은 아브라함 언약과 모세 언약, 그리고 새 언약을 통하여 완성되지만, 알버트의 “창조 타락 구속”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언약적 전개과정을 찾아 볼 수 없을 뿐만이 아니라 성전으로서의 에덴의 개념도 찾아 볼 수 없다.

 

안식의 관점에서본 창조명령

 

창조 명령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완성되었는지 혹은 아직 우리의 몫으로 남아있는지에 대한 구분은 창조 명령을 안식의 개념과 연개시켜서 생각해 볼 때 더욱 명확해진다.

 

일반적으로 개혁주의에서 보는 에덴에서의 통치명령(문화명령)은 안식으로 귀결된다.

 

아담에게 주어졌던 통치명령은 종말론적 축복과 영원한 안식으로 귀결되기

까지 한시적temporary으로 주어졌던 것이다.

 

창세기 1장 28절을 하나님의 창조 사역과 대비시킬 때 창조명령은 하나님께서 창조 사역을 마치시고 취하신 안식과 연계되어 안식으로 귀결된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에 아담에게 주어졌던 창조명령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로서의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본받아 이 땅에서 창조 활동을 하는 것과 연관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창세기 1장 28절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의 창조 사역으로서 안식으로 귀결되어야했다.

 

하지만 문화명령으로서의 창조명령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주권하에, 즉 순종을 조건으로하고있다.

 

순종은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 위한 조건이었다.

 

그리스도는 완전한 순종을 통하여 마지막 아담으로서 처음 아담이 실패한 사역을 완수 하실 수가 있으셨다.

 

그리스도께서 안식의 주인이 되실 수 있으셨던 것은 예수님의 사역이 안식을 위한 창조명령을 수행하는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고 말씀하신 것은, 택한 자에 대한 구원 사역과 더불어, 첫번째 아담이 에덴에서의 실패한 사역을, 마지막 아담으로서 성취하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안식의 필요충분 조건으로서 더 이상의 요구가 필요하지 않다.

 

만약에 그리스도인이 창조명령으로서의 문화명령을 수행한다면, 예수님께서 다 이루신것에 추가되는 것에 더하는 것이 된다.

 

그리스도의 안식에 거하는 칭의된 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문화 명령으로서의 창조 명령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답게사는 성화의 과정이다.

 

성화의 과정과 문화 명령의 지속성과의 혼동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안식이 아직 이 땅에서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식의 완전한 성취는 오직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성화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내적인 진보이기에, 외적인 사역을 요구하는 문화명령이 성화의 차원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칭의된 자의 열매의 차원으로 설명되어져야 할 것이다.

 

개인의 성화는 이 땅에서 한시적인 것이며, 성화의 정도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연결되지는 않는다.

 

알버트는 문화물의 천국보존을 위해서 구조로서의 문화물의 방향을 개선하여야한다고 말한다.

 

성화가 천국에서 보존되지 않는 것과 같이, 성화 차원의 문화명령은 이 땅에서 한시적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6일동안 창조 사역을 마치신 후에 제7일에 안식을 취하셨다.

 

마찬가지로 아담에게 주어진 문화명령은 완전한 안식을 위한 과정으로서 한시적으로 주어진 것이었으며, 그리스도에 의하여 마침이 된 것이기에 성도의 신앙생활은 문화물의 천국 보존을 위한 문화 변혁보다는 교회를 교회답게하는 일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한다.



문화명령과 대위임령

 

알버트의 “창조 타락 구속”에서 볼 수 있는 성도의 과제는 지상명령으로서의 대위임령이 아니라 창조명령으로서의 문화명령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40일간의 사역에서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일을 말씀하시면서 복음 전파를 위한 지상명령으로서의 대위임령을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 아담으로서 처음 아담에게 주어졌던 통치명령으로서의 문화명령을 완성하셨기에 문화명령은 더 이상 구원과는 관계없는 일반은총의 영역에 속한 것이다.

 

문화명령은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에 주어졌기에 타락 이후에 같은 개념으로 적용될 수 없다.

 

문화명령은 안식을 위한 조건으로 주어졌으며, 문화명령의 대상에는 성과 속의 구분이 없다.

 

노아언약으로 대체된 문화명령이 행해지는 영역은 에굽이나 바벨론에서와 같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문화도 포함되어 그들 가운데서 함께 행해져야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대위임령은 특별 은총의 영역에 속한 것이다.

 

대위임령은 구원을 위한 것이며 타락한 자를 위한 것이다.

 

대위임령은 이미 이루어진 안식으로의 초대이다.

 

대위임령은 비록 애굽이나 바벨론과 같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문화에서 행하여지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서 구별된 장소로 출애굽을 하였듯이, 이 세상과는 구별된 장소에서 구별된 모임으로 초대하기 위한 것이다.

 

대위임령은 노아언약으로 대체된 문화명령의 차원을 넘어서 다시 에덴에서 미완성되었던 문화명령의 성취를 공유하기 위한 것이다.

 

마이클 호튼은 이에 대하여 “구속적 변혁주의 문화관에서는 인간의 문화 활동을 천국에서 보존될 구속적 활동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구속사 시대의 문화적 활동은 일반적 활동이지 거룩한 활동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의 일반은총을 통해 긍정되고 보존되며 촉진되는 활동이지 구속적 활동이 아니다(마이클 호튼, 개혁주의 조직신학, 721쪽)”고 말한다.

 

반드루넨은 그리스도인의 문화활동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 생활하는 가운데 바벨론의 문화 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것과 같다고 말하고 있다. (David VanDrunen, Living in God’s Two Kingdom. p69)

예수님께서는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마22.21)"고 말씀하시면서 일반은총의 영역과 특별은총의 영역을 구분하실 것을 말씀하신다.

 

이상은 문화 명령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 기독교 세계관에서 말하는 창조 명령의 개념에서 문화 명령을 살펴본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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