톰 라이트의 새관점 2019. 3. 17. 23:00

톰 라이트는 왜 전가 교리를 부정하는가.


김원호(dent4834@hanmail.net)


톰 라이트의 전가 교리를 논하기에 앞서서 전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존 페스코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다음 글은 John Fesko의 Death in Adam Life in Christ의 p146의 일부를 번역한 것이다)


전가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What, however, does the verb to impute mean?


기본적인 정의는 무엇을 다른 이에게 양도하는 것이다.

A basic definition is, to assign something to another.


거래 계정에 있어서, 누군가가 신용이나 빚을 다른 계정에 전가하거나 양도하는 것이다.

In accounting, someone can impute or assign a credit or debit to an account.


사회적 상호작용에 있어서는, 누군가가 (자신의) 잘못된 동기를 다른 이의 행동에 (책임을) 전가하거나 부여하는 것이다.

In social interaction, someone can impute or assign false motives to someone’s actions.


신학적 의미에 있어서는, 역사적으로, 전가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죄를 양도하였는가를 설명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어왔다.

In theological terms, to impute has historically been a term employed to explain how God assigns guilt,


예를 들어서, 레위기 17장 4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성막에서 요구되는 희생을 드리지 않는 사람에게 피흘리는 죄를 전가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for example. In Leviticus 17:4, we read of the Lord imputing bloodguilt to the man who does not bring the required sacrifice to the tabernacle.


예전의 성경 번역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의의 상태를 양도하거나 신뢰를 하였는데, 이는, 그들이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그에게 의롭도록 전가되었다’(롬 4:22; 킹제임스)

In older translations of the Bible, we read of God assigning or crediting a person with the status of righteous, that is, they have fulfilled the requirements of the law: ‘And therefore it was imputed to him for righteousness’ (Rom. 4:22; kjv).


먼저 회막 문으로 끌고 가서 여호와의 성막 앞에서 여호와께 예물로 드리지 아니하는 자는 피 흘린 자로 여길 것이라 그가 피를 흘렸은즉 자기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 (레 17:4)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롬 4:22)


(Death in Adam, Life in Christ. J. V. Fesko p146)



서론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근거는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심으로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의인으로 칭함을 받기 위함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의는, 신자의 죄가 그리스도께 전가되었다는 사실과 그리스도의 의가 신자에게 전가되었다는 사실을 전제로한다.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기 위한 신자의 상태는, 이미 아담 안에서 아담의 죄를 전가받은 상태를 전제한다.


기독교 교리는 이와같이 전가라는 틀이 뼈대를 형성하며 복음의 형태를 갖추어간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새관점은 전가의 개념이 들어설 자리가 없는 전혀 다른 뼈대로 기독교의 틀을 만들고 있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에 왜 전가라는 개념이 적용될 수 없는지를 전통 개혁주의의 전가 교리와 비교하면서 살펴보고자한다.



전가 교리와 그리스도의 십자가


전가 교리는 그리스도의 의가 신자에게 전가되었다는 내용으로만 구성되어있지 않다.


전가는 의뿐만이 아니라 죄에도 적용된다.


모든 인간이 죄인이 된 것은 아담의 죄가 전가됨으로 인한 것이다.


전가는 유전에 의한 것도 아니며, 환경적 영향에 의한 것도 아니다.


전가는 하나님의 언약을 근거로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이 죄인이 된 것은 아담 언약을 근거로 하나님께서 규정하신 것이다.


인간이 의인이 되기 위해서는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언약을 근거로 해야한다.


아담 안에서 죄인으로 규정된 인간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새 언약을 근거로,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의인으로 규정되어야만 한다.


구원의 새 언약은 아담이 타락한 직후에 약속되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 3:15)”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아브라함 이전의 상황들, 즉 아담 언약과 원시 복음을  배제한 상태에서 아브라함 언약을 유대 중심적으로 해석하는 이야기 형태의 관점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원시 복음을 근거로, 불순종한 아담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한, 둘째 아담으로서의 대속사역에서 해석되어야하지만, 새관점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일종의 희생정신에 의한 것일 뿐이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사역은 처음 아담의 범죄와는 전혀 관련성이 없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리스도께서 택한 자의 죄를 전가받아, 택한 자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 대신 속죄 제물로 희생되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전가받은 죄로 인한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속죄는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한 것이 아니다.


만약에 모든 사람의 죄가 전가되었다면, 믿음이 요구되지 않으며, 궁극적으로 복음은 모든 사람의 구속을 위한 만인구원론으로 귀결된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의롭게 하셨기에, 부활하셨다.


그리스도의 의는 신자에게 전가됨으로서, 이미 아담 안에서 죽었던 신자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았으며, 마지막 때에 부활이 약속되었다.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는 모든 사람이나 모든 피조물에 전가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고백하는 택한 자에게만 전가된다.


모든 인류가 아담 언약 안에서 죄인으로 규정되어졌지만,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새 언약 안에서 의인으로 규정되는 것은 신자에게만 제한된다.


의에 대한 규정은 개혁주의에서와는 달리, 로마 카톨릭이나 새관점에서는 변형된 형태로 나타난다.


개혁주의에서는 성도가 자신에게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를 근거로 하나님의 의 안에 거한다면, 새관점에서는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가나안에 거함으로서 하나님의 의 안에 거한다는 장소적 개념을 적용한다.


새관점에서는, 가나안의 이스라엘을 구원받은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보기에, 가나안에서 주어졌던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기 위한 조건을 유지하는 것을 의의 조건으로 여기고있다.


로마 카톨릭은 이와는달리 주입의 개념을 적용하여 의의 근거로 삼는다.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전가imputation은 로마 카톨릭에서 말하는 주입infusion과는 구분된다.


로마 카톨릭에 의하면, 성도는 그리스도의 의가 주입되어 체질적 변화에 의한 의의 상태에 거한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성찬식에서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피로 바뀌는 화체설과 같이 의가 주입된 성도는 거룩한 존재라는 것이다.


이들은, 주입이 체질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며, 의가 주입되기 위해서는 선행등의 준비가 필요하다고본다.


주입을 위해서는 인간의 공로가 전제되어야하며, 주입의 결과는 영적 본질이나 체질적인 본질의 실질적인 변화가 따라온다.


주입은 사람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지만, 전가는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다.


전가는 인간의 선행등 피고의 변화가 없는 상태에서도 하나님의 언약을 근거로 법정적으로 선고되는 것이다.


전가에 의한 의는 죄인 안에서 절대 발견되어질 수 없는 외부의 낯선 의이다.


주입의 결과는 내부의 갱신과 변화를 가져오며, 이를 근거로 의롭게 선언되는 것이다.


개혁주의 전가 교리는 간접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이 아닌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언약 신학을 근거로 하고있다.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전가의 세가지 요소는 다음과 같다.



택한 자의 구속 과정에서의 삼중 전가

threefold imputation in the course of the redemption of the elect.


첫번째,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처음 죄를 모든 인간에게 전가시키셨다.

First, God imputes Adam’s first sin to all human beings.


두번째, 택한 자의 구속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택한 자의 죄를 그리스도께 전가시키셨다.

Second, in the redemption of the elect, He imputes the sins of the elect to Christ.


세번째,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의, 혹은 그의 순종하심을 택한 자에게 전가시키셨다.

Third, He imputes Christ’s righteousness, or His obedience, to the elect.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는 첫번째 요소에 대하여 “그들-아담과 이브-은 온 인류의 근원이었으므로 이 죄의 허물이 전가되었으며, 죄 안에서 동일한 죽음과 부패한 성질이 보통 생육법으로 태어나는 그들의 모든 후손에게 전달되었다(6-3)”고 말한다.

‘They,’ Adam and Eve, ‘being the root of all mankind, the guilt of this sin was imputed; and the same death in sin, and corrupted nature, conveyed to all their posterity descending from them by ordinary generation’ (VI.iii).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모든 인간이 아담 안에서 죽었기 때문에 둘째 아담으로 오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순종은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한 죄악을 제거하고 의를 이루시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둘째 아담으로 오신 것은 처음 아담 안에서 전가된 죄를 대신하여, 의를 전가시키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시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의 의는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로 인하여 성취되었다.



의를 위한 이중 전가


아담이 선악과 범죄를 하지 않았다면 아담은 에덴에서 주어졌던 통치명령을 수행하는 것만으로도 안식에 이르는 의를 성취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아담의 범죄는 의를 성취하기 위한 또 다른 과제를 안겨주었다.


아담은 죄인이 되었기에, 죄의 값을 치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명령을 실행하여야만 했다.


이미 선악과 범죄로 인하여 실질적인 죽음에 이른 아담에게는 에덴에서의 요구를 성취하는 것은 대속자의 은혜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 둘째 아담으로 오신 것은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이 두 가지 과제를 대신 성취하심으로, 아담 안에서 타락한 죄인들로하여금 안식에 이르게 하기 위함이었다.


신자가 구원을 받아 안식에 이르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 요소가 충족되어야만 한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는 것에는, 하나님께서 에덴에서 아담에게 요구하셨던 두 가지 명령은 즉 선악과 금령과 창세기 1장 28절의 통치명령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되었고, 이 두 가지 순종이 자신에게 전가됨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여김을 받았음을 믿는 것이다.


전가는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의를 받는 것으로서, 신자의 믿음에는 이 두 가지 요소가 포함되어야한다.


하나는 선악과 범죄에 대한 죄값을 치루신 수동적 순종과 다른 하나는 에덴에서 주어졌던 하나님의 통치 명령을 실행하심으로 이루신 완전한 순종이다.


통치 명령에는 크게 두 가지가 포함되어있다.(파생주제)


하나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것이다.


아담은 비록 많은 자손들을 낳았지만, 이들은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로서, 땅을 정복할 능력이 없는 자들로서, 하나님의 자손이 아니다.


아담은 다스려야할 생물에게 다스림을 받게 되었다.


아담을 유혹하였던 뱀은 다스림의 대상인 생물에 포함되어있었지만, 아담은 다스려야할 생물에게 유혹을 받아 다스림을 받는 존재가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금식하시는 가운데 40일간의 광야에서의 사단의 유혹을 물리치시고 사단이 다스릴 수 없는 존재임을 증명하셨고, 십자가에서 아담의 죄값을 치르심으로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하여, 사단을 자신의 통치 아래 놓으셨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순종을 통하여 이루신 의를 신자에게 전가시키심으로, 영적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를 낳으시면서,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심으로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이 번성하고 땅에 충만할 수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두 가지 순종은 선악과 금령에 대한 순종과 창세기 1장 28절의 통치 명령을 성취하신 것이다.


신자는 이 두 가지 순종, 즉 십자가에서의 수동적 순종과 통치명령의 능동적 순종을 전가받음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여김을 받을 수 있었다.


전통적으로 그리스도의 적극적 순종을 율법과 연계시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완전하게 순종하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셨다고 이해하고있다.


하지만 율법은 아담의 범죄를 말미암은 형벌의 저주가 요구될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마침이 되신 것은 율법을 다 순종하셨다기보다는,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한 죄값에 대한 요구가 포함되어있는 율법의 요구를 다 충족시키셨다는 것으로 이해되어야한다.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순종은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성취하는 것이었다.


선악과 금령이 최소한으로 요구되었던 수동적 순종이었다면, 창세기 1장 28절의 통치 명령은 적극적으로 요구되었던 능동적 순종이었다.


선악과 범죄로 말미암은 불순종은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 즉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종결되었다면,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적극적 순종은 율법에 대한 적극적 순종으로 말미암아 종결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마침이 되신 것은, 이 두 가지의 순종으로 인한 것이다.


율법은 죄에 대한 형벌과 안식의 성취에 대한 요구가 포함되어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두 가지 유형의 순종 안에 율법의 요구에 대한 성취가 있다.


율법을 예수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에만 연결시키는 것은, 타락 이전의 아담에게 주어졌던 명령과 달리, 타락한 아담의 후손에게 주어진 율법의 속성을 간과한 것이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 두 가지 유형의 순종을 모두 전가받음으로서 에덴에서의 요구가 성취된, 안식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성도에게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성도는 에덴으로의 복귀가 아닌, 종말론적 안식에 이른 것이다.


만약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 즉 아담의 범죄로 인한 죄의 값만을 치르신 수동적 의만을 전가받는다면, 성도에게는 에덴에서 아담에게 주어졌던 통치 명령을 다시 실행하여야하지만, 이는 이미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것으로서, 성도가 이를 성취하려는 것은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불가능한 것이다.


성도에게 전가된 적극적 순종의 의는, 에덴에서의 요구였던 통치 명령을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시고 전가시키심으로 인해서, 더 이상 성도에게 요구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리처드 미들턴과 같은 신칼빈주의자들은 창세기 1장 28절을 통치 명령이 아닌 문화명령으로 해석함으로 인해서, 성도는 그리스도의 대위임령보다도 차원이 높은 문화명령을 실행하여야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그리스도의 적극적 순종의 의에 대한 이해부족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다.


구원받은 성도는 에덴으로 복귀하여 다시 에덴에서의 명령을 실행하여야할 의무가 없다.


에덴은 안식이 성취된 땅이 아니라 안식을 위한 순종의 요구가 있는 곳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안식의 주인이 되실 수 있으셨던 것은 에덴에서의 요구를 성취하셨기 때문이다.


성도가 그리스도의 안식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께서 대신 에덴에서의 요구를 다 이루셨기 때문이다.



투레틴이 말하는 칭의와 전가


투레틴은 행위 언약과 은혜 언약의 원칙 사이의 구분외에도, 칭의에 전가의 개념을 발전시키고있다.


성도의 칭의는 오직 그리스도의 의iustitia Christi로  가능한 것이다.


투레틴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의”가 되시기에 믿음은 칭의의 소재materal가 아니라 도구적 원인instrumental cause이 된다고 말한다.


그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된 것을 근거로 구속되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행위와 믿음의 원칙은 칭의에 있어서 대립적이기에, 행위 언약에서의 칭의의 원칙은 행위와 순종이 되어야하고, 은혜 언약에서는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칭의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믿음으로 은혜의 언약을 받게되며, 그리스도는 언약의 근원이 되시며 우리가 하나님과 연합되도록 하는 끈bond이 되신다.


그리스도인의 “거룩함과 순종”은 은혜 언약의 열매fruit이며, 이것들은 언약의 가득한 축복에 도달하는 수단과 길이된다.(Covenant theology Jeongkoo Jeon, 68)



Edward Fisher가 말하는 전가교리

새관점주의자들이 전가교리를 부정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청교도 신학자 Edward Fisher는 “The Marrow of Modern Divinity”(p56)에서 타락으로 인한 인류의 죄악과 비극에 관계된 전가교리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Nom.
그렇다면 아담의 죄와 형벌이 그의 모든 후손에게 전가 되었다는 것입니까?
And was Adam's sin and punishment imputed unto his whole offspring?

Evan.
예 그렇습니다, (롬5:12),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들어왔고,이것으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고"; 혹은, "그 안에서, 즉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고,"
Yea, indeed; for says the apostle, (Rom 5:12), "Death passed upon all men, for that all have sinned"; or, "in whom all have sinned," that is, in Adam.

진실은, 아담이 자신의 타락으로 인하여 우리의 본질 전체를 같은 파멸로 치닫게 했으며, 그의 후손 전체를 같은 비극의 심연으로 몰고 갔는데, 이유인 즉, 하나님의 약속으로 인하여, 그는 자신만이 홀로 서거나 타락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공적인 사람으로서, 자신으로 말미암은 모든 인류를 대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주어진 모든 행복과 모든 재주와 재능들은 그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전체 본질 위에 주어졌으며, 그와 맺은 언약은 모든 인류와 맺은 것이며, 심지어는 언약을 깨뜨림으로서 모든 것을 잃어 버린 것도 자신에게 해당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다.
The very truth is, Adam by his fall threw down our whole nature  headlong into the same destruction, and drowned his whole offspring in the same gulf of misery, and the reason is, because, by God's appointment, he was not to stand or fall as a single person only, but as a common public person, representing all mankind to come of him: therefore, as all that happiness, all those gifts, and endowments, which were bestowed upon him, were not bestowed upon him alone, but also upon the whole nature of man, and as that covenant which was made with him, was made with the whole of mankind; even so he by breaking covenant lost all, as well for us as for himself.



조나단 에드워즈와 전가교리


전가교리에 대한 청교도들의 확신에도 불구하고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조나단 에드워즈 이후부터 전가교리에 대한 균열의 조짐이 보인다.

비록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D. G. Hart는 “The Law is Not of Faith. Essay on Works and Grace in the Mosaic Covenant”(p74)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Earl A. Pope는 에드워즈가 주장하는 특징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1) 에드워즈는 "아담이 인류를 법적으로 대표한다"라는 생각을 인정하지 않는다(set aside).


에드워즈는 이러한 아담의 대표 개념을 전혀 적절하지 못한 것으로 여기며 뉴잉글랜드 신학에서 이러한 대표성의 원리를 제거해버린다.

2) 에드워즈는 사람이 선천적으로 부패한 존재라는 전제가 없이는 죄의 전가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에드워즈의 이러한 개념은 언약 신학(Federal Theology) 자체를 붕괴시켜 버리는 것이다.

3) 에드워즈의 "인종 간의 신비한 연합 (mystical unity of the  race)" 개념은 언약 신학(Federal Theology)에 대한 중대한 반향(repercussions)이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죄된 행동(sinful act)이 아닌 오직 자신의 행동으로 인하여 저주를 받는다.

4) 각 사람 안에 작용하는 죄의 원리는 아담을 괴롭혔던 죄의 원리와 동일하다.

Earl A. Pope는 에드워즈의 이러한 생각의 방식이 언약 신학(Federal Theology)에 대하여 재앙적 결과를 가져왔다고 말한다.



전가교리를 부정하는 신신학(New Divinity)

에드워즈의 후예들에 의하여 형성된 신신학(New Divinity)에서는 전가교리를 부정하는 더 많은 신학적 변형이 일어난다.

드종(Peter Y. De Jong)은 1945년에 출간된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 "뉴잉글랜드 신학에서의 언약의 개념 (The Covenant Idea in New England Theology)"에서 뉴잉글랜드 신학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1) 신신학(New Divinity)으로 소개되는 뉴잉글랜드의 신학적 변형(theological modifications)은 너무나 많은 언약적 개념을 내다 버렸다.

2) 에드워즈는 좀 순진하게 인간의 책임을 "자연적이고 도덕적인 능력과 무능력 사이의 구별(distinction between natural and moral ability and inability)"에 기초하여 정립하였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재앙이 되어버린 것이다.

3) 에드워즈는 이러한 구별을 "죄와 거룩은 오직 개인의 행동의 의미에서 생각되어야 한다"는 개념으로 발전시킨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이들, 특히 유아들은, 하나님 앞에서 죄가 있다거나 타락해 있다고 여기면 안된다"고 말한다.

4) 뉴잉글랜드 신학에서 가장 눈에 띄는 변화 가운데 하나는 속죄 교리(doctrine of the atonement)이다.


칼빈주의자들에게 있어서 남을 대신하는 속죄(vicarious atonement)는 의의전가(imputation), 대표성 (representation), 대속(substitution), 법적 충족(legal satisfaction)의 개념들과 서로 얽혀서 신학적 구조물(theological superstructure)의 기초가 되어있다.


그러나 에드워즈 이후에는 강조점이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도덕적 관계(man's moral relation to God)"로 추락해버렸고 "속죄 통치설(the governmental theory of atonement)"에 대한 길을 열어주게 된 것이다.
(“The Law is Not of Faith. Essay on Works and Grace in the Mosaic Covenant. P&R Publishing. 2009”)



“의의 전가" 개념을 부정하는 새관점


뉴잉글랜드 신학에서 볼 수 있었던 도덕적 윤리성은 새관점에 와서 구체화된다.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규정하는데 있어서, 그리스도로부터 말미암은 의가 아닌 인간의 행동을 근거로 삼게된 것이다.


종교개혁 신학의 핵심에는 새관점과 달리, 의의 전가를 근거로, 행함이 배제된 “이신 칭의"와 “오직 믿음"의 교리가 근간에 자리잡고있다.


이는 성경의 뼈대를 이루고있는 언약적 구속사의 핵심 교리이다.


종교개혁 신앙의 한 가운데 있자리잡고있는 전가 교리에 대한 부정은, 개혁 신학의 기둥 자체를 무너뜨리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새관점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하여 얻으신 의를 믿는 자들에게 전가한다는 개념을 거부하며, 이런 생각이 “의로운”(righteous)이라는 말이나 “의”(righteousness)라는 말을 잘못 사용함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결과적으로 이들의 칭의 개념은 개혁주의와 다를 수밖에 없다.


라이트는 확실히 “전가 된 의imputed righteousness”의 개념을 거부한다.


톰 라이트는 스스로 자신의 주장이 개혁주의와 다르지 않다고 말하지만 라이트의 주장은 개혁주의 관점에서 여러 가지 문제점을 지니고있다.


톰 라이트는 개혁주의 역사에서 정립되어온 “죄의 용서”  “의의 전가” “이신칭의”와 같은 개혁주의의 핵심 교리 대부분을 부정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칭의는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라는 판결이며 이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시작일 뿐이라는 것이다.


신자에게는 자신의 행위로  칭의를 완성시켜야 하는 부담감이 주어진다.



전가개념을 제거한 새관점


톰 라이트의 새관점, 즉 “바울에 관한 새관점(New Perspective on Paul)”에서는 전가 교리를 없앰으로서 하나님의 의를 전가와 관계없는 새로운 개념으로 바꾸어버린다.


전가 교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된 의가 신자에게 전달되는 원리이지만, 전가개념을 거부하는 톰 라이트는 오직 “하나님의 선언에 의한 의”만을 주장한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약속하신 언약을 이스라엘 안에서 신실하게 실행하셨다는 것이다.


칭의의 근거에 있어서 개혁주의에서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고있다.


개혁주의가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를 근거로한다면, 새관점에서 말하는 칭의는 아브라함과의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신다는 것을 근거로한다.


개혁주의가 전가에 의한 칭의를 말한다면, 새관점은 선언에 의한 칭의를 말한다.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은 백성들로 구성되어있다면, 새관점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로 구성되어있다.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유형적 형태는 교회라는 모습으로 나타난데 반하여, 새관점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은 유대인을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며, 교회는 유대 이스라엘의 확장된 형태라고 주장한다.


새관점에서 보는 교회는 유대 이스라엘의 연속성에 있는 유대주의적 산물일 뿐이다.


톰 라이트가 흔하게 사용하는 하나님 나라라는 용어는, 개혁주의와 용어만 같을 뿐, 다른 개념의 하나님 나라이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의를 근거로한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로 구성된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말하고있다.


새관점에서 보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이며, 아브라함의 육의 자손으로 구성되어있다.


새관점에서 보는 그리스도는 의를 이루신 분이 아니라, 유대 이스라엘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행함의 본을 보여주신 분이실 뿐이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의를 근거로할 때, 그리스도는 유대 이스라엘에게 삶의 교훈을 주기 위해서 본을 보여주신 분으로 밖에는 해석되지가 않는다.


이러한 역할은 하나님이 아닌 선지자도 할 수 있는 역할로서, 그리스도의 신성에 손상을 주며, 삼위일체 개념에도 상당한 타격을 주는 개념이다.


톰 라이트는 전가 개념이 제거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대속의 개념이 아닌 단순한 희생 정신의 개념으로 바뀌어 버린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를 정치적 개념의 이스라엘을 해방시킨 혁명적 메시아로 만들어 버린다.


톰 라이트는 하나님 나라인 이스라엘의 실패는 세상 정부를 대변하는 로마에 대한 저항 방식의 잘못에 있다고 말한다.


유대인들은 로마와 타협을 하거나, 변방에 숨어버리거나, 아니면 과격한 투쟁으로 상황을 대처하는데, 이러한 방식들은 모두 다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단순히 세상 권세를 대표하는 로마에 대하여 어떻게 희생적 삶을 살아가야하는지 본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한다.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희생적 삶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는 대속의 개념도 없으며, 전가시켜줄 의의 개념도 없다.


새관점에서는 전가의 개념이 없기에,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개념도 존재하지 않는다.


전가교리를 신자를 그리스도와 연결시켜주는 교리이다.


라이트는 전가된 의imputed righteousness를 참여된 의incorporated righteousness로 대체한다.


라이트는 전가에 의한 칭의justification by imputation를 참여에 의한 칭의justification by incorporation로 대체한다.


참여incorporation의 개념에는 공로의 개념이 포함되어있기에,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은혜에 인간의 행위가 더해지는 신인협력적synergistic공로사상이 내포되어있다.


참여에 내포된 공로의 개념은, 전적으로 부패하고 전적으로 무능한 인간이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른다는 종교 개혁 사상과는 대립되는 개념이다.



톰 라이트의 언약 사상과 전가교리


언약 사상은 성경을 해석하는 기본 틀을 제공한다.


톰 라이트의 언약 사상의 중심에는 유대 이스라엘이 있다.


톰 라이트의 언약 사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부차적인 존재일 뿐이다.


톰 라이트의 언약 사상에는,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이미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무르고 있었다는, 언약적 신율주의 개념이 자리잡고있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에서의 언약은 아브라함 언약으로부터 시작하여 유대 이스라엘에서 종결된다.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일반적으로 창세전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으로부터 시작하여, 아담 언약과 노아 언약, 그리고 모세 언약과 다윗 언약을 거쳐서 새 언약에 이르러 언약이 완성된다.


톰 라이트는 개혁주의 언약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몸통인 것에 대하여 불만을 나타내며, 유대 이스라엘이 언약의 중심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꼬리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새관점의 언약 사상은 일종의 세대주의적 성격을 지니고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새관점은 세대주의와 달리 오직 출애굽한 이스라엘 안에서만이 아브라함 언약에서 비롯된 언약적 신율주의가 완성된다고 본다.


유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면서,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무르기 위해서 율법을 지켰다는 것은, 율법이 은혜의 방편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또 다른 은혜, 즉 그리스도의 순종을 근거로하는 의가 필요로하지 않다는 것이다.


새관점에서는 유대 이스라엘이 이미 은혜 안에 머무르고있었다고 보기에,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으심으로 이루신 의의 전가와 새 언약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톰 라이트가 보는 1세기 유대주의에서는 이미 하나님의 은혜를 근거로한 은혜의 종교였기에, 또 다른 은혜의 새 언약이 필요하지 않다.


톰 라이트는, 바울이 비판한 율법의 행위는, 공로적 구원관에서 비롯된 행위가 아니라, 단지 이방인과 구별되려는 유대적 특권의식을 표징하는 행위를 뜻한다고 볼 수있다는 것이다


새관점에서 보는 유대인들은 이미 하나님의 은혜 아래있었기에,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 것이라는 은혜의 개념을 더 할 수 없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으심을 부정하기에, 인간의 죄성이나, 혹은 인간의 전적인 부패 개념도 마찬가지로 부정하고있다.


개혁주의에서 보는 하나님의 언약은 전적으로 부패하고 무능한 이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근거로하지만, 새관점에서는 인간의 부패와 무능을 수용하지 않기에, 은혜의 언약은 요구되지 않는다.


톰 라이트의 언약 사상은 오히려 행위 언약에 가깝다.


톰 라이트는 의의 전가는 성경에 없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법정적인 용어는 있지만 의의 전가를 지칭하는 성경 구절이 없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주장은 개혁주의의 행위 언약과 은혜 언약의 구조에서 살펴보면 충분히 논박이 가능하다.


개혁교회는 성경에 근거하여 신약과 구약의 참된 종교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언약으로 이해했다.


행위언약foedus operum은 타락하지 않은 인간과 맺은 언약이고, 은혜언약foedus gratiae은 선택된 백성과 맺은 언약임을 볼 때, 새관점의 언약 사상에는 인간의 타락이 존재하지 않는다.


전가교리에 대한 부정


1.아담의 죄의 전가


개혁주의에서는,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처음 죄를 모든 인간에게 전가시키셨다고 본다.


모든 인류가 아담 안에서, 아담의 죄가 전가되어, 죄인이 된 것이다.


개혁주의에서는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서 존재론적인 죄인으로 보고있다.


모든 인간은 죄를 짓기 이전에 이미 존재론적으로 죄인으로 규정되어있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개혁주의와는 달리, 아담의 죄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 암묵적으로 정리하신 것으로 보고 있다.


새관점에서 보는 현재의 모든 인간은 아담의 범죄와는 무관하기에, 죄를 짓기 이전에는 죄인이 아니다.


새관점에서는 인간의 상태가 존재론적으로 죄인인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는 어거스틴이나 펠라기우스조차도 인정하였던 인간의 죄성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죄에 대한 규정 자체부터 차이를 보이고있다.


인간의 죄가 아담에게서 전가된 인간 본질의 문제인지, 아니면 인간의 행위에서 비롯된 환경적 결과물의 문제인지에 따라서 죄에 대한 규정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톰 라이트나 스캇 맥나이트와 같은 새관점주의자들은  인간의 죄를 아담 안에서 찾지만 아담으로부터의 전가를 인정하지 않기에, 아담으로부터 말미암은 외적인 결과물들에만 연결 시킬 뿐 인간 본질의 문제에까지는 접근을 하지 않는다.


아담의 죄가 인간 본질에 전가가 된 것이 아니고 다만 외적인 환경의 문제라면 두 번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의 역할은 예수님 자신의 의를 인간에게 전가시키는 구속 사역이 아니라 인간의 외부에 있는 환경적 요인을 바꾸는 변혁주의자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죄는, 유대인들이 자신들이 받은 율법을 이방 민족과 구별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였다는것과, 세상 정부를 대변하는 로마에 대한 투쟁 방식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규정하는 죄는 보편성이 결여된 매우 편협된 죄로서,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동력이 상실되어있는 매우 유대적인 교리일 뿐이다.


새관점에서 보는 인간은, 아담의 범죄와는 관계없기에, 무능하지도않으며, 타락한 존재도 아니다.


아담의 죄의 전가 개념이 없이는 그리스도의 율법의 요구에 대한 능동적 순종과 율법의 저주에 대한 수동적 순종의 개념이 이해될 수도 없다.


율법의 요구와 저주는, 에덴에서 아담에게 주어졌던 통치 명령과 선악과 금령이 반복적으로 재연republication된 것이다.


에덴에서 주어졌던 명령의 완성은 종말론적 안식을 향하여 있었으며, 율법의 요구에 대한 마침도 마찬가지로 안식으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으로, 에덴에서 주어졌던 명령을 완성시키셨으며, 또한 율법의 마침이 되심으로 안식의 주인이 되신 것이다.


사회변혁적 하나님 나라 운동의 문제 가운데 한 가지는 창세기 1장 28절을 통치명령이 아닌 문화명령으로 해석함으로서,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통치명령으로, 성도가 수행하여야 할 문화명령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아담의 죄의 전가는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로 이어지며, 아담의 에덴에서의 실패는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완성으로 이어진다.


이는 에덴에서 아담에게 주어질 종말론적 안식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성도에게 주어졌음을 말한다.


아담으로부터 죄를 전가받아 육신이 된 인간은 더 이상 에덴에서의 명령을 실행할 능력과 자격이 없기에,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대위임령을 실행함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자손을 그리스도의 안식으로 초대하는 일을 하여야한다.


새관점은 안식으로의 초대가 아니라 최종적 구원을 위한 행위가 요구되는 관점이다.


문화칼빈주의자인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 기독교 세계관이 톰 라이트로 부터 많은 영향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의 안식을 문화명령으로 대체함으로서, 그리스도인에게 또 하나의 행함의 과제를 주었다는 점에서 새관점과 공통된 특징을 보이고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징들은 알버트 월터스의 기독교 세계관 뿐만이 아니라, 그의 제자였던 리처드 미들턴을 비롯하여, 이머징미셔널처치 운동을 하는 스캇 맥나이트, 그리고 그 이전에 이머징 운동을 하였던 브라이언 맥클라렌, 그리고 미셔널 처치운동가인 마이클 고힌등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아담은 하나님께 통치 명령을 받은 인류의 대표였고, 타락하여 육신이 된 이후에는 더 이상 통치 명령을 실행할 능력이 상실되었으며, 모든 아담의 후손들도 마찬가지로 통치 명령을 실행할 능력이 상실된 것이다.


이는 아담의 죄가 모든 인류에게 전가되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통치 명령을 문화 명령으로 재해석하여 실행하려는 시도에는 아담의 죄가 모든 인류에게 전가되었고, 그리스도께서 통치 명령을 완성하시고 이루신 안식에 대한 수용을 거부하는 것이다.


아담의 대표성은 아담의 전가교리의 기초가 되어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두 번째 아담으로서의 예수의 대표성은 전가 교리를 기초로 정립되어야한다.



2. 예수께 전가된 인류의 범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아담과 그의 아내는 에덴에서 날이 서늘할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지만, 그리스도는 아담과는 대조적으로 성령에 의해 세례를 받으심으로 사역을 시작하셨고, 나무에 달려 죽으심으로 선악과 범죄로 인한 율법의 저주를 감당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은 둘째 아담으로서, 처음 아담이 범죄한 것에 대한 해결을 위한 사역의 과정이었다.


모든 인류가 아담 안에서 죄인이 되었듯이, 신자는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의인이 되는 것이다.


죄가 없으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구속 사역을 담당하신 것은, 아담의 범죄로 인한 죄의 댓가를 대신 치르신 것으로서, 이는 신자의 죄가 그리스도께 전가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개혁주의에서는, 택한 자를 구속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택한 자의 죄를 그리스도께 전가시키셨다고 본다.


새관점에서 보는 인간은 그리스도께 전가시킬 죄가 없는 존재이기에, 이들이 보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에는 대속 사역의 의미가 존재하지 않는다.


새관점에서 보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는, 아담의 범죄로 인한 인류의 죄를 짊어지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시며, 단지 유대 이스라엘의 삶의 방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새로운 삶의 본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희생되신 분이시다.


새관점에서는 아담의 죄가 이미 아브라함 언약 안에서 암묵적으로 정리된 것으로 보기에, 그들의 복음에서는 그리스도와 아담의 범죄와는 전혀 관계없는 별개의 것이다.


새관점에서 보는 그리스도는 아담의 범죄와 관계가 없는 사역을 하신 분이며, 둘째 아담으로서의 의미를 가지지도 못한다.


새관점에서는 보는 인류는 아담의 범죄와 관계없기에, 죄는 더 이상 그리스도와 인간을 연결해주는 고리가 아니다.


새관점에서는 그리스도께 전가된 죄가 없기에, 십자가를 통한 구속도 없으며, 전가받을 의도 없는 것이다.



3.그리스도의 의가 전가


개혁주의에서는,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의, 혹은 그의 순종하심을 택한 자에게 전가시키셨다고 본다.


톰 라이트는 아담의 죄가 전가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에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된다는 것도 인정할 수가 없다.


새관점에서는 인간이 죄인이 아닐 뿐만이 아니라,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 수 있다고 보기에, 그리스도의 의를 필요로하지 않는다.


새관점에서 보는 하나님 앞에서의 의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약속하신 것을 신실하게 이행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있다고 본다.


새관점에서보는 의의 근거는 하나님의 일방적 선포에 의한 것이지,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은 것을 근거로하는 의가 아니다.


새관점에서보는 그리스도의 사역은, 자신이 이루신 순종의 의를 신자에게 전가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로하여금 어떻게 희생적으로 이 땅에서 살아가야할지 본을 보여주신, 이스라엘 해방을 위한 혁명적 모델일 뿐이다.


새관점에서 보는 그리스도의 사역은 처음 아담과 전혀 관계가 없기에, 둘째 아담으로서의 역힐을 하신 것이 아니다.


4.존재론적이 아닌 행위론적인 접근의 한계점을 보인다.


개혁주의에서는 인간이 아담 안에서 존재론적으로 죄인이 되었기에, 태어나서 악행을 행하기 이전의 아이도 죄인으로 보고있다.


존재론적 죄인에 대한 개념은, 아이가 태어나서 세례를 받아야하는 근거가되기도한다.


인간은 예수님의 의가 전가될 때 존재론적으로 의인이 되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악행을 근거로 죄를 규정하기에, 악행을 저지르기 이전의 인간을 죄인이라고보지 않는다.


톰 라이트는 마지막 때에 자신의 행함이 근거가 되어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는다고 말한다.


톰 라이트는, 출애굽하여 가나안에서 살던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이미 하나님 나라 안에 거하는 이들은 끊임없는 연습과 노력으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합당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톰 라이트가 보는 그리스도는 안식의 주인도 아니다.


톰 라이트가 전하는 복음에는, 그리스도의 안식이 없으며,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본받는 또 다른 짐을 짊어져야만 한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은, 자신의 생명마져도 희생적으로  내어주어야하기에, 율법을 지키는 것보다도 더욱 힘든 것이다.


과연 누가 자신의 행위를 근거로 하나님 앞에 떳떳하게 나아갈 수 있는 자가 있겠는가.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이 패망에 이를 수밖에 없었던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으라는 요구는, 또 하나의 율법이 되어, 모든 이들을 저주로 몰아가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에,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지 않고는, 스스로의 무덤을 팔 뿐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복음에는 안식이 없으며, 오직 저주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톰 라이트는 전가교리를 인정하지 않고있기에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행위론적 접근의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


5. 개인의 구원보다는 공동체의 회복


전가교리는 개인적으로 일어날뿐, 공동체적으로 일어나지는 않는다.


하나님 나라 공동체는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은 성도들의 모임이다.


그리스도의 의는 공동체적으로 전가될 수가 없으며, 공동체적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새관점은 개인의 구원이 아니라 공동체의 회복에 있기에, 전가 교리가 들어설 틈이 없다.


톰 라이트의 기독론은 아담과 연결되어있지 않고 아브라함과 연결되어있기에 구원론적 접근이 아닌 교회론적 접근을 하고있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새관점에서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개념으로 보지 않는다.


톰 라이트의 교회론은 하나님 나라 개념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이전에, 이미 출애굽을 통하여 성취되었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교회가 형성되기 이전에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재구성되었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유대중심적인 하나님 나라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의 대속이 아니라, 예수의 혁명적 메시아 사상이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


톰 라이트가 보는 교회는 유대주의적 하나님 나라의 확장일 뿐이다.


새관점에서 보는 성도의 역할은, 신앙 고백을 통한 하나님 앞에서의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기 위하여 예수를 본받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톰 라이트의 교회론에는 그리스도의 대속과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를 전가받는다는 개념 자체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그리스도의 의를 근거로하지 않는 새관점 개념의 하나님 나라는 공동체의 완성을 위한 유대주의와 별로 차이가 없다.


새관점은 교회를 유대교적 공동체로 돌이켜서 성도에게 다시 무거운 짐을 지워줄 뿐이다.



의의 전가(Imputation of righteousness)


의의 전가(Imputation of righteousness)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믿는 자에게 전가됨으로서 신자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 수 있다는 개혁주의 칭의 교리의 핵심 개념이다.


"의의 전가(imputation)"라는 개념이 없이는 복음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될 수 없지만, 톰 라이트는 전가 개념을 제거한 복음을 새롭게 쓰고있다.


의의 전가 개념을 부정하는 톰 라이트가 말하는 기독교는 더 이상 유대교와 구분될 수 없는 유대주의적 기독교가 되어버렸다.


이에 대하여 John Fesko의 글 “The New Perspective on Paul: Calvin and N.T. Wright”와 톰 라이트의 “바울”등에서 볼 수 있는 톰 라이트의 전가 교리에 대한 몇 가지 비평을 정리해본다.



1) 톰 라이트가 말하는 의는 전통적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의와 차이가 있다.


칼빈이 말하는 칭의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로운 사람으로 기쁘게 받아주시는데 이는 죄를 사하여 주시고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됨으로서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칼빈이 칭의를 말할 때 죄 사함이라는 주제를 반복하여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칼빈이 하나님의 의는 거듭나는 은혜를 가져오며 은혜를 가져오는 수단으로 의의 전가라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고 말한다.

(When Calvin defines justification he writes that it is “the acceptance with which God receives us into his favor as righteous men.  And we say that it consists in the remission of sins and the imputation of Christ’s righteousness.” We see in Calvin’s definition of justification the repeated theme of the remission of sins.  We also see that when Calvin explained that the righteousness of God brings the grace of regeneration that he specifies the means of obtaining that grace—namely, imputation.)


그러나 톰 라이트가 말하는 의는 전가된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아니라 (언약을 충실히 이행하여 나가시는) 하나님의 의(The Faithfulness of God)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the righteousness of God is not something that He imputes to the Christian believer but rather it is a quality that belongs to God.-The New Perspective on Paul: Calvin and N.T. Wright

by J.V. Fesko)



2) 피고가 되신 예수님의 의가 전가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관계없이 선포되는 재판장의 의를 말한다.


(톰 라이트는 말하기를) 하나님은 약속을 하시고 이를 지키시는 언약의 하나님으로서 의로우신 분이시다. 법정의 비유를 말하자면 하나님은 자신의 말에 대하여 진실되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으로서 (바울이 하나님께서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고르게 대하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을 주목하라.) 죄에 관여 하시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도움이 필요 없으신 분으로서 이를 믿는 자를 의롭다고 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 자신의 의를 주제로 생각해 보는 것이- 그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과 법정적 비유를 생각해보면- 메세지의 핵심을 이해하는 키가 된다.

“God is himself righteous, as the covenant God who has made promises and kept them.  In terms of the law-court metaphor, he has been true to his word, he has been impartial (note the way in which Paul goes on at once to speak of God’s even-handed dealing with Jew and Gentile alike), and he has dealt with sin.  He has also thereby vindicated the helpless: he is the ‘justifier of the one who has faith.’ This theme of God’s own righteousness, understood as his covenant faithfulness, and seen in terms of the law-court metaphor, is the key to this vital passage.-Wright, Paul, p. 105.”


여기서 톰 라이트가 말하는 의는 누군가가 대신 죄값을 치러준 것을 근거로 해서 재판장이 무죄를 선고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죄값과 관계없이 그냥 재판장의  일방적인 선포에 의하여 무죄가 선언되는 것이기에 피고의 무죄의 근거는 재판장의 의가 되는 것이지 누군가의 죄값을 치른 분의 의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3) 법정적 칭의에 대한 톰 라이트의 생각


이것은, 톰 라이트에 따르면, 칭의가 하나님의 의, 혹은 더욱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신자들 각자에 전가 되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사실, 개혁주의 전통에 대한 언급을 하면서, 라이트는 확실히 전가 된 의의 개념을 거부한다. 라이트는 말하기를 "만약에 우리가 과거에 많이 그렇게 해왔던 것과 같은  '법률-법정 비유의 생각'을 떠난다면, 이것은 냉정한 사업의 한 단면으로서의 법 집행과, 논리적이며 올바르지만 좀처럼 우리가 예배하고 싶지 않은 하나님에 의하여 실행되는 거의 생각의 기교라는 인상을 심어줄 것이다."

This, of course, means that justification is not, according to Wright, about imputing the righteousness of God, or more specifically Jesus Christ, to the individual believer.  

In fact, with allusions to the Reformed tradition, Wright essentially rejects the concept of imputed righteousness.  

Wright states that “if we leave the notion of ‘righteousness as a law-court metaphor only, as so many have done in the past, this gives the impression of a legal transaction, a cold piece of business, almost a trick of thought performed by a God who is logical and correct but hardly one we would want to worship.”(Wright, Paul, p. 110)-The New Perspective on Paul: Calvin and N.T. Wright by J.V. Fesko)


톰 라이트는 개혁주의와 마찬가지로 칭의의 개념을 법정적으로 보고있지만 하나님의 의를 전가받는다는 개혁주의의 생각을 거부하고있다.(What Saint Paul Really Said: N. T. Wright 96)


톰 라이트는 전통적 개혁주의가 가지고 있는 법정적 칭의 즉 예수님의 의에 의하여 하나님 앞에서 의인으로 선고된다는 법정적 개념의 의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행위가 심판에 대하여 어떠한 영향을 미친다면 우리는 능력이 있는자이다.


구원의 완성 개념에서 새관점 논리가 맞다면 어느 누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로운 행위를 자랑할 수 있겠는가?


행위를 근거로 하여 최종적 심판에 이르게 된다면,  그리스도를 필요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행위의 부족함만 드러날 뿐이다.


새관점의 논리로는 어느 누구도 그들이 말하는 최종적 칭의에 이를 수 없을 것이다.



4) 하나님의 의를 근거로한 의의전가를 부인한다.


칼빈은 하나님의 의는 죄인들에게 거듭남의 은혜를 가져오는데 죄인이 이 은혜를 얻도록 하기 위하여  의의전가(Imputation)라는 방법을 사용하신다고 말한다.

라이트가 '하나님의 의'를 주관적이고 소유의 격, 즉 하나님께 속하여있는 속성으로 이해하는 것과는 달리, 칼빈은 이것을 객관적이거나 혹은 기원의 속격으로 이해한다.

달리 말하자면, 하나님의 의는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라는 말이다.

칼빈은 하나님의 의가 죄 사함과 거듭남의 은혜를 가져온다고 말한다.

라이트에서와 마찬가지로, 칼빈의 칭의 이해에는 중요한 것들이 내포되어있다.

Calvin explained that the righteousness of God brings the grace of regeneration that he specifies the means of obtaining that grace—namely, imputation. Unlike Wright, who reads the ‘righteousness of God’ as a subjective or possessive genitive, i.e., a quality that belongs to God, Calvin reads it as either an objective or genitive of origin.  In other words, the righteousness of God is something that is given to man. Calvin notes that the righteousness of God brings the remission of sins and the grace of regeneration. This, just as with Wright, has important implications for Calvin’s understanding of justification.



5) 예수를 아담과 대비되는 둘째 아담으로 보고있지 않다.


톰 라이트는 신약을 아담의 저주 가운데 약속된 회복의 성취로 보지 않고 아브라함과의 약속에 대한 실행으로 보고 있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아브라함 언약으오부터 시작되어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을 중심으로한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있다.


톰 라이트는 성경을 머리와 몸통, 그리고 꼬리로 구분한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에서 처음 아담과 마지막 아담은 머리와 꼬리일 뿐 몸통이 아니다.


새관점에서의 몸통은 유대인이다.


하지만 성경은 머리와 몸통, 그리고 꼬리로 분류할 수는 없다.


성경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구약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그림자이면서, 유형적 표상일 뿐이다.


처음 아담은 마지막 아담의 모형일 뿐이다.(롬 5:14)


아담으로부터 시작하여 타락한 인간의 역사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과 더불어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다.


구약이 타락하여 육신이 된 인간의 역사라면, 신약은 거듭나서 새생명을 얻은 자의 역사의 시작이다.


성경이 복음일 수 있는 것은, 아담 안에서 죽은 자에게 그리스도의 새생명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죽음과 새생명의 대비는 처음 아담과 마지막 아담의 대비이며, 이는 전가 교리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죽은 자들이 아담의 죄를 전가받은 이들이라면, 살아있는 자는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를 전가받은 이들이다.


전가 교리가 아니고서는 처음 아담과 마지막 아담의 대비를 설명할 수가 없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전가 교리를 제거하였기에, 처음 아담과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변방으로 밀어놓고, 그 중심에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을 집어 넣었다.



그림자를 실체로 바꾼 새관점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2)”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고전 15:45)”


이와같이 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첫 사람 아담과 대비되는 마지막 아담으로 묘사하고있다.


첫 사람 아담과 대비되는 마지막 아담은 대표성과 전가 교리를 통해 이해되어야만 한다.


전가 교리를 통해 이해되지 않을 경우 경우, 첫 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표성은 설명될 수 없다.


첫 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의 대표성은 하나님의 형상의 손상과 회복에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처음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듯이, 애굽에서의 이스라엘은 아들로서 부름을 받았다.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보내 주어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보내 주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출 4:22-23)”


아들로 부름받은 이스라엘은 마지막 아담이신 살려주는 영으로서 산 영이 될 수 있었다.


처음 아담은 타락으로 인하여 육신이 되었지만, 신자는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에 의하여 산 영이 된 것이다.


성경은 처음 아담과 마지막 아담을 대비시키면서, 육신이 된 아담을 살리신  산 영이신 그리스도로 마침이 된다.


처음 아담과 마지막 아담은 성경의 시작과 끝이며, 죽음과 삶의 대표성을 가짐으로서, 모든 인류가 아담 안에서 죽었으며,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신자가 아담 안에서 산 영이 되었음을 선포하고있다.


이 모든 대비적 관계는 전가라는 끈이 있어야만 대표성이 각 개인에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처음 아담의 타락으로 모든 인간이 육신이 되었지만, 육신을 입은 인간은 타락한 아담에게 약속된 원시복음(창 3:15) 안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톰 라이트는 예수의 역할을, 아담의 저주와 더불어 약속된 원시 복음(창 3:15)의 성취와는 관계가 없는 아브라함의 언약에 대한 유대주의적 해석에 집착한다.


톰 라이트에게 예수는 처음 아담과 대비되는 마지막 아담이 아니다.


톰 라이트는 아브라함의 영적인 자손이 아니라, 출애굽한 아브라함의 육적인 자손을 통해서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가 성취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아브라함 언약을 근거로 이 땅에서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으며,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실질적인 하나님 나라로서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라고 보는 것이다.


성경의 처음과 마지막이 생략되고 유형적 모델인 이스라엘이 실체로서 변신된 것이다.


참된 이스라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아니라, 유월절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깨끗하게 된 신자들을 통하여 이 땅에 성취된 것이다.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어린양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보혈을 통한 구원을 예표하는 그림자일 뿐이다.


톰 라이트는 출애굽과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을 예표하는 모형이 아니라 실체로 보고있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아브라함 언약이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통하여 가나안에서 실질적으로 성취되었다고 본다.


톰 라이트가 보는 예수 그리스도는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가 아니며, 그에게 예수는 이 땅에 성취된 가나안의 이스라엘이 행위에 있어서 문제점들을 드러내었기에, 새로운 행동 방식을 제시하는 분일 뿐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부활은 예수의 혁명적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 옳다고 인정받았음을 증명해 주는 것일 뿐이다.


톰 라이트에게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유대 이스라엘의 확장일 뿐이다.


톰 라이트는 유다 이스라엘을 이 땅에 실현된 실질적 하나님 나라라고 보고있다.


그는 그림자를 실체로 바꾸어 버렸는데, 이는 대표성을 설명하기 위한 전가 개념을 제거해 버림으로 가능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톰 라이트의 새관점에는 전가교리가 들어설 틈이 없다.



posted by Wonho Kim
: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의와 케제만과 슈바이처의 묵시적 유대교 사상



김원호(dent4834@hanmail.net)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바울에 관한 새관점”에서의 칭의의 근거가된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의의 근거는 개혁주의에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리스도의 의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새관점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이 하나님의 거룩함에 참여할 수 있는 근거는,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통한 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하신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신다는 하나님의 의를 근거로한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의에 참여된 유대 백성은, 하나님의 의를 근거로 하는 은혜 안에 머물기 위해서 율법을 지킨다는 언약적 율법주의의 틀 안에서 이해되어져야한다.


톰 라이트는 새관점의 근간을 이루는 언약적 율법주의를 재구성하기 위해서 불트만 학파의 케제만과 역사적 예수 탐구에서의 슈바이처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한다.


이번 글에서는 간단하게나마 톰 라이트가 어떻게 케제만과 슈바이처에게서 도움을 받고 있는지 살펴보고자한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의


톰 라이트의 “바울에 관한 새관점”의 핵심에는 “하나님의 의” 즉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the faithfulness of God”이라는 사상이 자리잡고있다.


새관점의 언약 사상은 개혁주의 언약 사상과 많은 차이를 보여주고있다.


개혁주의 언약 사상에, 그리스도가 중심에 자리잡고있다면,  톰 라이트가 말하는 새관점의 언약 사상에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중심에 자리잡고있다.


개혁주의에서 아브라함 언약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통하여 이땅에 구현되었다고 보고있다면, 새관점에서는 아브라함 언약이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통하여 구현되었다고 보고있다.


톰 라이트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에 있으며,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아브라함과의 언약이 신실하게 이행되는 과정이었기에, 출애굽 자체가 구원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새관점에서는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을 하나님의 은혜 안에 들어가는 구원의 과정으로 보는 것이다.


새관점에서는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이 출애굽이라는 구원의 과정을 통하여 은혜 안에 머물고 있는 상태였기에,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은 은혜 안에 머물기 위한 삶의 지침으로 주어졌다고 말한다.


이를 언약적 율법주의, 혹은 신율주의, 언약적 신율주의라고 부르며,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율법주의, 즉 구원을 얻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려고했다는 관점과 차이를 보여주고있다.


이러한 차이로 인하여 개혁주의에서는 언약 백성의 근거가되는 의, 즉 하나님의 의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일원인 성도들 안에 구현된 것이라는 관점과 달리 새관점에서는 유대 이스라엘을 통하여 구현되었다고 말한다.


개혁주의에서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교회의 성도를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보는 반면에, 새관점에서는 유대 이스라엘을 실질적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보고있다.


새관점이 보여주는 이러한 차이는, 하나님나라의 백성의 근거가 되는 하나님의 의가 무엇이냐에 대한 차이로 말미암은 것이다.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하나님의 의, 즉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에 대하여 간단히 살펴보자.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covenantal faithfulness)


새관점의 핵심적인 특징은 "하나님의 의"에 대한 이해에 있다.

톰 라이트는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 자신의 약속,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라고 말한다.(What Saint Paul Really Said: N. T. Wright,  96)

라이트는 이를, 창조 세계를 회복하고 새롭게하려는 언약 계획에 대한 하나님의 헌신을 묘사하는 용어로 사용함으로서,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서의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으로 바꾸어 해석한다.(Resurrection of the Son of God, N. T. Wright, 305)

라이트는 하나님의 의(the righteousness of God)에 대한 70인 역(septuagint)의 해석이 “하나님 자신의 언약의 약속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신실하심God's own faithfulness to his promisses to the covenant”이라고 말한다.(What Saint Paul Really Said, 96)

이사야서 40-55장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속성의 한 가지 면을 나타내주는 것이며, 이는 이스라엘의 완고함과 상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속성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을 구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하셨고 이스라엘은 이를 믿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는 한편으로는 그의 신실하심과, 다른 한편으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심과 어원이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사야에 나타난 그의 그림의 중심에는 고통받는 종의 이상한 모습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의로우신 목적이 이를 통하여 성취된다는 것이다.


이사야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불의에 대하여 벌을 주시고 의에 대하여는 상주시는 하나님의 도덕적 성품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의는 언약에 대한 신실한 행하심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By Faith Alone: Answering the Challenges to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Gary L. W. Johnson외, 44)


여기서 톰 라이트는, 죄에 대한 용서를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과 연계시킨다.


라이트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 안에서 아담의 죄와 이스라엘의 죄가 모두 해결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우선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으로 이해가 된다고 하더라도, 톰 라이트는 구약과 유대주의에서 이 하나님의 의라는 용어를 법정적인 비유로 적용하여 사용하고 있음을 인정하고있다.


라이트는 "하나님의 의"라는 개념을 재판관의 판결을 거칠 필요가 없는 법정적 심판의 영역에까지 확대 적용함으로서, 죄의 문제가 법정적 판결이 없이 해결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하나님의 의는 반드시 법정적 판결의 과정을 요구하는데 반하여 톰 라이트가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의는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이라는 항목이 법정적 평결을 대신 한 것으로 간주함으로서, 죄인이 법정적인 평결없이 법정적 의인이 되었다는 것이다.(By Faith Alone: Answering the Challenges to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Gary L. W. Johnson외, 44)


하지만 사람의 의는 하나님의 의로 연결되어,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것처럼, 언약 안에서 다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반드시 재판관의 평결이라는 과정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의( the righteousness of God)나 칭의(justification)라는 용어는 완전히 별률적이거나 법정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라이트는 로마서1:17의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 of God)를 언약에 신실하신 분 즉 약속을 지키시는 분으로 묘사할뿐, 심판자로서 의를 세우시며 공정하게 판단하시는 분, 즉 정의를 세우시는 분으로 묘사하지 않는다.(By Faith Alone: Answering the Challenges to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Gary L. W. Johnson외, 62)



케제만의 하나님의 의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불트만학파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케제만은 슈바이처의 “옛 탐구”와 구별된 “새 탐구”를 시작하였다.

톰 라이트의 신학적 근거를 제공하는 “역사적 예수 탐구”는 케제만의 “새 탐구”의 영역에 속하여있다.


라이트는 케제만의 역사적 예수 탐구에 대하여 긍정적 입장을 취한다.


톰 라이트는, “제1,2차 세계대전 동안에 교회가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를 제대로 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비역사적 예수가 제시되어, 나치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했다”는 에른스트 케제만의 1953년 10월 23일 행한 연설에 동의한다.(Challenge of Jesus, 21)


불트만학파인 에른스트 케제만이 로마서 1장 17절의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한 이후부터, 라이트는  이를 보편화 영구화 시키고있다.(By Faith Alone: Answering the Challenges to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Gary L. W. Johnson외, 64)     


라이트는 케제만의 관계론적 칭의론, 즉 “하나님의 언약에 신실하심”과, “하나님 나라로의 이전”이라는 관계적 칭의를, 윤리로서의 성화와 연계시켜 칭의와 윤리의 문제를 해결하고자한다.

케제만이 말하는 하나님의 의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케제만은 불트만의 제자로서, 불트만의 인간론 중심적이고 개인론 중심적인 해석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의'를 '뒤틀린 온 세상을 바로잡는 하나님의 힘'으로 해석한다.

2. 케제만은 칭의론을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라는 관점에서 해석한다.(칭의와 성화, 김세윤, 21)

새관점에서는 하나님의 의를 전통적인 개념과 달리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으로 해석한다.

이는 하나님의 의에 대한 케제만(Ka:semann)의 해석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과 동일하다.(칭의와 성화, 김세윤, 63)

케제만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하나님의 징벌을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 죄를 씻어 버리고 덮어버리는 제사expiation”로 해석한다.

이는 죄에 대하여 벌을 주고 의에 대하여 상을 주는 법정적 의미로서의 전통적인 그리스도의 속죄 개념인 “형벌적 대속론(Penal substitutionary theory of atonement)”과는 다른 것이다.

3. 케제만은 칭의의 관계론적 의미를 중시함을 넘어서, 하나님의 의를 자신과 올바른 관계로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힘이라고 말한다.(칭의와 성화, 김세윤, 84)

여기서 하나님의 의는 창조주가 타락한 자신의 피조물들을 자신의 주권 아래로 회복시키는 힘이다.

4. 케제만은 칭의를 “주권의 전이(lordship- transfer/ lordship-change)”로 해석한다.

“주권적 전이”는 아담적 죄인들을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속죄 제사를 통해 사단의 통치 아래서 해방하여(여기에 죄용서가 내포됨) 자신의 통치(하나님 나라) 아래로 이전하는 것을 말한다.(칭의와 성화, 김세윤, 85)

하나님의 의를 케제만의 주장처럼 주권의 전이라고한다면, 주권의 전이가 구원을 뜻한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주권의 전이는 신자의 믿음을 전제로하지 않는다.

이는, 구원을 위해서 자신이 본질적 죄인이라는 고백이 필요가 없으며, 그리스도의 법정적 속죄사역에 대한 인식이 없어도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우리의 아담적 죄를 용서하여 주셨기에,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윤리가 요구되어지는 것이다.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이 은혜 아래 거하였다는 새관점의 주장은, 일종의 주권의 전이에 의한 결과의 한 가지 형태인 것이다.

주권의 전이 개념에서, 가나안에서의 율법은 이스라엘에게 요구되어지는 윤리로 주어진 것이며, 신약시대에 와서는 예수님이 모델이 되어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요구되어지는 것이다.

만약에 요구되어지는 윤리적 삶을 살아내지 못한다면 최종적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는 것이다.

주권적 전이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행위에 의해서 구원이 결정되는 새관점의 주장은, 행위 구원론으로 귀착될 수 밖에 없으며, 구원을 위한 인간의 의지를 강조한 알미니우스의 주장과 마찬가지로, 구원이 신인협력에 의한 결과물이 되는 것이다.


역사적 예수 탐구

톰 라이트는 자신의 주장을 위해 “역사적 예수 탐구”에 모든 것을 걸어놓고있다.


“역사적 예수 탐구”를 하지 않고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예수가 실제 누구였는지를 모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라이마루스로부터 시작된 역사적 예수 탐구로 인하여 성경의 예수가 누구였는지 연구되기 시작했으며, 지금 제 3의 탐구에 의하여 밝혀진 예수가 진짜라면, 이제까지의 성경에 대한 해석은 전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지금의 우리를 포함하여, 루터나 칼빈을 비롯하여, 개혁주의 신학자 전부가 이제껏 잘못 만들어진 예수를 믿었다는 것이다.


라이트의 성경 해석은, 20세기 말 상황에서의 슈바이처 라인에서 제3의 탐구에 의한 것이다.


슈바이처의 유대 묵시문학적 종말론은 예수를 1세기 유대교의 맥락에서 철저하게 재구성함으로서, 예수 연구에 대한 새로운 추진력을 제공한다.

톰 라이트에게 슈바이처의 유대 묵시문학적 종말론은, 라이마루스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 됨으로서, 옛 탐구와 구분되는 새 탐구로서의 제 3의 탐구를 시작하게 한다.

슈바이처의 철저한 종말론은 예수를 1세기 유대교의 묵시적 기대를 품은 자로 보고있다.

브레데 노선과 구별된 슈바이처의 노선은 “역사적 재구성”을 향한 최고의 전망으로 제시되면서, 바울에 관한 새관점의 시발점이 되었다.


윌리엄 브레데(William Wrede)와는 달리  예수를 종말론적이고 묵시적인 유대교의 맥락에 두었던 슈바이처는 톰 라이트에게 언약적 율법주의의 틀을 제공하였던 것이다.(예수의 도전, 119)



슈바이처의 묵시적 유대교 사상


톰 라이트는 역사적 예수 탐구라는 영역에서 슈바이처의 바울 해석에 많은 도움을 받고있다.

불트만은 슈바이처와 달리, 예수와 바울을 대립 시키지 않는 반면에,  슈바이처는 브레데와 같이 예수와 바울을 대립시킴으로서, 바울이 예수와 다른 어떤 종교를 가르쳤다고 생각한다.

슈바이처는 예수를 구속받은 구속자라는 실존주의적 개념으로 이해함으로서, 예수의 실존을 유대교와 연결시켜 해석하고있다.

슈바이처는 예수를 유대교에서의 실존적 완성으로 보고있는 것이다.

예수의 유대교에서의 실존적 완성이라는 후기 유대교적 메시아 개념은, 유대교가 은혜의 종교였다는 톰 라이트의 언약적 율법주의와 맥락을 같이한다.

슈바이처는 윌리엄 브레데(William Wrede)와 같이 예수와 바울을 대립시키지만, 예수를 종말론적이고 묵시적인 유대교의 맥락에 둠으로서 브레데와 차이를 보이고있다.


톰 라이트는 브레데의 생각에 동의를 못하다가, 예수를 종말론적이고 묵시적인 유대교의 맥락에 두는 슈바이처의 견해에는 상당히 공감하게 되었다.(예수의 도전, 119)


라이트는 자신이 슈바이처의 접근과 비슷한 접근을 한다고 말한다

슈바이처의 후기 유대교적 메시아 사상은, 톰 라이트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의라는 범주 안에 귀속시키는 틀을 제공한다.

슈바이처가, 바울이 예수와는 다른 종말론의 체계를 가지고있다는 바울과 예수의 대립관계를, 유대주의적 묵시 문학의 맥락에서 해결한 것은, 톰 라이트가 예수를 유대주의적 메시아, 즉 유대를 해방시키기 위한 혁명적 메시아라는 사상의 밑거름이 된다.

이는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구속주로서의 그리스도의 의를 유대교에 편입시킴으로서,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의, 즉 아브라함 언약을 신실하게 이행하신 하나님의 의를 완성시키신 분으로 제한 시킨다.

라이트는 슈바이처의 묵시적 유대교 사상를 통해, 바울의 기독론을 유대주의적 메시아 사상에 귀속시킴으로서, 바울에 관한 새관점의 틀을 완성시켜 나간다.

라이트가 말하는 새관점은, 바울의 서신서에 나타난 기독론이 유대주의적 메시아 개념을 바울 자신이 특별하게 발전시킨 것에 불과한 것이라는 슈바이처의 묵시적 유대교 사상을 빌려온 것이다.

하나님의 의를 말하는 라이트의 의의 개념에는, “칭의를 순전히 법정적으로만 이해하는 칭의론은 윤리를 낳지 못한다"는 슈바이처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행위 구원론적 의의 개념이 추가된다.

이는 슐라이어마허의 영향을 받은 슈바이처가, 법정적 칭의론이 갖는 윤리의 부재에 대하여 우려했던 것과 맥락을 같이한다.

라이트는 슈바이처의 법정적 칭의론에 케제만의 관계적 칭의론을 대입시킴으로서, 결핍된 윤리의 문제를 해결하려한다.


비평

톰 라이트는 케제만이 말하는 하나님의 의를 자신의 하나님의 의의 개념에 도입한다.


하나님의 의를 케제만의 주장처럼 “주권의 전이”라고한다면, 주권의 전이가 구원을 뜻한다고 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사람들의 믿음을 전제로하고있지 않다.

구원을 위해 자신들이 본질적 죄인이라는 고백도 필요가 없으며, 그리스도의 법정적 속죄사역에 대한 인식도 필요없다.

케제만의 주권의 전이는 언약적 율법주의, 즉 신율주의의 토대가 된다.

이스라엘에게 요구되어지는 윤리는, 새관점 학파가 주장하는 것과같이 율법이었으며, 신약시대에 와서는 예수님이 모델이 되어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되었다.

새관점주의자에게는 의의 근거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이라는 하나님의 의에 있기에, 예수는 의의 근거가 되지 않으며, 예수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단지 따름의 대상일 뿐이다.

새관점주의자들은, 주권적 전이에 의해서 요구되어지는 윤리적 삶을 살아내지 못한다면, 최종적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새관점의 주장은 행위 구원론으로 귀착될 수 밖에 없으며, 구원을 위한 인간의 의지를 강조한 알미니우스의 주장과 같이, 구원을 신인협력에 의한 결과물로 보는 것이다.

주권적 전이에 의한 하나님의 의는 구원의 은혜의 선물이지만, 그 선물은 하나님의 주권적 주장을 내포한다는 것이다.

주권적 주장이 의무적 요구 조건이 되기에, 요구 조건을 이행하지 못한다면 최종적 구원이 취소 것이다.

케제만의 주장과 같이, 하나님이 죄인들을 용서하고 자신의 나라로 이전 시켜 자신의 백성으로 만듬으로써, 이제 그들이 하나님의 통치에 의지하고 순종하며 살아야한다는 요구, 즉 윤리적 의무를 담고있다면 윤리는 구원의 조건이 된다.

조건이 있는 은혜는 은혜가 될 수 없다.

케제만의 하나님의 의 개념이나, 슈바이처의 유대교적 메시아 사상은 동일하게 유대주의적 공로주의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

은혜가 참다운 은혜되려면 인간의 공로가 요구되어서는 안된다.

어떠한 인간의 공로도 하나님의 기준을 맞출 수가 없으며, 이는 인간이 값을 주고 하나님께 이익을 취하는 거래 행위 밖에는 안된다.

모든 인간은 이미 아담 안에서 전적으로 부패한,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기에, 어떠한 형태의 공로도 취할 수 없는 존재이다.

슈바이처나 케제만, 톰 라이트가 공로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이며,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에 가능한 것이다.

처음 아담 안에서 죽은 자는 오직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 안에서만 생명을 얻을 수 있을 뿐이다.

posted by Wonho Kim
:
톰 라이트의 새관점 2018. 2. 12. 20:54

존 페스코가 말하는 바울에 관한 새관점: 칼빈과 톰 라이트


                                     번역  김원호(dent4834@hanmail.net)


The New Perspective on Paul: Calvin and N.T. Wright
by J.V. Fesko


출처

http://www.ligonier.org/learn/articles/new-perspective-paul-calvin-and-nt-wright/


역자의 들어가는 말


존 페스코J.V. Fesko(Academic Dean, Professor of Systematic Theology and Historical Theology of WSCal)가 말하는 새관점에 대한 비평은, 칼빈주의에 속하여있다고 생각하는 개혁주의 영역에서 있는 이들에게, 톰 라이트의 새관점이 개혁주의와 관점과 어떻게 차이가 있는지를 잘 설명해주고있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일반 복음주의 영역의 출판사에서 뿐만이 아니라 신학교는 물론 많은 목회자들에게 마치 새로운 유행이라도 되는듯이 아무 저항없이 보편화되고있으며, 심지어는 화란개혁주의의 기독교 세계관과도 연합하여 개혁주의의 기본 진리마저도 왜곡시키고있다.


(화란 개혁주의 기독교 세계관을 잘 표현하는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이 미셔널 처치 운동을 하는 칼빈신학교의 마이클 고힌과 함께 톰 라이트의 새관점을 수용한 개정판이 2005년에 새롭게 발간된 것을 비롯하여, 최근에는 그 뒤를 이어받은 리처드 미들턴의 “새 하늘과 새 땅"이 개혁주의를 표방하면서 정작 내용에서는 톰 라이트의 새관점을 바탕으로한 기독교 세계관의 도서로 발간되었다.)


이는 톰 라이트를 안다는 것이 마치 시대를 앞서나가는 사람인양 비추어지는 것처럼, 많은 신학자와 목회자가 자랑이라도 하듯이 톰 라이트를 소개 하고 있지만,  정작 기독교와 유대교, 카톨릭을 섞어 놓은 것과 같은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평신도들에게 많은 혼란을 주고있으며, 심지어는 종교 개혁의 기본 진리마져도 뿌리채 흔들어버리려는 양상으로 번져 나아가고있다.


이러한 위험한 양상에 대하여 톰 라이트의 새관점이 칼빈의 개혁주의 관점과 어떻게 다른지를 전하는  존 페스코J. V. Fesko의 다음 글은 새관점이 얼마나 심각하게 다른 복음인가를 잘 표현하고 있기에 이를 번역하고자한다.


서론
Introduction


전도자가 우리들에게 말하였던 바와 같이 해 아래 새것이 없다(전1.9)고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근래에 와서는 바울 해석자들의 학부에서 자신들이 바울에 관한 새관점을 수용하고있다고 밝히는 표지를 내세우고있다.
Despite the fact that Qohelet tells us that there is nothing new under the sun (Eccl. 1.9), in recent years a school of Pauline interpreters have raised their banner declaring they have a new perspective on Paul.  


이 새관점의 특성은 정확히 무엇인가?

What exactly is the nature of this new perspective?  


새관점의 초기 일원 중의 한 사람인 샌더스는 역사적 개신교의 바울 해석은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One of the earliest proponents of the new perspective, E. P. Sanders, argues that the historic Protestant interpretation of Paul is incorrect.  


바울은 바리세적 율법주의에 맞선것이 아니다;  차라리 바울 시대의 유대교는 행위가 아닌 은혜의 종교였다(고 샌더스는 말한다).

Paul did not face opposition from pharisaical legalism; rather, the Judaism of Paul’s day was a religion of grace, not works.  


샌더스는 바울 시대의 유대교의 전반적인 형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있다:

Sanders describes the overall pattern of Judaism in Paul’s day as:

(1)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선택하셨고 (2)율법을 주셨다. 율법은 (3)선택을 유지하시려는 하나님의 약속과 (4)순종에 대한 요구를 내포하고있다.  (5) 하나님은 순종에 대하여 상을 주시며 반역에 대해서는 벌하신다. (6) 율법은 속죄의 수단을 제공해주며, 속죄의 결과는 (7) 언약 관계를 유지하거나 재확립해준다. (8) 순종과 속죄와 하나님의 자비를 통하여 언약 안에 계속 머물러있는 모든 사람은 구원 받을 집단에 속하게 된다.

(1) God has chosen Israel and (2) given the law.  The law implies both (3) God’s promise to maintain election and (4) the requirements to obey.  (5) God rewards obedience and punishes transgression.  (6) The law provides for means of atonement, and atonement results in (7) maintenance or re-establishment of the covenantal relationship.  (8)  All those who are maintained in the covenant by obedience, atonement and God’s mercy belong to the group which will be saved.

샌더스는 "선택과 궁극적인 구원은 인간의 성취에 의한 것보다는 하나님의 자비에 의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Sanders emphasizes the fact that “election and ultimately salvation are considered to be by God’s mercy rather than human achievement.” [1]

샌더스가 언약적 율법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1세기 유대주의를 서술한 것이다.

It is this description of first century Judaism that Sanders has called covenantal nomism.  


바울 시대의 유대교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은 바로 은혜에 의한 구원의 형태이며, 일반적으로 논의되는 바와 같은 율법주의의 유형이 아니라고 샌더스는 말한다.

It is this pattern of salvation by grace, argues Sanders, that dominates the Judaism of Paul’s day—not rank legalism as is commonly argued.  


샌더스의 경우를 단순하게 서술한다면, 바울 시대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언약에 들어가지만 그들은 순종으로 자신들의 언약 안에서의 지위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A simple description of Sanders’ case is that Jews in Paul’s day entered the covenant by God’s grace but they maintained their position in covenant by their obedience.[2]  


그러나 이러한 바울에 관한 학문 분야에서의 샌더스의 초기 연구는 단지 개막을 알리는 신호탄일 뿐이다.

Sanders’ initial work in this area of Pauline scholarship, however, was only an opening volley.

샌더스의 연구의 출간에 이어서 제임스 던은 이러한 새관점에 관하여 몇 단계를 더 진전시키게 된다.
Subsequent to the publication of Sanders’ work James D. G. Dunn carried the case for the new perspective several steps further.  


샌더스의 연구가 제2성전 유대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반면에, 던 자신의 연구는 바울 자신의 저술들-특히 로마서와 갈라디아서가 주목할만하다-에 초점이 맞추어져있다.

While Sanders’ work focused upon the literature of Second Temple Judaism, Dunn’s own work focused on the writings of Paul himself—most notably his epistles to the Romans and Galatians.[3]  


던은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유대인들과 논쟁을 하고 있을 때 그(바울)는 유대주의의 어리석음에 대하여 기록한 것이 아니었다고 하면서 샌더스의 궤도를 따르고있다.

Dunn follows Sanders’ trajectory by arguing that when Paul refutes the Judaizers in Galatians he is not writing against crass legalism.


어느 정도까지 던은 "바울이 율법의 행위로 오는 칭의를 부정한 것은 좀 더 명확하게 말한다면, 칭의가 할례나 혹은 유대인의 정결을 준수하는 것이나 음식을 금기시하는 것에 의존한다는 것을 거부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당연히 ‘바울은 그의 독자들에게 할례나 음식법과 같은 법을 특별히 지킬 것을 생각하라’는 의도에서 ‘율법의 행위’에 대한 것을 말했을 것을 추론해 볼 수 있다"고 논한다.

Rather, Dunn argues that Paul’s “denial that justification is from works of law is, more precisely, a denial that justification depends on circumcision or on observation of the Jewish purity and food taboos.  We may justifiably deduce, therefore, that by ‘works of law’ Paul intended his readers to think of particular observances of the law like circumcision and the food laws.”[4]

그렇다면 로마 교회나 갈라디아 교회에서의 문제는 구원론에 관한 것이 아니고 교회론이나 사회학에 관한 것이 된다.
The problem, then, in the churches of Rome and Galatia , is not one of soteriology but rather of ecclesiology and sociology.  


던은 '율법의 행위'가 율법주의가 아니라 유대인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과 관계된다고 말한다.

The ‘works of the law,’ argues Dunn, have to do with maintaining Jewish identity and not legalism.  


양 서신에서의 바울의 임무는 문화적 우월주의를 깨부수고 유대인들로하여금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동등한 동역자라는 이해를 돕는 것이된다.

Paul’s mission in both epistles is to break down the cultural elitism and help the Jews understand that Gentiles are equal partners in God’s covenant.[5]  


비록 이것은 새관점에 관한 간략한 개요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가 가장 다작의 새관점 작가들 중의 하나를 소개하는  틀을 제공해준다.

Though this is a brief thumb-nail sketch of the new perspective, this nonetheless gives us a rough framework out of which we can introduce the writings of one of the most prolific new perspective writers.

근래에 와서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사제 신학자인 톰 라이트는 새관점에 관하여 수 많은 책들을 써왔다.
In recent years N. T. Wright, Canon Theologian at Westminster Abbey, has written numerous works from the new perspective.  


그의 작품에서는 샌더스와 던과 같은 비난, 즉 바울에 대한 개신교도들의 해석은 이방 신학자들의 문건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비난을 반복하고있다.

His works have echoed the same charge as Sanders and Dunn, namely the Protestant reading of Paul has been influenced by alien theological issues.


샌더스와 던과 비슷한 맥락에서 라이트는 다음과 같이 논한다:

Along similar lines to Sanders and Dunn, Wright argues:

바울 시대의 유대교는 철저하게 가정 되었던 바과 같이, 율법적 행위로 의를 얻는 종교는 아니었다.
Judaism in Paul’s day was not, as has regularly been supposed, a religion of legalistic works-righteousness.  


만약 우리가 그것이 그러했고(유대교가 율법주의였다는 것), 그리고 바울이 만약 그러했던 것(율법주의)을 공격하였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것(유대교)과 그(바울)에게 상당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될 것이다.

If we imagine that it was, and that Paul was attacking it as if it was, we will do great violence to it and to him.  


대부분의 개신교에서는 바울과 유대교를, 마치 유대교가 고대 펠라기우스 이단의 한 형태이며, 이것에 의하여 인간이 자신들 스스로의 도덕적 노력을 통하여 자신들을 끌어올려서 칭의와 의와 구원을 얻는다고 해석한다.

Most Protestant exegetes had read Paul and Judaism as if Judaism was a form of the old heresy Pelagianism, according to which humans must pull themselves up by their moral bootstraps and thereby earn justification, righteousness, and salvation.  


샌더스는 아니라고 말한다. 유대교 안에서 율법을 지킨 것은 항상 언약적 계획 안에서 행하여진 것이다.

No, said Sanders.  Keeping the law within Judaism always functioned within a covenantal scheme.  


하나님께 유대교에서 언약을 맺으실 때 (언약을) 시작하셨기에;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이 (특히 유대인이) 반응으로 하는 모든 것을 넘어서는 것이다.

God took the initiative, when he made a covenant with Judaism; God’s grace thus precedes everything that people (specifically, Jews) do in response.  


유대인은 은혜에 대한 적절한 반응으로서의 감사함으로 율법을 지킨 것이며, 달리 표현하면, (율법을 지키는 것은) 언약 백성이 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언약 백성) 안에 머물기 위한 것이다. 우선적으로 안에 머무르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다.

The Jew keeps the law out of gratitude, as the proper response to grace—not, in other words, in order to get into the covenant people, but to stay in.  Being ‘in’ in the first place was God’s gift.[6]

이와같이 라이트의 진술이 새관점의 일반적인 것들에 대하여 동의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One can easily see the approbation of the general theses of the new perspective in Wright’s statement.  


그 밖에도 그리스도의 사역의 중요성에 관하여 논하는데 있어서, 라이트는 전통적 해석이 표준에서 벗어났다고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Elsewhere, in commenting about the significance of the ministry of Christ, Wright contends that traditional interpretations miss the mark. Wright states: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통하여 머무실 것이라는 (하나님) 나라에서의 (자신들의) 역할에 대하여 들을 것을 요구하시는 예수의 요청에 대하여 경청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들이 도전에 직면하고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Those who heeded Jesus’ call to audition for the kingdom-play that God was staging through him found themselves facing a challenge.  


그리스도인은, 그의 의도가 단순히 도덕율에 대한 새로운 법전을 제공하는 것처럼, 교회 생활에 있어서 매우 초기부터 자신들이 새로운 규율의 책에 대한 도전에 직면하도록 하였다.

Christians from quite early in the church’s life have allowed themselves to see this challenge as a new rule book, as though his intention was simply to offer a new code of morality.  


이것이 특히 종교개혁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여기에서 사람들이  선행이 논리적으로 칭의의 근거가되는 믿음을 앞선다는 것의 위험에 대하여 예민하였기 때문이다.

This has become problematic within the Reformation in particular, where people have been sensitive about the danger of putting one’s human ‘good works’ logically prior to the faith by which one is justified.  But that was not the point.[7]


지금 라이트가 샌더스나 던의 모든 점에 동의한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주요 전제들에 대하여 전체적으로 동의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Now, this is not to say that Wright agrees with Sanders and Dunn on every point; the overall agreement on the major premises, however, is evident.

이러한 비난과 확언들은 분명히 여러가지 질문들을 제기한다.
These accusations and affirmations obviously raise several questions.


바울에 대한 종교 개혁의 이해가 고대 펠라기우스에 대한 반론으로 채색되었단 말인가?

Is the Reformation reading of Paul colored by the ancient Pelagian controversy?  


개신교의 해석은 종교개혁 이후에 1세기 유대교와 바울이 “율법의 행위"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잘못 이해한 것이란 말인가?

Have Protestant exegetes since the Reformation misunderstood first century Judaism and what Paul means by ‘works of the law’?  


오직 믿음에 의한 칭의라는 개신교 교리에 대하여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What does this mean for the Protestant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faith alone?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려고 노력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먼저 바울의 칭의 교리에 대한 톰 라이트의 관점을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In an effort to answer these questions, we will first survey N. T. Wright’s views on Paul’s doctrine of justification.  


두 번째로, 그 다음에 우리는 이것들을 주요 2세대 종교개혁자 가운데 한 사람인 존 칼빈의 관점과 비교하면서 대조해 볼 것이다.

Second, we will then compare and contrast them with the views of John Calvin, one of the chief second-generation reformers.  


이러한 비교를 통해서, 우리는 최소한 톰 라이트의 저술 가운데에서의 새관점의 주장이 타당한 지에 대하여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By this comparison, we will be able to evaluate whether the claims of the new perspective, at least as they come from the pen of N. T. Wright, are valid.


마지막으로, 우리는 바울에 관한 새관점과 이것이 개혁주의 사회에 미치는 점증적인 영향력에 관하여 몇가지 일반적인 고찰과 함께 결론을 내릴 것이다.

Lastly, we will conclude with some general observations about the new perspective on Paul and its growing influence in the Reformed community



톰 라이트가 말하는 칭의

N. T. Wright on Justification

하나님의 의
The righteousness of God

우리는 톰 라이트의 저술로부터 새관점을 접했을 때, 자신이 (새관점에) 친숙한 유형이라는 것을 발견 할 수 없을 것이다.
When we come to the new perspective from the pen of N. T. Wright, one does not find himself on familiar terrain.  


이것은 라이트가 칭의를 공식적으로 인정할 어떠한 것도 취하지있지 않다는 사실 때문이다.

This is due to the fact that Wright does not take anything for granted in his formulation of justification.  


그는 " '믿음에 의한 칭의'의 일반적인 관점은, 비록 전적으로 왜곡된 것은 아니지만, 바울의 교리의 풍부함과 명료함에 타당하지 않으며, 실제로는 여러가지 점들을 왜곡시키고 있다"고 말한다.

He writes that the “popular view of ‘justification by faith,’ though not entirely misleading, does not do justice to the richness and precision of Paul’s doctrine, and indeed distorts  it at various points.”[8]  


우리는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의에 대한 개념을 탐구함으로서 그의 칭의에 대한 이해를 살펴보는 것을 시작 할 수 있을 것이다.

We can begin the survey of Wright’s understanding of justification by an examination of his concept of the righteousness of God.  


'하나님의 의'라는 문구를 읽을  때, 라이트는 이것이 주격이나 소유격으로 읽혀져야한다고 말한다.

When one reads the phrase the ‘righteousness of God’ (dikaiosu,nh qeou/, dikaiosune theou) Wright argues that it must be read as a subjective or possessive genitive.[9]  


이를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의 의는 그 분이 그리스도인 신자에게 전가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하여있는 속성이라는 것이다.

In other words, the righteousness of God is not something that He imputes to the Christian believer but rather it is a quality that belongs to God.


라이트는 로마서 3장을 분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논하고있다:

In Wright’s analysis of Romans 3, he argues: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으로서 약속을 하시고 그것을 지키시는 스스로가 의로우신 분이시다.
"God is himself righteous, as the covenant God who has made promises and kept them.  


법률-법정 비유의 의미로 본다면, 그는 자신의 말에 진실하시며, 공평하셨으며 (바울이 하나님께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에게 동일하게 손길을 주신다고 즉시 계속하여 말하는 방법을 주시하면), 그는 죄를 다루셨다.

In terms of the law-court metaphor, he has been true to his word, he has been impartial (note the way in which Paul goes on at once to speak of God’s even-handed dealing with Jew and Gentile alike), and he has dealt with sin.  


그는 또한 그것으로 인하여 무능한 자를 의롭게 하셨으며: 그는 '믿음을 가진 이를 의롭게 하시는 분'이시다.

He has also thereby vindicated the helpless: he is the ‘justifier of the one who has faith.’  


그가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이라고 이해하는, 법률-법정 비유의 의미로 볼 수 있는, 하나님 자신의 의라는 이러한 주제는 이러한 필연적인 문구의 핵심이다.

This theme of God’s own righteousness, understood as his covenant faithfulness, and seen in terms of the law-court metaphor, is the key to this vital passage.”[10]

하나님의 의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라이트의 칭의 개념에서 중요한 것이다.
Now, this understanding of the righteousness of God is significant to Wright’s concept of justification.

칭의
Justification

우리가 칭의 교리를 다루고자 하면, 라이트는 그것이 로마에 보내는 바울 서신의 중심 주제가 아니라고 반박한다.
When we come to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Wright contends that it is not the central theme of Paul’s epistle to the Romans.  


그는 "로마서를 이러한 방법으로 읽는 것은 수 백년 동안 원문에 대하여 조직적으로 폭력을 가한 것이었으며, 이제 원문에 다시 귀를 기울여야 할 때이다"라고 확신한다.

He believes that “this way of reading Romans has systematically done violence to the text for hundreds of years, and that it is time for the text to be heard again.”[11]  


라이트는, 칭의에 대한 개념은 어거스틴-펠라기우스 논쟁의 시각에서 읽혀지면 안되고, 1세기 유대교의 상황에서 읽혀져야한다고 주장한다.

Wright contends that the idea of justification must not be read in the light of the Augustine-Pelagius debate but instead in the context of first-century Judaism.[12]  


물론 사도가 기록한 것은 1세기의 맥락에 있는 것이다.

It is this first-century context, after all, out of which the apostle writes.  


라이트는, 1세기에서의 칭의는 누군가가 어떻게 하나님과 관계를 확립할 것인가에 관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Wright argues that justification in the first century was not about how someone might establish a relationship with God.  


그것은 사실 누가, 미래와 현재에 있어서,하나님의 백성의 일원인가에 대한 하나님의 종말론적 정의라는 것이다.

It was about God’s eschatological definition, both future and present, of who was, in fact, a member of his people.  


샌더스의 개념은, 이것은 '들어가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며, 진실로 '안에 머무름'에 관한 것이며, '누가 안에 있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느냐'에 대한 것이다.

In Sanders’ terms, it was not so much about ‘getting in,’ or indeed about ‘staying in,’ as about ‘how you could tell who was in.’  


표준적인 기독교 신학 용어로는, 그것은 교회론 이상의 구원론에 관한 것이 아니며; 교회 이상의 구원에 관한 것이 아니다.

In standard Christian theological language, it wasn’t so much about soteriology as about ecclesiology; not so much about salvation as about the church.[13]

물론 이것은, 톰 라이트에 따르면, 칭의가 하나님의 의, 혹은 더욱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신자들 각자에 전가 되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This, of course, means that justification is not, according to Wright, about imputing the righteousness of God, or more specifically Jesus Christ, to the individual believer.  


사실, 개혁주의 전통에 대한 언급을 하면서, 라이트는 확실히 전가된 의의 개념을 거부한다.

In fact, with allusions to the Reformed tradition, Wright essentially rejects the concept of imputed righteousness.  


라이트는 "만약에 우리가 과거에 많이 그렇게 해왔던 것과 같은 '법률-법정 비유의 생각'을 떠난다면, 이것은 냉정한 사업의 한 단면으로서의 법 집행과, 논리적이며 올바르지만 좀처럼 우리가 예배하고 싶지 않은 하나님에 의하여 실행되는, 거의 생각의 기교라는  인상을 심어줄 것이다.”고 말한다.

Wright states that “if we leave the notion of ‘righteousness as a law-court metaphor only, as so many have done in the past, this gives the impression of a legal transaction, a cold piece of business, almost a trick of thought performed by a God who is logical and correct but hardly one we would want to worship.”[14]

(톰 라이트는 말하기를) 전가보다는, 칭의가 하나님의 의나 그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으로서, 자신에게 속하여있는 사람을 옳다고 인정하며 인치는 것이다.
Rather than imputation, justification is about the righteousness of God, or His covenant faithfulness, to vindicate and mark those people who belong to Him.  


이러한 맥락에서 라이트는 단언하기를:

Along these lines Wright contends:

그러나 생각해봐라, 바울이 (로마서 2: 25-29에서) 말하기를- 일부 참된 유대인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해본다면 누구에게서 새 언약이 시작 되겠는가?
But supposing, says Paul in [Romans] 2.25-29—supposing there exist some true Jews, in whom the new covenant has been inaugurated?  


예레미야와 에스겔에서 약속한 새 언약이 실제로 누군가에게 실현될 것인지 생각해봐라.

Supposing there are some in whom the new covenant promises of Jeremiah and Ezekiel are coming true?


그들이 유대인이든 아니든, 그들이 할례를 받았든 안받았든,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그의 참된 언약 백성으로 간주될 것이다.

Whether they are racially Jews or not, whether they are circumcised or not, they will be regarded by God as his true covenant people.  


이것이 칭의의 교리이며, 그렇지 않다면 핵심은 변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참된 백성을 옳다고 할 그 때, 큰 날이 올 것이다.

This is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or rather its first key move: there will come a time, a great day, on which God will vindicate his true people.[15]

그러고 나서, 비슷한 맥락에서, 라이트는 "칭의는 로마서 3장 24-26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참된 언약의 가족의 일원들로 밝혀진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물론 그들의 죄가 사 하여졌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이 언약의 목적이다"라며 반박한다.
Again, along similar lines, Wright contends that “‘justification,’ as seen in [Romans] 3.24-26, means that those who believe in Jesus Christ are declared to be members of the true covenant family; which of course means that their sins are forgiven, since that was the purpose of the covenant.”


그는 계속하여 "복음은 '믿음에 의한 칭의'가 아니라 예수에 관한 소식이기에, 하나님의 의, 즉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을 나타내는 것이다"고 결론 내린다.

He goes on to conclude that “the gospel—not ‘justification by faith,’ but the message about Jesus—thus reveals the righteousness, that is, the covenant faithfulness, of God.”[16]  


이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칭의에 관한 전통적 개혁주의의 해석과는 매우 다른 것이다.

This, as one can see, is very different from the traditional Reformation reading of Paul on the subject of justification.


라이트는 자신이 다양한 관점들에 대한 전통적 해석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데, 특히 율법의 행위와 관계된 칭의와, 로마 카톨릭과 개혁주의 간의 논쟁에 관하여 더욱 그러하다.

Wright is clear to point out his disapprobation for the traditional reading at various points, especially as justification relates to the works of the law and the debate between Roman Catholicism and the reformers.


율법의 행위

The works of the law

상세한 부분까지는 아니지만, 라이트는 자신이 "율법의 행위"라는 문구의 의미를 분석하는데 있어서 던을 따르고 있다.
Though not in every detail, Wright follows Dunn in his analysis regarding the meaning of the phrase, ‘the works of the law.’  


라이트는, 바울이 어리석은 율법주의를 언급하고 있다고 믿지 않으며, 그 대신에 유대인들이 할례나 안식일의 준수와 같은 문화를 만드는 것에 대하여 언급하고있다고 믿고있다.

Wright does not believe that Paul refers to crass legalism but instead to the cultural markers of the Jews—circumcision and Sabbath observance.


라이트는 갈라디아의 삶의 환경을 조사하는 가운데서, 그는 바울의 강론의 문제가 이방인 회심자가 할례를 받아야하는지 아닌지에 대한 것이었다고 기록하고있다.

In Wright’s examination of the sitz im leben in Galatia , he writes that the problem Paul addresses is whether his ex-pagan converts be circumcised or not?  


이제는 이러한 질문이 결코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 혹은 루터나 에라스무스가 직면했던 문제와는 전혀 관계없다(는 것이다).

Now this question is by no means obviously to do with the questions faced by Augustine and Pelagius, or by Luther and Erasmus.  


누구든지 해석에 있어서, 특히 1세기 상황 안에서, 이것은 분명히 “당신은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 즉 그들이 유대 민족이라는 표식으로 규정될 것인지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규정될 것인지-을 규정할 것인가?” 라는 질문에 관계되는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On anyone’s reading, but especially within its first-century context, it has to do quite obviously with the question of how you define the people of God: are they to be defined by the badges of Jewish race, or in some other way?  


할례는 '도덕적' 주제가 아니며; 이는 도덕적 노력이나 선한 행실로 구원을 얻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Circumcision is not a ‘moral’ issue; it does not have to do with moral effort, or earning salvation by good deeds.  


더군다나 우리는 그것을 단순히 종교적인 의식으로만 취급할 수는 없는 것이며, 그것은 모든 종교적 의식을 내적인 펠라기우스적 선행으로 지명해버리는 것으로서, 결과적으로는 갈라디아에 펠라기우스를 주된 대적으로 가만히 가지고 들어오게 된다(는 것이다).

Nor can we simply treat it as a religious ritual, then designate all religious ritual as crypto-Pelagian good works, and so smuggle Pelagius into Galatia as the arch-opponent after all.[17]

라이트의 주장은, 율법의 행위가 바울이 그들이 구원을 얻으려고 한 유대 백성들의 시도로 취급했던 것이 아니라고 한, 던의 확신과 평행을 이루고있다.

Wright’s contention parallels Dunn’s belief that the works of the law were not the attempt of the Jewish people with whom Paul dealt to earn their salvation.  


다시 말하면 라이트의 분석은, 개신교의 해석이 어거스틴-펠라기우스 논쟁을 바울의 저술에 도입하였다는 주장으로 가득하다.

Once again, Wright’s analysis is replete with the allegation that Protestant exegetes have imported the Augustine-Pelagius debate into Paul’s writings.  


더군다나 라이트의 주장은, 바울을 이러한 이방의 주제에 오염시킴으로서, 개신교와 카톨릭 양쪽 다 칭의 교리를 연합보다는 논쟁의 무기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Moreover, by contaminating Paul with these alien issues, argues Wright, both Protestants and Catholics have used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as a weapon of polemics rather than ecumenism.  


라이트는 갈라디아서에서 처음으로 바울이 가지고 있는 칭의를 크게 노출시킨 것이라고 말한다.

Wright states that Galatians offers the first great exposition of justification in Paul.  


그 장(갈라디아서)에서 주제의 핵심은, 앉아서 함께 먹도록 허락된 그리스도인이 누구냐에 대한 질문이라는 것이다.

In that chapter, the nub of the issue was the question, who are Christians allowed to sit down and eat with?  


바울에게 있어서, 유대 그리스도인이 이방 그리스도인과 함께 먹는 것이 허락 되었는지에 대한 질문이었다(는 것이다).

For Paul, that was the question of whether Jewish Christians were allowed to eat with Gentile Christians.


종교 개혁과 반 개혁 전통 양쪽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칭의 교리를 논쟁의 중심으로 다루면서, 그리고 이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을 얻게 하는 체계를 기술한 것이라는 가정에 의하여, 자신들과 교회를 상당히 학대를 하였었다(는 것이다).

Many Christians, both in the Reformation and the counter-Reformation traditions, have done themselves and the church a great disservice by treating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as central to their debates, and by supposing that it described the system by which people attained salvation.  


그들은 이 교리를 대적하는 쪽으로 돌아섰다(는 것이다).

They have turned the doctrine into its opposite.  


칭의는 예수를 믿는 이들 모두가, 그들의 문화적, 인종적 차이가 어떠하든 간에, 같은 테이블에 속하여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데, 상당히 많은 교파적 분파들과, 그리고 한 교파에서의 실제적인 분파들에서도 교리보다는 문화로 결론지어지는 것을 직면하여야 할 것이다(고 말한다).

Justification declares that all who believe in Jesus Christ belong at the same table, no matter what their cultural or racial differences and, let’s face it, a good many denominational distinctions, and indeed distinctions within a single denomination, boil down more to culture than to doctrine.  


잘 생각해보면, 예수를 믿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칭의 자체에 세부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감사함으로 교제하는 것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는 것이다).

Because what matters is believing in Jesus, detailed agreement on justification itself, properly conceived, isn’t the thing which should determine eucharistic fellowship.[18]

그러면, 칭의에 대한 라이트의 관점을 요약해보도록 하자.
So, then, let us move to summarize Wright’s views on justification.

(톰 라이트의 칭의) 요약
Summary

라이트에 의하면 바울에 관한 종교 개혁의 해석은 필연적으로 적절한 기회를 놓친 것이나 다름없다.
The Reformation reading of Paul has essentially missed the proverbial boat, according to Wright.  


(라이트에 의하면) 종교 개혁으로 되돌아가는 개신교의 해석은 어거스틴-펠라기우스 논쟁을 갈라디아와 로마의 환경에 도입한 것이다.

Protestant exegetes going back to the Reformation have imported the Augustine-Pelagius debate into the sitz in leben in Galatia and Rome .  


바울은, 행함의 의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대하여 설명하기보다는, 의, 혹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 그리고 그의 언약 백성의 정체성을 입증하는 칭의 교리를 말하는 것이다(라고 라이트는 말한다).

Rather than expounding works righteousness vs. faith in Christ, Paul sets forth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which demonstrates the righteousness, or covenant faithfulness of God, and the identity of His covenant people.  


자 이제 다음 단계인 존 칼빈의 칭의 교리를 탐구하며 둘러보기로 하자.

Now, let us proceed to the next stage of our investigation and survey the writings of John Calvin on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칼빈이 말하는 칭의

Calvin on Justification

하나님의 의
The righteousness of God


톰 라이트와 칼빈을 제대로 비교하기 위해서, 우리가 라이트의 이해를 탐구하였던 것과 같은 주제를 따라서 칼빈의 칭의 교리를 계속 탐구해보도록 하자.
To see a good comparison between N. T. Wright and Calvin let us proceed to examine Calvin’s doctrine of justification along the same issues that we examined Wright’s understanding.[19]  


이러한 탐구는 두 신학자들 간에 비교하고 대조하는 일을 편리하게 할 것이다.

This examination will facilitate the task of comparison and contrast between the two theologians.  


그러므로 우선 '하나님의 의'라는 문구에 대한 칼빈의 이해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보기로 하자.

Let us therefore turn our attention, first, to Calvin’s understanding of the phrase, the righteousness of God.  


우리가 이 잘 알려진 문구를 볼 수 있는 로마서 1장17절에 대하여 칼빈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In Calvin’s treatment of Romans 1.17 where we find this well-known phrase he writes: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이것은 하나님의 법정에서 인정되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것이 사람의 의견에 있어서 의로 계산되고 여겨지는 것으로서, 이것이 비록 단순히 사소한 것일지라도,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의'라고 언급되는 것이다.
By the righteousness of God I understand that which is approved at His tribunal, as on the other hand that which is reckoned and counted as righteousness in the opinion of men, even though it is a mere triviality, is generally referred to as the ‘righteousness of men’.


그러나 바울은, 성령이 도처에서 앞으로 올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의가 말하여지리라는 많은 예언들을, 의심하지 않고 언급하고있다.

Paul, however, is without doubt alluding to the many prophecies in which the Spirit is throughout setting forth the righteousness of God in the future kingdom of Christ .  


일부 주석가들은 이 의미를 '하나님에 의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설명한다.

Some commentators explain the meaning to be ‘what is given to us by God.’  


나는 분명히 그 단어가 이러한 뜻을 가지고 있다는데 동의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복음으로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며, 이로서 우리를 구원하기 때문이다.

I certainly grant that the words will bear this meaning, because God justifies us by His Gospel, and thus saves us.  


그리고, 비록 나는 질문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을 지라도, 아직은 전자의 뜻이 나에게는 좀 더 적합한 것 같다.

And yet the former sense seems to me more suitable, although I would not spend much time on the question.  


일부 학자들이 이러한 의가 값없는 죄사함 뿐 아니라, 또한 부분적으로는 거듭남의 은혜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더욱 중요한 것이다.

It is of more importance that some scholars think that this righteousness consists not only in the free remission of sins, but in part also the grace of regeneration.


그러나 나는, 하나님께서 값 없이 우리를 자신에게 화목케 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생명으로 회복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이는 후에 우리가 적절한 곳에서 더욱 길게 살펴보게 될 것이다.

I hold, however, that we are restored to life because God freely reconciles us to Himself, as we shall later show at greater length in the proper place.[20]

이제 우리에게는 이러한 중요한 문구에 대하여 칼빈이 말하는 것을 주목하는 일 뿐만이 아니라 이를 라이트 자신의 분석과 비교해보는 것도 중요하다.
Now, it is important that we note not only what Calvin says about this important phrase but also the contrast with Wright’s own analysis.  


라이트가 '하나님의 의'를 주관적이고 소유의 격, 즉 하나님께 속하여있는 속성으로 이해하는 것과는 달리, 칼빈은 이것을 객관적이거나 혹은 기원의 속격으로 이해한다.

Unlike Wright, who reads the ‘righteousness of God’ as a subjective or possessive genitive, i.e., a quality that belongs to God, Calvin reads it as either an objective or genitive of origin.  


달리 말하자면, 하나님의 의는 사람에게 주어진 어떠한 것이라는 말이다.

In other words, the righteousness of God is something that is given to man.  


칼빈은 하나님의 의가 죄 사함과 거듭남의 은혜를 가져온다고 말한다.

Calvin notes that the righteousness of God brings the remission of sins and the grace of regeneration.  


라이트에서와 마찬가지로, 칼빈의 칭의 이해에는 중요한 것들이 내포되어있다.

This, just as with Wright, has important implications for Calvin’s understanding of justification.

칼빈이 칭의를 정의할 때, 그는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로운 사람으로 기쁘시게 받으시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이 죄사함과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된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한다"라고 기록하고있다.
When Calvin defines justification he writes that it is “the acceptance with which God receives us into his favor as righteous men.  And we say that it consists in the remission of sins and the imputation of Christ’s righteousness.”[21]  


우리는 칼빈이 칭의를 정의할 때 죄 사함의 주제를 반복하고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We see in Calvin’s definition of justification the repeated theme of the remission of sins.  


그리고 또한 칼빈이 거듭남의 은혜를 가져오는 하나님의 의를 설명할 때, 그는 은혜를 얻는 수단으로서 전가를 조건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We also see that when Calvin explained that the righteousness of God brings the grace of regeneration that he specifies the means of obtaining that grace—namely, imputation.  


전가라는 개념은 라이트가 거부하고있는 개념이다.

The idea of imputation is a concept that Wright rejects.


라이트와는 대조적으로 칼빈은, 만약에 하나님께서 무죄 판결과 용서로  우리를 의롭게 하지 않으신다면, 바울이 언급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셔서 세상을 자신에게 화목케하시고, 그것들에 대항하는 반역을 전가시키지 않으신다'는 의미가 무엇이겠는가?

In contradistinction to Wright, Calvin argues that if God does not justify us by acquittal and pardon, what does Paul’s statement mean: ‘God was in Christ, reconciling the world to himself, not imputing men’s trespasses against them’?  


'우리를 위하여 우리가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도록  죄를 짓지 않으신 그를 죄 가운데 놓으셨다.'

‘For our sake he made him to be sin who had done no sin so that we might be the righteousness of God in him.’


첫째로 내가 결론 내린 것은, 그들이 하나님과 화목한 의로 여김을 받았다는 것이다.

First, I conclude that they are accounted righteous who are reconciled to God.  


칭의가 고발와 대립이 된다는 다른 문장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용서에는 의롭다고 하시는 것의 의미가 포함된다.

Included is the means: that God justifies by pardoning, just as in another passage justification is contrasted with accusation.  


이러한 대립이 분명히 보여주는 것은, 이러한 표현이 법적인 용법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이다.

This antithesis clearly shows that the expression was taken from legal usage.  


건전한 사고를 가지고 있으면서 히브리어에 적절하게 능숙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문구가 이러한 근원에서 나왔고 그것으로부터 그것의 경향과 함의를 도출해 낸다는 사실을 무시하지는 않는다.

Anyone moderately versed in the Hebrew language, provided he has a sober brain, is not ignorant of the fact that the phrase arose from this source, and drew from it its tendency and implication.


'범죄 함이 사함을 받은 자는 복이 있다'고 말한 다윗의 말을 기술함으로서, 바울은 행함이 없는 의를 말하고 있다.

Where Paul says that righteousness without works is described by David in these words, ‘Blessed are they whose transgressions are forgiven.’[22]

우리는 라이트와 칼빈간의 차이를 다시 한번 주목해야 한다.
Once again we should notice the distinctions between Wright and Calvin.  


라이트는, 하나님께서는 칭의에 대한 법정적 판결을 하신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종말론적으로 누가 자신의 언약 백성에 속하였는지를 명확히 하신다는 것이다.

For Wright, God does make a forensic declaration in justification—namely, God eschatologically defines who belongs to His covenant people.  


라이트는 이것이 죄의 용서를 포함하고 있다고는 말하지만, 이것이 이루어지는 방법에 대해서는 명확히 규명하고 있지는 않다.  

Wright says that this includes the forgiveness of sins, but he does not specify the way in which this is accomplished.  


이와는 대조적으로, 칼빈은 칭의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깨끗하고 의롭다고 명확히 밝히는 법정에서의 선언이라고 말한다.

By contrast, Calvin argues that justification is a forensic declaration where God declares a sinner pure and righteous.  


그는 자신의 논의를, 고린도후서 5장 19-21절을 논하면서, 법정에서의 범죄함과 무죄함의 판결의 선언 사이에 존재하는 것과 병행되는 것을 근거로한다.

He bases his argument on 2 Corinthians 5.19-21 and the parallel that exists between the declaration of a guilty or innocent verdict in a court room.


칼빈과 라이트 사이의 대조는 분명하다.

The contrast between Calvin and Wright is evident.  


이는 다른 주제를 탐구하도록 만든다.

This leaves one other issue to be explored.  


말하지만, 칼빈이 "율법의 행함"이라는 문구를 어떻게 이해를 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Namely, what understanding does Calvin give to the phrase ‘the works of the law?’


율법의 행위
The works of the law

칼빈은 로마서 3장27-28절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사람이 어떠한 방법을 통해서 구원을 얻는다거나 공로에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의 가능성을 배제한다.
In Calvin’s treatment of Romans 3.27-28 he excludes the possibility that man can in anyway earn or merit salvation.  


라이트와는 대조적으로, 칼빈은 필연적이고 일치적인 공로에 대한 논쟁이었던 그의 시대에 유행하였던 논쟁을 제안한다.

In contrast to Wright, yes, Calvin does invoke a debate that was current in his day—the debate over condign and congruent merit.  


물론 이것은 칼빈이 거절하는 구분점이다.

This is, of course, a distinction that Calvin rejects.  


그는 단지 이 주제를 간단히 언급하고서 직접 분석에 들어간다.

He only briefly mentions this issue and then moves forward in his analysis.  


만약에 율법이 우리 모두를 죽음에서 구한다면, 그것(율법)에서 나오는 것이 무슨 영광이 있겠느냐고 칼빈은 말한다.

Calvin writes that if the law delivers us all over to death, what glory shall we get out of it?  


그것(율법)은 오히려 우리에게서 모든 영광을 빼앗고서 우리를 수치스럽게 하지 않는가?

Does it not rather deprive us of all glorying, and cover us with shame?  


그(칼빈)는, 우리의 죄가 율법의 판단에 의하여 노출되었는데, 이는 우리 모두가 그것을 지키는 것을 멈추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He showed then that our sin is laid open by the judgment of the law, because we have all ceased to observe it.  


그는 여기서, 만약에 의가 행위의 율법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우리의 자랑은 배제되지 않을 것이지만; 오직 믿음에 의한 것이라면, 우리 자신에 대하여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으며, 믿음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이기에, 오직 원함의 겸손한 고백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있다.

He means here that if righteousness consisted in the law of works, our boasting would not be excluded; but since it is by faith alone, there is nothing that we can claim for ourselves, for faith receive all from God, and brings nothing except a humble confession of want.  


믿음과 행함 사이의 이러한 대비가 조심스럽게 인식되어야 할 것은, 행함이 어떠한 더함도 없이 보편적으로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This contrast between faith and works should be carefully noticed, for works are mentioned here universally without any addition.  


그러므로 그는 의식의 준수, 특히 외적인 행함 만이 아니라, 상상 할 수 있는 행함의 공로 모두를 포함하여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He is therefore speaking not of ceremonial observances alone, nor specifically of external works, but includes all the merits of works which can possibly be imagined.[23]

이제 이 점에 관하여는 라이트와 칼빈 간의 대조가 다시 명백히 드러난다.
Now, the contrast between Wright and Calvin on this point is again evident.  


라이트는 율법의 행함이 할례나 안식일의 준수와 같은 문화적 경계를 만드는 것들을 언급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는데 반하여 칼빈은 이것이 인간의 노력에 대한 전반적인 언급이라고 믿고 있다.

Wright believes that the works of the law refer to those cultural boundary markers such as circumcision and Sabbath observance whereas Calvin believes that it is a general reference to human effort.  


이제 우리가 칼빈과 라이트에 대하여 시작하면서, 두 입장 사이의 대조를 기록하는 동안, 우리는 차이를 분석하고서 바울에 대한 종교 개혁의 해석에 대한 라이트의 주장이 과연 어떠한 가치가 있는지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Now that we have set forth both Calvin and Wright on these points, while noting the contrasts between the two positions, we can analyze the differences and determine whether there is any weight to Wright’s claims regarding the Reformation reading of Paul.



라이트의 주장에 대한 분석

Analysis of Wright’s Claims

훈련 받지 않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라이트와 칼빈 사이에는 칭의 교리에 대한 상당한 정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ven to the untrained eye, one can notice that there is a great degree of divergence between Wright and Calvin on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더군다나 칼빈이 카톨릭에서의 ‘당연함과 일치의 공로’에 대한 논쟁을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은, 최소한 칼빈을 포함하여 개혁주의자들이 바울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이방인의 개념을 들여왔다는 라이트의 주장에 어느 정도 신뢰를 부여해주는 것으로 보이기도한다.

Moreover, the fact that Calvin does mention the debate with Catholicism over condign and congruent merit appears to lend some credence to Wright’s claim that the reformers, at least Calvin, imported foreign ideas into their exegesis of Paul.  


1세기를 염두에 두고 바울을 해석하기보다는 그들(종교개혁자들)은 자신들의 16세기 주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어거스틴-펠라기우스를 자신들의 해석의 지식으로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Rather than exegete Paul with the first-century context in mind they had their own sixteenth-century issues by way of the Augustine-Pelagius debate informing their exegesis.  


하지만 바울에 대한 칼빈의 해석을 좀 더 깊이 파고들거나 라이트의 주장을 조심스럽게 분석해보면, 라이트의 비평이 틀렸다는 것이 나타날 것이다.

A careful analysis of Wright’s claims as well as delving more deeply into Calvin’s treatment of Paul, however, will reveal that Wright’s critique is incorrect.  


더군다나 이것은 칭의에 대한 라이트 자신의 해석의 결함들을 보여줄 것이다.

Moreover, it will reveal the shortcomings of Wright’s own interpretation of Paul on justification.  


우리는 몇몇 일반적 관찰을 통해서 라이트의 주장을 분석할 것이며, 그 다음에 칼빈의 바울 해석의 특징들을 깊이 파고들 것이다.

We will begin the analysis of Wright’s claims with some general observations and then delve into the specifics of Calvin’s exegesis of Paul.

라이트의 방법론에서의 결함들
Deficiencies in Wright’s methodology


우리가 라이트의 바울에 관한 종교개혁 해석에 대한 비판적 논평을 살펴보게 될때, 일차적 자료로서의 일부 참고 문헌에 심각한 결함이 있음을 보게 된다.
When we survey Wright’s critical statements of the Reformation interpretation of Paul there is a striking absence of any reference to primary sources.  


예를 들면 그의 "바울이 실제로 무엇을 말했는가"에서, 우리는 라이트가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칭의 교리에 대한 탐구를 그대로 인용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맥그래스가 말하기를:

For example, in his What Saint Paul Really Said, we find Wright approvingly cite Alister McGrath in his survey of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McGrath writes:

칭의 교리는 그 성경적 기원과는 상당히 무관하게 의미가 발전되었으며,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확립되는 수단으로서 관여하게 된 것이다. 교회는 칭의를 곡해시키면서 사람이 하나님과 화목케하는 논의에 포함시키기를 선택하면서, 이로 인하여 신약 성서에 심각하게 결함이 있는 개념을 강조하게된 것이다. '칭의 교리'는 바울의 기원과는 매우 무관한 교리 신학 안에서의 의미를 낳게 된 것이다.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has come to develop a meaning quite independent of its biblical origins, and concerns the means by which man’s relationship to God is established.  The church has chosen to subsume its discussion of the reconciliation of man to God under the aegis of justification, thereby giving the concept an emphasis quite absent from the New Testament.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has come to bear a meaning within dogmatic theology which is quite independent of its Pauline origins.[24]


맥그래스가 옳은지는 핵심이 아니다; 그(맥그래스)는 자신의 진술을 명백하게 일차적 자료에 근거를 두고있지만, 라이트는 그렇지 않다.
Whether McGrath is correct is beside the point; he has based his statement upon primary source evidence, whereas Wright has not.  


라이트는 어디에서 바울에 관한 전통적 해석이 잘못되었는지, 혹은 어디에서 개혁주의자가 어거스틴-펠라기우스 논쟁을 본문에 곡해하였는지를 증명하는 어떠한 일차적 근원 자료도 언급하고있지 않다.

Wright does not cite any primary source material to demonstrate where the traditional exegesis of Paul is wrong or where the reformers have eisegeted the Augustine-Pelagius debate into the text.[25]  


이것은 새관점 지지자들 가운데 드문 경우가 아니다.

This is not uncommon among advocates of the new perspective.

예를 들어서, 마틴 루터에 대한 던의 비평의 경우를 보면, 그는 루터가 자신의 회심에서의 근심으로 자신이 로마서 7장의 해석을 곡해 하였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일차적 근원에 대하여 언급을 하지 않는다.
In Dunn’s critique of Martin Luther, for example, he does not cite primary sources to substantiate the claim that Luther eisegeted his own conversion anxieties into his interpretation of Romans 7.


이러한 책망을 입증하기 위하여, 던은 루터의 저작들을 직접 인용하지 않고, 대신에 Roland Bainton의 루터의 생애를 인용하고 있다.

To substantiate this charge, Dunn cites Roland Bainton’s biography of Luther, not Luther’s writings directly.[26]  


이것은, 최소 한도로 말하자면, 결함이 있는 방법론이다.

This, to say the least, is defective methodology.  


입장에 대하여 동의하지 않는 것은 분명히 책임 있는 학문의 영역 안에 있어야 하지만, 증거를 떠난 비판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To disagree with a position is certainly within the realm of responsible scholarship, but to critique apart from evidence is unacceptable.  


라이트는 일차적 자료와 그것의 역사적 환경을 살펴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왜곡에 대한 주장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이것들은 어떠한 실제적 토대로부터 떠나서 공중에 매달려있는 것이다.

Because Wright does not examine primary sources and their historical setting, his claims of distortion lack cogency; they are suspended in mid-air apart from any factual foundation.


예를 들어, 칼빈이 로마서를 해석한 것의 역사적 문맥을 보게되면, 우리는 그가 단순히 성경을 곡해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Let us turn to the historical context of Calvin’s exegetical work on Romans, for example, so that we may see that he was not simply eisegeting Scripture.

칼빈이 로마서의 주석을 기록했을 때의 16세기 환경을 조사해보면, 라이트의 주장을 누그러뜨리는 고려해야 할 많은 요소들이 있다.
When we survey the sixteenth-century milieu in which Calvin wrote his commentary on Romans, there are many factors to consider that mitigate Wright’s claims.  


David Steinmetz에 따르면 16세기에는 로마서 주석을 발간한 루터교, 개혁주의, 카톨릭, 근본주의 신학자들이 70인이 넘었다고한다.

David Steinmetz notes that in the sixteenth century there were over seventy Lutheran, Reformed, Catholic, and Radical theologians who published commentaries on Romans.  


여기에 더하여 한줌의 중세 작품은 물론 오리겐으로부터 암브로시에스터에 이르기까지  부분적이거나 완전한 교부 저자들의 주석이 있었다.

In addition to this, there were partial or complete commentaries by Patristic authors from Origen to Ambrosiaster as well as a handful of medieval works.  


칼빈이 모든 유용한 로마서 주석을 참조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작업은 이러한 작품의 내용들과 상호 관련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While Calvin did not consult all of the available commentaries on Romans, his work certainly reflects interaction with this body of literature.[27]

예를 들면, 칼빈은 로마서4장에서 아브라함을 분석하면서 비느하스와 동정녀 마리아를 언급을 하는데, 이는 그가 "자신이 저자가 아니라는 해석학적 전통과 자신이 모든 다른 면에 있어서 격렬하게 경쟁적으로 고백적인 충실들을 표현하는 해석자들과 공유하는 해석학적 전통"을 반복하여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 자신은 비느하스뿐만 아니라 동정녀 마리아도 언급하고있지않다.
For example, Calvin mentions Phinehas (Rom. 4.6) and the Virgin Mary (Rom. 4.20) in his analysis of Abraham in Romans 4 because he is repeating “exegetical traditions of which he is not the author and which he shares with interpreters who represent in all other respects fiercely competing confessional loyalties.  Paul himself mentions neither Phinehas nor the Virgin Mary.”[28]  


달리 말하면, 칼빈은 해석을 위하여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 간의 유명한 신학적 논쟁보다도 오래된 1500년 정도 뒤로 돌아가야만하는 해석학적 논쟁에 참여하고있었다.

In other words, Calvin was participating in an exegetical discussion that went back some fifteen-hundred years to exegetes that ante-dated the famous theological debate between Augustine and Pelgaius.  


칼빈은 바울에 있어서 단순하게 어거스틴-펠라기우스 논쟁을 곡해한 것이 아니다.

Calvin was not simply eisegeting the Augustine-Pelagius debate into Paul.  


이것만이 라이트가 자신의 분석에 있어서 분해하는데 실패한 유일한 역사적-상황적 주제는 아니다.

This is not the only historical-contextual issue that Wright fails to factor in his analysis.

새관점 지지자들은 자신들의 입장의 상당 부분을 1세기 유대교 문헌 위에 구축하고 있다.
The advocates of the new perspective make a large part of their case on the literature of first-century Judaism.  


신학적 환경의 특성을 보여주는 1세기 유대교의 문헌들과 함께, 새관점 옹호자들은 이러한 문헌이 전통적으로 유지되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그림을 보여주고있다고 주장한다.

With the documents of first-century Judaism illuminating the nature of the theological milieu, new perspective advocates argue that this literature reveals a totally different picture than is traditionally held.  


바울 시대의 유대인들은 어리석은 율법주의자들이 아니라 은혜를 옹호하는 이들이었으며; 그들은 단지 자신들의 문화적 정체성을 보호하기 위하였다는 것이다.

The Jews of Paul’s day were not crass legalists but were advocates of grace; they were simply out to protect their cultural identity.  


예를 들면, 샌더스는 타나이트 문헌, 사해사본, 외경, 그리고 위경을 조사하여서 자신의 결론에 도달하는데 이는 톰 라이트가 일반적으로 동의하는 결론들이다.

Sanders, for example, surveys the Tannaitic literature, the Dead Sea Scrolls, Apocrypha, and Pseudepigrapha to reach his conclusions—conclusions with which Wright generally agrees.[29]

그렇다, 사실은 칼빈을 포함하여 개혁주의자들은 이러한 방대한 문헌의 실체를 조사하지 않았다; 실은 이들은 사해 사본이 수백년간 발견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어떠한 문헌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Yes, it is true that the reformers, Calvin included, did not survey this vast body of literature; indeed, they could not have explored some of the literature seeing that the Dead Sea Scrolls would not be discovered for hundreds of years.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개혁주의자들이 1세기 유대주의의 흐름을 무시하였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Nevertheless, this does not mean that the reformers were nescient of the rhythms of first-century Judaism.  


새관점 옹호자들은 개혁주의자들이 신구약 중간기의 유대교 문헌인 외경에 친숙해있었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는다.

The advocates of the new perspective do not take into consideration that the reformers were familiar with the writings of the apocrypha—the writings of inter-testamental Judaism.  


예를 들면, 칼빈은 외경이 다양한 로마 카톨릭 교리를 뒷받침하는데 사용되는 것에 대하여 관여하고 있었다.

For example, Calvin interacted with the apocrypha in response to its use in support of various Roman Catholic doctrines.  


예를 들면, 칼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For example, Calvin writes:

그는 죽은 이를 위하여 예루살렘에 제물을 보냈을 때 유다의 경건이 칭송을 받은 것은 무엇보다도 그가 마지막 부활에 대한 견고한 희망을 가지고있었다는 것이다.
The piety of Judas is praised for no other distinction than that he had a firm hope of the final resurrection. When he sent an offering for the dead to Jerusalem.


그 당시의 역사 기록자가 유대의 행동을 구속의 가치에서가 아니라, 그것을 그들이 나라와 지역을 위하여 죽은 남아있던 신자들의 영원한 삶을 공유하기 위하여 한 것으로 여긴 것이다.

Nor did the writer of that history set down Judas’ act to the price of redemption, but regarded it as done in order that they might share in eternal life with the remaining believers who had died for country and religion.  


이러한 행동은 미신이나 잘못 판단한 열심이 없이 나온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율법의 희생을 우리에게까지 확장하려는 이들이 어리석다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강림으로 인하여 이를 우리가 알았을 때는 무엇이 사용되기를 멈추어야하겠는가?

This deed was not without superstition and wrongheaded zeal, but utterly foolish are those who extend the sacrifice of the law even down to us, when we know that by the advent of Christ what was then in use ceased.[30]

칼빈은 1세기 유대교가, 최소한 이것이 외경을 통해서 온 것과 같이, 미신적 의식을 포함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다.
Calvin recognizes that first century Judaism, at least as it comes through the apocrypha, contained superstitious practices.  


그래서, 외경으로부터의, "하나님 우리의 주시여, 우리가 당신께 자비를 구하는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조상이나 혹은 우리의 왕의 어떤 의로운 행동으로부터 기인한 것이 아닙니다"와 같은 말에 관하여 칼빈은 "그것들은 매우 진실되고 거룩한 말들"이라고 기록하고있다.

Yet, regarding the following words from the apocrypha, “For it is not because of any righteous deeds of our ancestors or our kings that we bring before you our prayer for mercy, O Lord our God” (Bar. 2.18; NRSV), Calvin can write that they are “very true and holy words.”[31]  


그러므로 칼빈은, 최소한 잠재적으로 1세기 유대교에서 새관점주의자들이 아마 '은혜의 지지자들'이라고 부를만한 정통주의 신학의 맥락이 있었음을 인식하고있었다.

Calvin, therefore, recognized, at least implicitly, that there were strands of orthodox theology in first century Judaism, what the new perspective advocates would perhaps call ‘proponents of grace.’  


그렇다고 이러한 맥락만이 칼빈이 친숙했던 것들은 아니었다.

Yet, these strands were not the only ones with which Calvin was familiar.  


그는 감히 말하자면 속성이 '펠라기우스적'이라고 할 수 있는 맥락에 대하여도 잘 알고있었다.

He was also familiar with those strands that were, dare one say, ‘Pelagian,’ in nature.

우리는 외경에서 다음과 같은 것도 읽는다: "만약에 당신이 선택한다면, 당신은 명령들을 지킬 수 있고, 충성스럽게 행동하는 것은 당신 자신이 선택할 일이다. 그는 당신 앞에 불과 물을 갖다 놓았으며, 당신이 선택하려는 것 아무 것에나 당신의 손을 뻗어라.  각 사람 앞에는 생명과 죽음이 놓여있으며 선택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나 주어질 것이다.
We read the following in from the apocrypha: “If you choose, you can keep the commandments, and to act faithfully is a matter of your own choice.He has placed before you fire and water; stretch out your hand for whichever you choose. Before each person are life and death, and whichever one chooses will be given” (Sir. 15.14-17, NRSV; Vg. 14-18).  


이러한 문구에 대하여 칼빈은 다음과 같이 반응한다:

To this passage Calvin responds:

사람이 창조시에 생명과 죽음을 취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았다고하자. 우리가, 그가 이러한 능력을 상실했다는 반대편에 답변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나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제대로 만드셨지만, 그는 자신을 위하여 많은 대책들을 고안하였다"고 분명히 밝힌 솔로몬에 부딪히려는 의도는 분명히 아니다.

그러나 사람이 자신의 타락으로, 자신 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소유 모두를 파선 시킨 원인을 제공했기에, 원래의 창조에 공헌 되었던 모든 것이 필연적으로 그의 붕괴되고 타락한 성품에 바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대적 뿐만이 아니라 Ecclesiasticus 자신에게도, 그가 누구이든 간에, 대답하겠는데: 만약 당신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 스스로가 구원을 얻으려는 능력을 찾도록 한다면, 우리는 당신의 권위가 최소 한도에서 의심 없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항하는 어떠한 편견도 증가시킬  정도로 높게 평가하지는 않을 것이다.
Granted that man received at his creation the capacity to obtain life or death.  What if we reply on the other side that he has lost this capacity?  

Surely it is not my intention to contradict Solomon who declares ‘that God made man upright, but he has sought out many devices for himself.’  But because man, in his degeneration, caused the shipwreck both of himself and of all his possessions, whatever is attributed to the original creation does not necessarily apply forthwith to his corrupt and degenerate nature.  Therefore I am answering not only my opponents but also Ecclesiasticus himself, whoever he may be: If you wish to teach man to seek in himself the capacity to acquire salvation, we do not esteem your authority so highly that it may in the slightest degree raise any prejudice against the undoubted Word of God.[32]

칼빈이 외경에서의 이러한 문구를 거절하는 이유는, Ecclesiasticus나 Sirach가 경정이 아닐 뿐만아니라 로마서 3장과 같은 성경의 증거에 반대되기 때문이다.
Calvin rejects this passage from the apocrypha not only because Ecclesiasticus, or Sirach, is not canonical but also because it contradicts the witness of Scripture, such as Romans 3.  


흥미로운 것은 외경으로부터의 이러한 문구는 새관점에서 다루어지지 않고있지만, 펠라기우스나 에라스무스 모두의 주의를 끌지 못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What is interesting is that this passage from the apocrypha goes untreated by the advocates of the new perspective, yet it does not pass by the attention of either Pelgaius or Erasmus.[33]  


그러므로, 16세기의 해석학은 1세기의 유대 문헌에 대한 지식이 없었지만, 이것의 맥락을 전적으로 몰랐던 것은 아니다.

So, while sixteenth-century exegetes were not as knowledgeable of first century Jewish literature, they were not totally unaware of its rhythms.  


이와는 반대로, 로마카톨릭교회와 종교개혁자간의 정경에 관한 다른 이론으로 인하여, 16세기 신학 논쟁은 외경이라고 불리우는 1세기 유대교의 문헌에 바로 연계되었다.

On the contrary, because of the different theories of canon between the Roman Catholic Church and the Reformation, sixteenth-century theological debate had a taproot straight into the literature of first century Judaism, namely the apocrypha.  


이제 우리가 이러한 일반적이고 상황적인 주제를 다루었으므로, 우리는 특별한 해석학적이고 신학적인 문제들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게되었다.

Now that we have covered these general historical-contextual issues, we can turn our attention to specific exegetical and theological matters.



특별한 해석학적 고찰들

Specific Exegetical Observations

앞서 라이트와 칼빈의 관점을 해설하면서 우리는 두 신학자 사이에 몇 가지 다른 점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In our previous exposition of the views of Wright and Calvin, we were able to detect some differences between the two theologians.  


우리는 비교되는 3가지 주요 분야를  끄집어냄으로서 작업해야 할 주요 골격에 도달하게 된다: (1) '하나님의 의'라는 문구의 해석; (2) 칭의의 속성; 그리고 (3) '율법의 행위'라는 문구의 의미.

We brought out three major areas of comparison to give us a framework in which to work: (1) the interpretation of the phrase ‘the righteousness of God;’ (2) the nature of justification; and (3) and the meaning of the phrase ‘the works of the law.’  


이제 우리는, 각각의 주제를 완전히 분해하여 논평하기를 원하지 않고, 다른 이들이 이것을 이미 하였기에, 우리는 칼빈의 해석학적 방법을 라이트의 것과 비교하면서 몇가지 관찰을 할 수 있을 것이다.

Now, while we do not want to enter a full-fledged dissection and refutation of each issue, as others have done this elsewhere, we can make some observations about Calvin’s exegetical method in contrast to that of Wright.[34]

"하나님의 의"라는 문구의 주제에 관해서, 우리는 바울이 하나님이 소유하신 도덕적 속성을 옮겨 받는 것, 즉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과 공유하는 무엇, 즉 칼빈이 말하는 법정적 칭의를 의미하는지 물어보아야한다.
Regarding the issue of the phrase ‘the righteousness of God,’ we must ask whether Paul means to convey a moral quality that God possesses, i.e., Wright’s covenant faithfulness of God, or whether it is something that God imparts to His people, i.e. Calvin’s forensic righteousness.  


물론 이러한 문구는 로마서1장 17절에서 볼 수 있고, 신약의 해석에 있어서 가장 논쟁이 되는 문구인 것이다.

This phrase, of course, is found in Romans 1.17 and is one of the most debated phrases in New Testament exegesis.[35]  


이 문구에 대하여 상세히 해석하는데 들어갈 수 없기에, 우리는 라이트가 침묵하는 곳에서 칼빈이 바울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While we can not enter into a detailed exegesis of this phrase we should note that Calvin echoes Paul where Wright is silent.  


라이트는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께 속한 배타적인 영역이라고 전한다.

Wright conveys that the ‘righteousness of God’ is exclusively a category that belongs to God.  


반면에 칼빈은, 이것이 하나님께 속하여있는 영역일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신자와 교통하는 것이라고 언급한다.

Calvin, on the other hand, notes that it is not only a category that belongs to God but that it is also something that God communicates to the believer.  


칼빈이 로마서3.26을 해석한 것을 보자.

Note Calvin’s comments on Romans 3.26:

이것은 그가 그리스도가 오셨을 때 나타난 의로 정의한 것으로서, 이것은 그가 1장에서 가르친 것과 같이 복음에 나타난 것이다.
This is a definition of that righteousness which he said had been revealed when Christ was given, and which, as he has taught us in the first chapter, is made known in the Gospel.


그는 이것이 두 부분으로 이루어졌다고 확신한다.

He affirms that it consists of two parts.  


첫번째는 하나님께서 의로우신 것은, 실제로 많은 것 중에 한 가지로서가 아니라, 본인 자신 안에 스스로 모든 의의 충만함을 가지고 계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The first is that God is just, not indeed as one among many, but as one who contains in Himself alone all the fullness of righteousness.  


그는 충만하고 완전한 찬양을 받으시는데 이는 그에게 마땅한 것이고 오직 하나님만이 홀로 의롭다는 이름과 영예를 얻으셨으나 인류 모두는 불의로 저주를 받는 것이다.

He receives the full and complete praise which is His due only as He alone obtains the name and honor of being just, while the whole human race is condemned of unrighteousness.  


다른 부분은 의의 소통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결코 자신의 풍성하심을 자신 안에만 가두어 놓으신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이것들을 인류에게 부어 넣으신다는 것이다.

The other part refers to the communication of righteousness, for God does not by any means shut His riches within Himself, but pours them forth upon mankind.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는, 그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의롭다고 하시는 한에서 우리 가운데 빛나시는데, 이는 만약에 믿음에 의한 즐거움이 없다면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를 위하여 헛되이 내어주신 것이다,

The righteousness of God, therefore, shines in us in so far as He justifies us by faith in Christ, for Christ was given in vain for our righteousness, if there were no enjoyment of Him by faith.  


이것으로부터 이어지는 것은, 하늘로부터 치료책이 그들에게 제공될 때까지는, 그들 안에서 모든 사람이 불의하고 상실되었다는 것이다,

It follows from this that in themselves all men are unrighteous and lost, until a remedy from heaven was offered to them.[36]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라는 문구가 배타적인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 즉 그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이라는 것은 바울이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진술하는데 있어서 고려되지 않고있다는 것이다. 그는 의로우시며 의롭게 하시는 분일 뿐만이 아니라 이러한 의는 믿음을 통하여 전달되는 것이다.
So, then, to argue that the phrase ‘the righteousness of God’ is exclusively a moral quality of God, i.e. His covenant faithfulness, does not take into account Paul’s statement that with the righteousness of God (dikaiosu,nh qeou/, dikaiosune theou) He is not only the just and the justifier (di,kaion kai. dikaiou/nta, dikaion kai dikaiounta) but that this righteouness is communicated through faith.


그러나 이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칼빈과 라이트 사이의 두번째 주제, 즉 칭의의 속성으로 인도한다.

This brings us, however, to the second issue between Calvin and Wright, namely the nature of justification.

중요한 것은 라이트가 로마서3장 26절이 하나님께서 의로우시며 의롭게 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언급하고있다는데 동의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한다.
It is important that we note that Wright would agree that Romans 3.26 does state that God is both the just and the justifier.  


그러나 칼빈과 라이트가 동의하지 않는 부분은 신자와 관계된 칭의의 속성에 관해서다.

Where Calvin and Wright, however, would disagree is on the nature of the justification in relation to the believer.  


우리는 라이트가, 칭의는 사람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에 속하여있음을 하나님께서 분명히 하는 것과, 이것이 시대의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궁극적인 종말론적 인정과 우선적으로 연결되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는 것을 이미 살펴보았다.

We have already seen that Wright believes that justification is God’s declaration that a person is part of His covenant people and that this is primarily tied in with the ultimate eschatological vindication of the people of God at the consummation of the age.  


다른 한편으로, 칼빈은 칭의가 그리스도의 의가 믿음을 통하여 신자에게 실질적으로 전가된다고 믿고있다.

Calvin, on the other hand believes that justification is the actual imputation of the righteousness of Christ to the believer through faith.

양쪽 신학자를 피상적으로 보게 된다면 우리에게 주의를 요구하는 여러가지 요소들이 나타나게 된다, 말하자면 칭의와 연관된 더 큰 교리적 주제들이다.
In the cursory exposition of the views of both theologians several factors emerge that demand our attention—namely the greater doctrinal issues that are connected with justification.  


성경의 교리들이 유기체적 전체의 일부라는 것을 관찰한 사람은 워필드였다; 맞다, 이들은 각자 논의 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이들은 서로에게서 분리 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It was B. B. Warfield who observed that the doctrines of the Bible are part of an organic whole; yes, they can be discussed individually but ultimately they can not be divorced from one another.[37]  


이것은 라이트와 칼빈의 입장 사이에서 두드러진 대비를 보여주는 것이다.

This is something that is a marked contrast between the positions of Wright and Calvin.

예를 들어, 그들 각자의 칭의에 대한 정의를 비교해보면; 우선, 라이트는 칭의를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정의하고있다:
For example, let us compare their respective definitions of justification; first, Wright defines justification in the following manner:


"1세기에서의 '칭의'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립할 것인가에 관한 것이 아니다. 이는, 미래와 현재에 있어서, 실제로 누가 자기 백성의 일원인가에 대한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정의인 것이다."

“‘Justification’ in the first century was not about how someone might establish a relationship with God. It was about God’s eschatological definition, both future and present, of who was, in fact, a member of his people.”[38]


다른 한편, 칼빈은 이것을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쁘시게 의로운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정의한다.

Calvin, on the other hand, defines it as the acceptance with which God receives us into his favor as righteous men.  


그리고 우리는 이것이 죄사함과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로 구성되어있다고 말한다.

And we say that it consists in the remission of sins and the imputation of Christ’s righteousness.”[39]  

두 사람 사이의 차이는 명백하다.
The divergence between the two men is evident.  


라이트의 정의는 신분에 관한 말로서, 누가 언약에 속하여있느냐, 혹은 달리 말하면, 라이트는 종말론으로부터 말하고있는 것이다.

Wright’s definition speaks of identity—who belongs to the covenant—or in other words, Wright speaks from ecclesiology.  


다른 한편, 칼빈은 죄, 의의 필요를 말하고있으며, 달리 말하면, 칼빈은 구원론으로부터 말하고있는 것이다.

Calvin, on the other hand, speaks about sin, the need for righteousness—or in other words, Calvin speaks from soteriology.


둘 사이에 결정적인 차이를 만드는 것은 라이트가 궁극적으로 구원론에 속하는 모든 논의를, 다른 교리적 고려로부터 실질적으로 분리 시키면서, 무시한다는 것이다,

What makes the critical difference between the two is that Wright virtually by-passes all discussions that pertain to soteriology effectively divorcing it from other doctrinal considerations.  


이와는 달리, 칼빈은, 둘이 서로 연결되어있는 것으로 알려진, 구원론과 교회론을 연결시키고있다.

Calvin, on the other hand, makes the connection between soteriology and ecclesiology knowing that the two are interconnected.  


우리는 각각의 저자들의 여러가지 예들을 통하여 이러한 점들을 볼 수 있다.

We can see this point by several examples from each writer.

예를 들어서, 그리스도의 사역에 있어서, 톰 라이트는, 예수가 구원론의 문제를 우선적으로 다루기 위하여 오시지는 않았다고 말한다.
For example, when it comes to the ministry of Christ, argues Wright, Jesus did not come to deal primarily with issues of soteriology.


차라리, 그리스도는 교회론적이고 종말론적인 문제들, 즉 어떻게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최종적 인정을 받을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있다는 것이다.

Rather, Christ presents ecclesiological and eschatological issues—namely, how to bring about the final vindication of God’s covenant people.  


라이트는,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우선적 목적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회개를 촉구하는 것인데, 이는 가벼운 각자의 죄들보다는 언약의 하나님이신 창조주에 대한 커다란 국가적 반역에 대한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Wright contends that Christ’s “first aim, therefore, was to summon Israel to ‘repent’—not so much of petty individual sins, but of the great national rebellion, against the creator, the covenant God.”[40]  


라이트에 따르면, 1세기 유대교에서는 궁극적인 칭의나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받거나 승리를 가져오는 것에 관한 3가지 주요 선택을 제공하는데: (1) 쿰란 공통체로의 분리, (2) 헤롯과 같이 로마에 정치적으로 합의를 하거나, 그리고 (3) 열심당의 군사적인 접근을 하는 것이다.

According to Wright, first century Judaism offered three main options for bringing about the ultimate justification, or vindication and victory, of the people of God: (1) the separatism of the Qumran community, (2) political compromise like Herod’s with Roman, and (3) the militaristic approach of the zealots.[41]  


이러한 선택들은 모두 하나님의 언약의 약속된 나라를 가져오는 것에 관한 그럴듯한 해석들이다.

These options were all specious interpretations of bringing about the promised kingdom of God ’s covenant.  


라이트는 다음과 같이 논한다

Wright argues that

그렇다면, 문제는 신앙이 아니라 종말론이며, 도덕성이 아니라 나라의 도래이다. 그리고 나라의 도래는 예수님께서 알리신 것과 같이, 그의 시대의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비망록으로 도전하게된다: 너의 전통에 근거한 너의 해석을 포기하라, 그것은 너를 파멸로 몰아갈 것이다. 대신에 전통과 매우 다른 해석을 수용하라, 그것은 비록 상실되는 방법인 것 같아 보일지라도, 사실 참된 승리의 길이다. 내가 제안하건대, 이것이 상징적 행동들로 채워질 때는 예수와 바리세인들 간의 열띤 논쟁을 유발할 것이며, 예수의 삶에 대항하는 음모를 낳게 될 것이다.
what mattered, then, was not religion but eschatology, not morality but the coming of the kingdom.  And the coming of the kingdom, as Jesus announced it, put before his contemporaries a challenge, an agenda: give up your interpretation of your tradition, which is driving you toward ruin.  Embrace instead a very different interpretation of the tradition, one which, though it looks like the way of loss, is in fact the way to true victory.  It was a challenge, I suggest, which when backed up by symbolic actions generated the heated exchanges between Jesus and the Pharisees and resulted in plots against Jesus’ life.[42]

라이트는, 예수와 바리세인 간의 충돌에 대하여 상세히 설명하기를 계속하면서, (예수와 바리세인 간의) 의견의 불일치는 그(예수)가 반율주의자이거나 혹은  그들(바리세인)이 행위에 의한 칭의를 믿은 것과는 달리 그 (예수)가 믿음에 의한 칭의를 믿은 것 때문이 아니고, 이스라엘에 대한 그의 나라의 비망록이 요구하였던 것은, 이스라엘이 자신의 황당한 피해망상의 자기 방어로부터 떠나서 조상의 법전들에 의해서 다시 강해져서, 세상의 빛과 땅에서의 소금이 되라는 소명을 대신 수용하라는 것에 관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Wright continues to elaborate the conflict between Jesus and the Pharisees and argues that the disagreement came about not because he was an antinomian or because he believed in justification by faith while they believed in justification by works but because his kingdom-agenda for Israel demanded that Israel leave off her frantic paranoid self-defense, reinforced as it now was by the ancestral codes, and embrace instead the vocation to be the light of the world, the salt of the earth.[43]

자 이제 어떻게 라이트가 죄와 구원론을 무시하는지, 그리고 오직 교회론과 종말론만을 언급하는지 알아보도록하자.
Now, notice how Wright by-passes discussion of sin and soteriology and makes reference only to ecclesiology and eschatology.  


(톰 라이트가 말하는) 회개는 단순히 언약과 종말론에 관계된 전통의 잘못된 해석을 버리는 것으로 구성되어있다.

Repentance simply constitutes abandonment of misinterpretation of the tradition as it relates to covenant and eschatology.  


(여기에는) 개인적인 도덕성, 죄, 그리고 구원론의 개념들이 결여되어있는데, 이는 칭의, 교회론, 그리고 종말론과 분리가 불가능하게 연결되어있다.

Absent are the concepts of personal morality, sin, and soteriology, which are inextricably linked with justification, ecclesiology, and eschatology.

다른 한편, 칼빈으로 돌아와서 보면, 라이트의 분석과는 대조적으로 칭의를 전체적으로, 그리고 유기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When we turn to Calvin, on the other hand, we see a full-orbed and organic treatment of justification in contrast to Wright’s analysis.  


예를 들면, 칼빈은 칭의가 다른 많은 교리들과 서로 얽혀있다고 말한다.

For example, Calvin argues that justification is intermeshed with a host of other doctrines.  


그는 "그리스도는 동시에 성화 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의롭다고 하시지 않으신다. 이러한 유익들은 영속적이고 분리시킬 수 없는 연합으로 연결되므로, 그가 자신의 지혜를 비추시는 이들을, 그가 구속하시며; 그가 구속하시는 이들을, 그가 의롭다고 하시며; 그가 의롭다고 하시는 이들을, 그가 깨끗하게 하신다."고 기록한다.

He writes that “Christ justifies no one whom he does not at the same time sanctify. These benefits are joined together by an everlasting and indissoluble bond, so that those whom he illumines by his wisdom, he redeems; those whom he redeems, he justifies; those whom he justifies, he sanctifies.”[44]  


비슷한 맥락에서 칼빈은 칭의의 여정을 펼치는데 이는 그가, 하나님께서는 우선 자신의 순수하고 값 없이 주시는 선으로 죄인을 감히 포용하신다고 말할 때, 그 (죄인)에게서는 비참한 상태 외에는 찾을 수 있는 것이 없기에 즉시 자비를 베푸실 수 밖에 없으시며, 이는 사람이 궁극적으로 헛되며 선한 행실이 없기 때문에; 그는 자신 안에서 사람을 유익하게할 근거를 찾으시는 것이라고 말한다.

Along similar lines Calvin lays out the order of justification when he says that God first deigns to embrace the sinner with his pure and freely given goodness, finding nothing in him except his miserable condition to prompt Him to mercy, since he sees man utterly void and bare of good works; and so he seeks in himself the reason to benefit man.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자신의 선하신 인식으로 어루만지시며, 그 자신의 행위에 대한 절망으로 인하여, 그의 구원을 전부 하나님의 자비에 근거하게 하신다.

Then God touches the sinner with a sense of his goodness in order that he, despairing of his own works, may ground the whole of his salvation in God’s mercy.  


이것은 믿음의 경험으로서, 이것을 통하여 죄인이 자신의 구원을 소유하게 되는데, 이때는 복음의 가르침을 통하여 자신이 하나님과 화목케 되었다는 것을 알게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의로서 중재를 하시고 죄를 용서하심으로서 그가 의롭게 된다는 것이다.

This is the experience of faith through which the sinner comes into possession of his salvation when from the teaching of the gospel he acknowledges that he has been reconciled to God: that with Christ’s righteousness interceding and forgiveness of sins accomplished he is justified.[45]

칼빈이 칭의를 라이트와 전혀 다른 축으로서 순환시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It is important that we notice that Calvin’s treatment of justification rotates on an entirely different axis than that of Wright.  


칼빈이 구원론, 거듭남, 믿음, 범죄, 회개, 그리고 성화의 문제를 어떻게 칭의와 연계시키는지 관찰해보라.

Notice how Calvin connects matters of soteriology, regeneration, faith, guilt, repentance, and sanctification, to justification.


더군다나 칼빈은 개별적인 신앙인을 강조하는데 반하여 라이트는 그렇지 않다.

Moreover, Calvin emphasizes the individual believer whereas Wright does not.  


그렇다면 칼빈은 공동체를 희생하면서까지 개인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단 말인가?

Does Calvin, however, over-emphasize the individual at the expense of the corporate body?

첫 번째로, 칼빈은 자신의 칭의 교리에서 공동체를 희생하면서까지 개인을 강조하지는 않는다.
First, Calvin does not emphasize the individual at the expense of the corporate body in his doctrine of justification.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칼빈은 전체로서의 교리가 유기적임을 인식하고있다.

As previously stated, Calvin recognizes that doctrine as a whole is organic.  


모든 이들이 하여야 할 것은, 칼빈이 보이지 않는 교회를, 예를 들면,  칭의를 받은 사람들인 "하나님의 선택된 모두"로 정의 하면서 만든 연결들을 보아야 하는 것이다,

All one must do is see the connections Calvin makes, for example, with his definition of the invisible church as “all God’s elect,” which are those  who receive justification.[46]

이러한 개념은 우리가,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근본적으로 개인적인 세대로부터 떠나서, 회상을 해 볼 때, 좀 더 실례를 들어볼 수 있는데, 칼빈은 공동체적 단결에 의하여 특징되어지는 시대에 살았던 것이다.
This idea can be further illustrated when we recall that far from the radically individualistic age in which we now live, Calvin lived in a time that was marked by corporate solidarity.  


공동체적 단결은 강령과 고백과 교리문답에 의하여 유지되었었다.

Corporate solidarity was maintained by creeds, confessions, and catechisms.  


예를 들어, 칼빈은 제네바의 모든 거주민에게 일반적 고백에 대한 서명을 요구하는 실천을 확립하였었다.

Calvin, for example, established the practice of requiring all the inhabitants of Geneva to subscribe to a common confession.  


이것은 도시의 공동체적 연합을 유지하기 위하여 행하여진 것이다.

This was done to maintain the corporate unity of the city.[47]

예를 들어, (제네바)시에서의 교리문답인, 칼빈의 신앙 교훈은 세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있다: "세례는 . .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일원이 되기를 원한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밝히는 표시로서, 우리가, 모든 믿는 이들과 함께, 하나의 신앙으로서, 한 분이신 하나님을 섬기고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Calvin’s Instruction in Faith, the city’s catechism, for example, states the following regarding baptism: “Baptism . . is a mark by which we publicly declare that we wish to be numbered among the people of God, to the end that we, together with all believers, may serve and honor, with one same religion, one God.”[48]  


칼빈은 개인이 세례를 통하여 공동체의 지체가 된다는 개념을 강조하고 있다.

Calvin stresses the idea that the individual is baptized into a corporate body.  


그러므로 우리는 칼빈이 교회의 공동체적 성격의 중요성과 그것의 칭의와의 연계를 간과하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So, we see that Calvin does not miss the importance of the corporate nature of the church and its connection with justification.

두 번째는, 칼빈이 개인적 구원의 개념을 강조하는 실수를 범하였는가?
Second, is Calvin in error for emphasizing the concept of individual salvation?  


예를 들면, 라이트는 "로마에 보내는 바울 서신이 어떻게 사람이 구원을 얻는다거나, 어떻게 그들이 개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수립하는가에 대하여 아무 생각 없이  진술한 것이 아니라 창조자 하나님의 언약 목적들을 설명하고자 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Wright argues, for example, that Paul’s epistle to the Romans is not “a detached statement of how people get saved, how they enter a relationship with God as individuals, but as an exposition of the covenant purposes of the creator God.”[49]  


그래도 칼빈은 "어떻게 사람이 하나님과 화평을 이룰 것이가?" 라는 성경의 주요 주제 가운데 한 가지를 단순히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Yet, Calvin simply echoes one of the major themes in Scripture—how a person has peace with God.

예를 들어서, 칼빈은 바울과 실라에게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행16:30)라고 소리를 지른 빌립보 간수에 대하여 "그는 그의 사역자들의 문하생으로서 자신을 표현하며 진실로 겸손하였다"고 설명하고있다.
For example, Calvin comments on the cry of the Philippian jailer who cried out to Paul and Silas, “What must I do to be saved” (Acts 16.30) that “he was truly humbled to present himself as a pupil to His ministers.”[50]  


여기서 칼빈의 설명은 분명히 선을 벗어나진 않았다.

Here Calvin’s comment is certainly not out of line.  


빌립보 간수는 개인으로서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를 물어보았다.

The Philippian jailer asked the question of how he, an individual, could be saved.

우리는 이러한 점에서 라이트와 새관점 옹호자들이, 종교 개혁의 바울에 관한 (포스트)모더니스트의 해석에 공헌했는지-이것은 상당히 시대착오적인 것이다- 를 의심해 보아야한다.
We have to wonder at this point if Wright, and the advocates of the new perspective, are attributing a (post)modernist reading of Paul to the Reformation, which is highly anachronistic.[51]  


예를 들면, 칼빈이 "사람의 죽음은 사람이 자아를 상실하는 자신의 근원에서 벗어나서 살려고 발버둥 친다는 사실에 근거를 가지고 있으며"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생명은 자아를 둘러싼 것으로부터  벗어나 하나님께로 나아갈 때 생기며, 이것에 의하여 자신의 자아를 얻게되는 것이다"와 같은 루돌프 불트만의 말을 하겠는가?

Would Calvin, for example, say with Rudolf Bultmann that “man’s death has its cause in the fact that man in his striving to live out of his own resources loses his self,” but on the other hand, “life arises out of surrendering one’s self to God, thereby gaining one’s self”?[52]  


칼빈이 하이데거 실존주의자들의 칭의에 대한 바울 해석을 인정한다는 것은 상상하기가 힘들다.

It is hard to imagine Calvin affirming a Heideggerian exisistentialist reading of Paul on justification.

이러한 주제들을 열심히 하다보면, 우리는 세번째이면서 마지막 주제, 즉 "율법의 행위"에 관한 문구의 의미를 살펴보게된다.
With these issues addressed, this leads us to examine the third and final issue, namely the meaning of the phrase ‘the works of the Law.’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라이트와 새관점주의자들은, '율법의 행위'의 문구가 율법주의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주장을 한다.
As previously noted, Wright and advocates of the new perspective argue that the phrase ‘the works of the Law’ has nothing to do with legalism.  


차라리, 이러한 문구는 할례와 같은 유대인의 문화적 상징, 혹은 경계 표지라고 언급한다.

Rather, this phrase refers to the Jewish cultural badges or boundary markers, such as circumcision.  


우리는 칼빈이 이러한 핵심 문구를 오해하였는지 물어보아야 한다.

We must ask whether Calvin has misunderstood this key phrase.  


이 의문에 대한 답은 '아니다'이다

The answer to this question is, No.  


우리는 어떻게 칼빈이 이러한 문구를 잘못해석하지 않았다는 결정을 할 수 있는가?

How can we determine that Calvin has not misinterpreted this phrase?  


그 답은 두 가지 면에서 그러하다.

The answer comes on two fronts.

첫 째로, '율법의 행위'는 은혜에 의한 구원 개념과 나란히 놓여있는 유일한 구절은 아니다.
First, ‘works of the law’ (e;rgwn no,mou, ergon nomou) is not the only phrase juxtaposed with the idea of salvation by grace.


예를 들어서, 로마서9:11에 대한 칼빈의 분석에서 그는 하나님께서는 행위의 공로를 고려하지 않으셨다고 분석하는데, 이는 야곱이나 에서나 하나님의 측량에 비중이 있는 어떠한 공로도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For example, in Calvin’s analysis of Romans 9.11 he argues that God does not consider the merit of works because neither Jacob nor Esau had performed any works that God could weigh in the scales.  


그는 바울이 하나님의 목적을 행하는 것을 반대하는데 이는 하나님 홀로 자신의 선하신 기쁨에 속하여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He argues that Paul “sets in opposition to works the purpose of God, which is contained in His own good pleasure alone.”  


그는 에서보다 야곱이 선택되었던 것은 "형제가 태어나기 전이었고 선과 악을 행하기 전이었다"고 덧붙인다.

He adds that Jacob was chosen over Esau “before the brothers were born and had done either good or evil.”[53]  


이제 중요한 것은 우리는 칼빈이 여기서 어거스틴-펠라기우스 논쟁을 가져다 사용한 것이 아니고; 차리리, 그는 단순하게 행위를 '선과 악' 모두로 정의하는 바울을 반복하고있음을 알아야한다.

Now it is important that we note that Calvin does not import the Augustine-Pelagius debate here; rather, he simply echoes Paul who defines works as either ‘good or evil.’  


이러한 이해는 라이트가 제시한 것과 같이 심히 미묘한 차이가 있는 정의가 아니다.

This understanding is not the highly nuanced definition that is set forth by Wright.


로마서 9.11은 바울이 일반적인 행위와 하나님의 은혜 사이에 대립 관계를 설정한 유일한 곳은 아니다.

Romans 9.11 is not the only place that Paul sets up the antithesis between works in general and the grace of God.

칼빈은 에베소서 2장 8-9절을 해석하면서, 바울이 "의는 하나님 한 분의 자비로부터 우리에게 오는 것이며,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에 의하여 우리에게 제공되는 것이며, 행위의 공로 없이 오직 믿음으로 수용되는 것이라는, 로마와 갈라디아에 보내는 서신에서의 긴 논쟁의 본질을 수용하는 것"이라고 기록한다.
Commenting on Ephesians 2.8-9 Calvin writes that Paul “embraces the substance of his long argument in the Epistle to the Romans and to the Galatians, that righteousness comes to us from the mercy of God alone, is offered to us in Christ and by the Gospel, and is received by faith alone, without the merit of works.”  


그는 계속해서 기록하기를, 효과적인 분석으로는 궁극적으로 새관점에서 행위에 대한 개념을 이해하는 것과 평행을 이루는 것으로서, 이 의미에 대한 로마 카톨릭의 이해에는 결함이 있다는 것이다.

He goes on to write, in a telling analysis that virtually parallels the new perspective understanding of the term works,  that the Roman Catholic understanding of the term is defective.  


칼빈은 로마카톨릭이, 그리고 우리는 라이트와 새관점의 사람들을 추가할 수 있겠지만, 우리에게, 바울이 우리가 행위 없이 의로워진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의식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기록하고있다.

Calvin writes that the Roman Catholics, and we might add Wright and those of the new perspective, tell us that Paul is speaking about ceremonies when he tells us we are justified without works.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가 행위의 한 가지 종류만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의 전체를 거부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행위를 부정하는 것과, 사람 전체와 그가 가진 모든 것으로 구성되어있는 것이다.

But it is quite certain that he is not dealing with one sort of works, but rejects the whole righteousness of man, which consists in works—nay, the whole man, and everything that he has of his own.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 은혜와 행위 간의 대조에 대하여 살펴보아야 한다.

We must observe the contrast between God and man, between grace and works.  


논쟁이 오직 의식에만 관계된다면, 왜 하나님은 사람과 대비되셔야만 하는가?

Why should God be contrasted with man, if the controversy only concerned ceremonies?[54]

바울에 관한 새관점은 그렇게 새로운 것이 아니며, 라이트와 같은 옹호자들은  '율법의 행위'라는 문구의 의미를 축소시키려는 사람으로서, 이 경우에 있어서는 행위'가 공로로서의 일반적 행위밖에 않되지만, 처음으로 해석된 것은 아니다.
The new perspective on Paul is not quite so new; advocates such as Wright are not the first exegetes who have tried to narrow the meaning of the phrase ‘the works of the law,’ or in this case the term ‘works,’ to something less than general actions of merit.[55]  


칼빈은 행위라는 의미가 할례를 포함하는 의식만을 언급하고있다는 것을 배제한다.

Calvin rules out that the term works refers only to ceremonies, which would include circumcision.  


더군다나, 중요한 것은 우리는, 칼빈이 자신의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 성경의 유비를 사용하였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Moreover, it is important that we see that Calvin is using the analogia Scripturae to arrive at his conclusions.  


그는 에베소서 2장 8-9절이 바울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통하여 논하고자하는 것의 정수라고 말한다.

He argues that Ephesians 2.8-9 is a distillation of what Paul argues throughout Romans and Galatians.  


칼빈은, 일반적으로 라이트가 이의를 제기하는 것과 같이, 어거스틴-펠라기우스 논쟁을 바울에 왜곡시켜  대입시키지는 않았다.

Calvin has not, as is commonly charged by Wright, eisegeted the Augustine-Pelagius debate into Paul.  


그러나 알아야 할 흥미로운 것은, 라이트를 포함하여 새관점 지지자들은, 이러한 핵심 본문에 대한 칼빈의 해석에 동의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What is of interesting note, however, is that advocates of the new perspective, including Wright, would not agree with Calvin’s exegesis of this key passage.

새관점 지지자들은 대부분 칼빈의 결론들에 대하여 동의를 하려고 하지 않는데, 이는 그(칼빈)가 본문을 잘못 해석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에베소서에 대한 바울의 저작권을 거절하고있기 때문이다.
Advocates of the new perspective would most likely disagree with Calvin’s conclusions, not because he has misinterpreted the passage, but because they reject the Pauline authorship of Ephesians.  


비록 라이트는 에베소서에 대한 바울의 저작권을 명확하게 부인하지는 않지만, 그는 에베소서 2장 8-9절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는다.

Though Wright does not explicitly deny Pauline authorship of Ephesians, he makes no reference to Ephesians 2.8-9.  


예를 들면, 던은 에베소서에 대한 바울의 저작권을 믿지 않는다.

Dunn, for example, does not believe in the Pauline authorship of Ephesians.[56]

논의를 위해서, 바울이 에베소서를 기록하지 않았다고 가정을 해보자.
For the sake of argument, let us assume that Paul did not write Ephesians.  


그렇다고 할지라도, 칭의 교리를 전부 살펴보고 노출 시켜보면, 본문을 이와같이 해석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Even so, a thorough examination and exposition of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should exegete this passage.  


이러한 본문과 그것에 대한 칼빈의 해석을 무시하고 개혁주의 전통이 곡해하였다고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최소 한도로 말하더라도, 결함이 있는 학문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To ignore this passage and Calvin’s exegesis of it, and then accuse the Reformed tradition of eisegesis is once again defective scholarship, to say the least.

우리가 이제 칼빈과 라이트 사이의 이와 같은 비평적 주제를 살펴보았으므로, 이제 우리의 결과를 요약해서 몇 가지 중요한 결론들을 산출해보고자 한다.
Now that we have surveyed these critical issues between Calvin and Wright, we may now summarize our results and draw some important conclusions.



요약과 결론들

Summary and Conclusions

칭의에 대한 라이트와 칼빈의 분석을 비교해서 대조해본 결과 우리는 이 두 신학자 간에 커다란 차이가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In our comparison and contrast of the analyses of N. T. Wright and Calvin on justification we see great divergence between the two theologians.  


새관점에서는, 바울이 전체적으로 어떻게 유대인과 이방인이 1세기 교회에서 공존할 수 있느냐하는, 구원론과 사회론의 문제를 다루고있다고 말한다.

The new perspective argues that Paul largely deals with matters of ecclesiology and sociology, how Jews and Gentiles can co-exist in the first-century church.  


(새관점에서) 칭의는 자신의 의를 드러내시는, 언약에 대하여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세대의 마지막에 자신의 백성을 옳다고 하시는 것이라고 한다.

Justification is a declaration that God, who is faithful to His covenant promises, which is a display of His righteousness, makes at the consummation of the age to vindicate His people.


다른 한편 개혁주의에서는, 바울이 전체적으로 구원론을 다루고있는데, 이(구원론)는 교회론과 종말론과 서로 연결되어있는 것이다.

The Reformation, on the other hand, argues that Paul largely deals with matters of soteriology, which are intermeshed with ecclesiology and eschatology.  


결과적으로 칭의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를 근거로하여 의롭다고 분명히하시는 때를 말한다.

Consequently, justification is when God declares a person as righteous based upon the imputed righteousness of Jesus Christ.  


어쩌하던 간에, 이 글은 칭의가 라이트와 칼빈에 있어서 전혀 다른 축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If anything, this essay has demonstrated that justification rotates on entirely different axes for Wright and Calvin.  


트루만은 말하기를,"솔직히 말해서"

“To put it bluntly,” writes Trueman,

내가 보기에는 소위 바울에 관한 새관점의 옹호자들에 의해서 공식화되는 칭의 교리에 대한 최근의 재조명은 종교개혁의 강령과 교리의 궤도 안에서 서려고하는 개신교를 근본적으로 거절하는 것 밖에는 안되며, 또한 최소한도로 돌아가서 궁극적으로 어거스틴으로부터 시작해서 칭의에 대한 전체 서구 전통을 거절하는 것이다.

it seems to me that the current revision of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as formulated by the advocates of the so-called New Perspective on Paul is nothing less than a fundamental repudiation not just of that Protestantism which seeks to stand within the creedal and doctrinal trajectories of the Reformation but also of virtually the entire Western tradition on justification from at least as far back as Augustine.[57]

과학의 역사로부터 언어를 빌려온다면, 새관점주의자들은 우리들에게, 우주가 구원론이 아니라 교회론 주위를 회전하는 것을 보는데 있어서, 자신들의 망원경을 통해서 보라고 설득하고있다.

To borrow language from the history of science, the proponents of the new perspective are beckoning us to look through their telescopes to see that the universe does not revolve around soteriology but rather ecclesiology.  


우리는 코페르니쿠스 혁명이 진행 중인 교회 역사의 기반 위에 있기에, 바울에 관한 옛 관점을 지지하는 이들이 망원경을 통해서 진리를 보는 것을 거절하였기 때문에 곧 얼굴이 붉어질 것이란 말인가?

Are we at a nexus in church history where a Copernican revolution is underway and the advocates of the old perspective on Paul will soon wear the red faces of chagrin because they have refused to peer into the telescope and see the truth?  


분명히 말하지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니오'이다

Quiet frankly, the answer to this question is, No.

우리가 실제로 새관점의 망원경을 들여다보았을 때 우리는 그것이 우주를 향하여있는 것이 아니라 대신에 그들 자신이 만든 별자리 투영기를 향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When we actually peer into the telescope of the new perspective we have found that it is not aimed at cosmos but instead a planetarium of their own making.


새관점의 경우에 있어서, 우리는 그것이 자신들의 반복적인 왜곡된 주문에도 불구하고, 종교개혁의 일차적 자료가 결핍되었다는 것을 알게되기까지, 매우 불안해보였으며, 그리고 그것은 불완전한 정경 위에 세워진 것이었다.

The case for the new perspective sounds quite ominous until we see that it lacks any reference to Reformation primary sources despite their repeated mantra of distortion, and that it is built upon an incomplete canon.

그러므로, 혁명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서, 새관점은 루터나 칼빈을 뜨겁게 흉내내는 평화로운 반항자들의   단순한 조그마한 연대인 것이다.
So, far from a revolution, the new perspective is simply a small band of peaceful protestors burning effigies of Luther and Calvin.  


그러나 이것은 바울에 관한 새관점이 신학적으로 해롭지 않은 움직임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This does not mean, however, that the new perspective on Paul is a harmless theological movement.  


반대로 새관점은 교회에 매우 치명적이다.

On the contrary, the new perspective is quite lethal to the church.  


무엇이 이러한 사상의 학파들을 치명적으로 만들고 있는가?

What makes this school of thought lethal?


이것이 너무 과장되게 꾸며지지 않았는가?

Is this not overstated rhetoric?  


아주 간단히 말한다면, 이것은 과장이 아니다.

Quite simply stated, no, it is not an exaggeration.

새관점을 치명적으로 만드는 것은 이것이 복음주의 신학의 한 변형으로 표현되고있다는 것이다.
What makes the new perspective lethal is that it is presented as a variant of evangelical theology.  


아직 새관점주의자들은 어거스틴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복음주의 칭의 이해를 거절하고있다.

Yet, the proponents of the new perspective reject the very evangelical understanding of justification that goes as far back as Augustine.  


새관점주의자들은 칭의에 대한 역사적 이해를 거절 할 뿐만이 아니라 이들은 정경에 대한 역사적 복음주의 이해를 거절하고있다.

Not only do new perspective advocates reject the historic understanding of justification but they also reject the historic evangelical understanding of canon.[58]  


예를 들면, 로마서에 대한 던의 주석은 Word Biblical Commentary 시리즈에 속하여 있는데, 이 시리즈는 아마 "성경의 권위를 신적인 계시로 굳게 여기고 있는 것이다."

Yet, Dunn’s commentary on Romans, for example, is included in the Word Biblical Commentary series that is supposedly “firmly committed to the authority of Scripture as divine revelation.”

신적 계시에 굳게 연계시키기보다는, 새관점의 해석은 많은 점에서 평범한 해석을 보여주고있다.
Rather than a firm commitment to divine revelation, the exegesis of the new perspective reflects the interpretation of mediocrity on many points.  


쉐렌 키에르케고르는 "범인의 성경 해석은 해석을 계속하면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그 자체로 죽은 의미에서  빠져나올 때까지 해석하며, 그리고 나서 모든 난제들을 제거한 후에, 이것은 안정이되며, 그리고 확신을 가지고서 그리스도의 말씀에 호소하게된다"고 관찰하였었다.

Søren Kierkegaard once observed that the “biblical interpretation of mediocrity goes on interpreting and interpreting Christ’s words until it gets out of them its own spiritless meaning—and then, after having removed all difficulties, it is tranquilized, and appeals confidently to Christ’s word!”[59]  


바울에 호소하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The same may be said of appeals to Paul.  


라이트는 확신을 가지고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호소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만들어가지만, 그는 에베소서를 간단하게 무시해버린다.

Wright confidently appeals to Romans and Galatians to make his case, but he conveniently ignores Ephesians.  


그러나 이것이 가장 위협적인 위협은 아니다.

This, however, is not the most menacing threat.

새관점이 교회에 가장 해를 입히는 것은 용어의 사용이다.
What makes the new perspective most harmful to the church is its use of terminology.  


새관점주의자들은 성경, 죄, 칭의, 행위, 믿음, 그리고 복음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이들에게 전혀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있다.

Advocates of the new perspective use terms such as Scripture, sin, justification, works, faith, and gospel, but have given them entirely different meanings.  


비록 약80년 전에 쓰여졌지만 그레샴 메이첸의 말은 아직 바로 이러한 주제에 적용된다.

J. Gresham Machen’s words, though written some eighty years ago, still apply to this very issue.


메이첸이 기록하기를, 의심의 여지없이 "끔찍한 위기"가 교회에서 나타났다.

“A terrible crisis,” writes Machen, unquestionably has arisen in the Church.


복음주의 교회의 사역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절하는 이들의 숙주가 발견되었다.

In the ministry of evangelical churches are to be found hosts of those who reject the gospel of Christ.


전통적인 용어를 애매하게 사용하면서, 의견의 차이를 마치 자신들이 오직 성경의 해석에 관해서만 차이가 있는 것처럼 나타내면서, 이들은 바로 믿음의 기초에 대하여 적대적인데도 교회로의 진입이 보장되고 있는 것이다.

By the equivocal use of traditional phrases, by the representation of differences of opinion as though they were only differences about the interpretation of the Bible, entrance into the Church was secured for those who are hostile to the very foundations of the faith.[60]

이것은 바로 정통주의 용어를 사용하는 것인데, 이는 새관점을 해가 없는 것 같이 만들며, 어느 정도 개혁주의 범주의 생각 안에 있는 것 같이 하여 라이트가 종교개혁에 적이 아닌 것같이 만든다.
It is this use of orthodox nomenclature that makes the new perspective seemingly harmless and has some within Reformed circles thinking that Wright is no foe of the Reformation.  


예를 들면, 라이트의 책 "What Saint Paul Really Said"에 대한 최근의 서평에서, George Grant는 라이트가 "증거에 비중을 두고서, 그리고 오직 역사적이고 성경적인 정통주의만이 믿음에 대한 사도의 공헌에 관한 날카로운 질문에 충분히 대답을 하였다고 말하면서.... 라이트가 보수적인 신학적 해석에 새로운 영향력을 더하면서 법정적 정확함과 함께 신약의 자료를 심사숙고하고있다"고 말하고있다.

For example, in a recent review of Wright’s book What Saint Paul Really Said, George Grant states that Wright “weighs the evidence and finds that only historic biblical orthodoxy has sufficiently answered the thorny questions of the apostle’s contribution to the faith…. Mr. Wright pores over the New Testament data with forensic precision to add new weight to a conservative theological interpretation.”[61]

더글라스 윌슨(그는 새관점에 동조하는 페더럴비전주의자이다-역자 주)도 마찬가지로, "라이트의 공동체적 칭의에 대한 강조는 중요하고 필요한 반면에, 그가 강조하는 방법이 문제의 원인이 되고있다. 그러나 그의 테이프 강좌에서, 나는 그가 자신이 개별적 칭의에 관한 개신교 교리를 부정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을 분명히 들었다. 그의 전체적 접근은 놓아 두더라도 이것은 일관성이 있는 것이다."고 말한다. (윌슨의 관점이 맞다는 것이 아니라 새관점주의자인 윌슨이 자연스럽게 정통주의의 칭의 개념을 자신들의 새관점에서 동일한 개념으로 사용하면서 생기는 혼란의 문제점을 제기하고있는 것이다.-역자)
Similarly, Douglas Wilson writes that “while Wright’s emphasis on corporate justification is important and necessary, the way he stresses it is a cause for concern.  But in a taped lecture of his, I heard him explicitly say that he was not denying the Protestant doctrine of individual justification.  Given his overall approach, this is consistent.”[62]


그렇다면, 물어보아야 할 것은, 라이트가 의미하는 칭의가 전가된 의를 뜻하는가, 아니면 종말론적 정의를 의미하는 것인가?(실제의 내용에 있어서는 전혀 다른 정의의 칭의를 구분하지 않고 같은 용어를 사용하고있다는 것이다.-역자)

Yet, one must ask, Does Wright mean justification in the sense of imputed righteousness or as eschatological definition?  


만약에 전자라면, 그는 일관성이 없는 것이고; 만약에 후자라면, 이것은 명백하게 메이첸이 말한 바와 같이- 자유주의를 숨기는 정통주의의 명칭- 위험한 것이다,

If it is the former, then he is inconsistent; if it is the latter, then this is precisely the danger of which Machen speaks—orthodox nomenclature that veils liberalism.

이것이 후자로 나타난 것은 윌슨이 라이트를 "뛰어난 해석가"로 부르면서, 그는 "본문이 '표준' 해석들과 충돌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It appears that it is the latter because Wilson calls Wright “an outstanding exegete,” who “does not shy away from showing how the text conflicts with ‘standard’ interpretations.”[63]  


훈련 받은 신학자나 신약학자들은 명칭의 이러한 움직임에 대하여 쉽게 분별을 할 것이지만, 그렌트의 서평이나 윌슨의 일반적인 칭송을 읽는 평신도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The trained theologian or New Testament scholar will readily identify this shift in nomenclature, but the person in the pew who reads Grant’s review or Wilson ’s general approbation may not.

마찬가지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필라델피아)의 구약학 교수인 피터 엔즈는 최근 라이트가 설교한 두권에 대하여 긍정적인 서평을 하였다.
Likewise, Peter Enns, professor of Old Testament at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 ( Philadelphia ) recently positively reviewed two volumes of sermons by Wright.


엔즈는, "나는 이러한 책들을, 성경적 그리스도를 좀 더 알기를 원하고 이러한 예수의 도전을 주위의 사람들에게 전해주길 원하는 사람 모두에게, 아무 주저함이 없이 권한다"고 말한다.

Enns writes, “I recommend these volumes without reservation to all who wish to know better the biblical Christ and bring the challenge of this Christ to those around them.”[64]  


하지만 만약에 복음, 죄, 칭의, 그리고 믿음에 대한 라이트의 관점이 자신의 가르침을 증거하고 있다면, 우리는 라이트의 예수가 진정으로 "성경적 예수"인지 의심해보아야한다.

Yet, if Wright’s views on gospel, sin, justification, and faith stand behind his preaching, then we must wonder if Wright’s Jesus truly is “the biblical Christ.”

새관점주의자들은 우리에게 옛관점을 버려야 할 아무런 근거도 제시해주지 못하고있다.
The advocates of the new perspective on Paul give us no reason to abandon the old perspective.  


그들의 사례에는 일차적인 자료들이 결핍 되어 있으며, 성경 자체와 충돌이 되는 근원적인 가정들을 가지고 있다.

Their case lacks evidence from primary sources and has fundamental presuppositions that conflict with Scripture itself.  


새관점의 원천으로부터 마시는 이들은 매우 분별력을 가지고 마셔야 하는데 이는 정통주의 명칭 뒤에 자유주의가 숨어있기 때문이며, 자유주의의 심장은 불신앙이다.

Those who drink at the fountain of the new perspective must drink with great discernment because hiding behind orthodox nomenclature lies liberalism, and the heart of liberalism is unbelief.  


끝으로, 결국 해 아래 새것이 없다는 전도자의 말이 옳은 것 같다.

In the end, it looks like Qohelet was right after all—there is nothing new under the sun.


_________


TE J. V. Fesko is pastor of Geneva Presbyterian Church (OPC) in Marietta , Ga. , and visiting lecturer in Systematic Theology at RTS-Atlan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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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 P. Sanders, Paul and Palestinian Judaism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7), p. 422.

[2] D. A. Carson, “Introduction,” in Justification and Variegated Nomism: A Fresh Appraisal of Paul and Second Temple Judaism , eds. D. A. Carson, Peter T. O’Brien, and Mark and Seifrid, vol. 1, The Complexities of Second Temple Judaism (Grand Rapids: Baker Books, 2002), p. 2.

[3] James D. G. Dunn, The Epistle to the Galatians, Black’s New Testament Commentary (Peabody: Hendrickson, 1993); idem, Romans, Word Biblical Commentary, vols. 38 a & b (Dallas: Word Books, 1988).

[4] James D. G. Dunn, “The New Perspective on Paul,” Bulletin of the John Rylands University Library of Manchester 65 (1983), pp. 95-122; idem, Jesus, Paul, and the Law: Studies in Mark and Galatians (Louisville: Westminster / John Knox, 1990), p. 191.

[5] Carson , “Introduction,” p. 4.

[6] N. T. Wright, What Saint Paul Really Said: Was Paul of Tarsus the Real Founder of Christianity? (Grand Rapids: Eerdmans, 1997), p. 19; also see idem, The Climax of the Covenant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1), p. 173; and idem, Who Was Jesus? (Grand Rapids: Eerdmans, 1992), p. 59.

[7] N. T. Wright, The Challenge of Jesus: Rediscovering Who Jesus Was and Is (Downers Grove: Inter Varsity Press, 1999), p. 45; also see idem, Covenant, pp. 17, 122.


[8] Wright, Paul, p. 113.

[9] Wright, Paul, p. 101; also see idem, Covenant, p. 216.

[10] Wright, Paul, p. 105.

[11] Wright, Paul, p. 117.

[12] Wright repeats this charge multiple times, see Paul, pp. 19, 32, 35, 116, 120, 124, 129.

[13] Wright, Paul, p. 119.

[14] Wright, Paul, p. 110.

[15] Wright, Paul, p. 127.

[16] Wright, Paul, p. 129; see also idem, Covenant, pp. 148, 214.

[17] Wright, Paul, pp. 120-21; see also idem, Covenant, p. 240.

[18] Wright, Paul, pp. 158-59.


[19] For a general survey of Calvin’s doctrine of justification as it specifically relates to faith, see Barbara Pitkin, What Pure Eyes Could See: Calvin’s Doctrine of Faith in Its Exegetical Context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9), pp. 41-69.

[20] John Calvin, Romans and Thessalonians, trans. Ross Mackenzie, Calvin’s New Testament Comentaries, vol. 8, eds., David W. Torrance and T. F. Torrance (1960; Grand Rapids: Eerdmans, 1995), p. 28.

[21]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trans. Ford Lewis Battles, ed. John T. McNeill, The Library of Christian Classics, vols. 20-21, ed. John Baillie, et al.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60), 3.11.2, p. 727.

[22] Calvin, Institutes, 3.11.11, pp. 738-39.

[23] Calvin, Romans, pp. 78-79.


[24] Wright, Paul, p. 115.  Cf. Alister McGrath, Iustitia Dei: A History of the Christian doctrine of Justification, vol. 1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6), p. 2.

[25] See, e.g., one of Wright’s most academic works, which we might think would be the most annotated (N. T. Wright, Jesus and the Victory of God [ Minneapolis : Fortress Press, 1996], pp. 14, 123-24, 280, and 380).  In these places he invokes the names of Luther, Calvin, Melanchthon, and “the reformers” but has only one primary source reference to Melancthon’s Loci Communes.  In one reference to Luther he only cites a secondary source, Oliver O’Donovan, Resurrection and Moral Order: An Outline for Evangelical Ethics (Leicester: Inter Varsity Press, 1986).

[26] Carl R. Trueman, “The Portrait of Martin Luther in Contemporary New Testament Scholarship: Some Casual Observations,” Lecture delivered at Tyndale Fellowship in Christian Doctrine, 2001; cf. James D. G. Dunn and Alan M. Suggate, The Justice of God: A Fresh Look at the Old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Faith (Grand Rapids: Eerdmans, 1994), p. 6; Roland Bainton, Here I Stand: A Life of Martin Luther (Nashville: Abingdon, 1950).  The same criticism can be said about Sanders’ own knowledge of historical theology (see Moisés Silva, “The Law and Christianity: Dunn’s New Synthesis,”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53/2 (1991), p. 348.

[27] David Steinmetz, “Calvin and Abraham: The Interpretation of Romans 4 in the Sixteenth Century,” Church History 57 (1988), pp. 443-55; also in idem, Calvin in Context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5), p. 65.

[28] Steinmetz, “Calvin and Abraham,” p. 66; cf. Calvin, Romans, pp. 86, 98.

[29] Sanders, Paul and Palestinian Judaism, passim; Wright, Paul, pp. 18-20.

[30] Calvin, Institutes, 3.5.8, p. 679.

[31] Calvin, Institutes, 3.20.8, p. 860.

[32] Calvin, Institutes, 2.5.18, p. 338.  In addition to contradicting Scripture, Sirach contradicts itself; cf. Sir. 33.12 (Donald E. Gowan, “Wisdom,” in Justification and Variegated Nomism: A Fresh Appraisal of Paul and Second Temple Judaism , eds. D. A. Carson, Peter T. O’Brien, and Mark and Seifrid, vol. 1, The Complexities of Second Temple Judaism (Grand Rapids: Baker Books, 2002), p. 216.  


[34] See Richard B. Gaffin, “Paul the Theologian,”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62/1 (2000), pp. 121-41; Thomas R. Schreiner, The Law and Its Fulfillment: A Pauline Theology of Law (Grand Rapids: Baker Books, 1993); Peter Stuhlmacher, Revisiting Paul’s Doctrine of Justification: A Challenge to the New Perspective (Downers Grove: Inter Varsity Press, 2001); Stephen Westerholm, Israel’s Law and the Church’s Faith (Eugene: Wipf & Stock, 1998).

[35] Thomas R. Schreiner, Romans, Baker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Baker Books, 1998), p. 63.

[36] Calvin, Romans, pp. 77-78.

[37] B. B. Warfield, “The Task and Method of Systematic Theology,” in The Works of B. B. Warfield, vol. 9, eds. Ethelbert D. Warfield, et al. (1932; Grand Rapids : Baker Books, 1981), pp. 94-95.

[38] Wright, Paul, p. 119.

[39] Calvin, Institutes, 3.9.2, p. 727.

[40] Wright, Who Was Jesus?, p. 101.

[41] Wright, Challenge of Jesus, p. 37.

[42] Wright, Challenge of Jesus, p. 58.

[43] Wright, Challenge of Jesus, p. 58.

[44] Calvin, Institutes, 3.16.1, p. 798.

[45] Calvin, Institutes, 3.11.16, p. 746.

[46] Calvin, Institutes, 4.1.2, p. 1013.

[47] François Wendel, Calvin: Origins and Development of His Religious Thought, trans. Philip Mairet (1950; Grand Rapids : Baker Books, 1997), p. 51.

[48] John Calvin, Instruction in Faith (1537), trans. and ed., Paul T. Fuhrmann (1977; Louisville : Westminster / John Knox, 1992), §28, p. 67.

[49] Wright, Paul, p. 131.

[50] John Calvin, The Acts of the Apostles: Acts 14-28, trans. John W. Fraser, Calvin’s New Testament Commentaries, eds. David W. Torrance and T. F. Torrance (Grand Rapids: Eerdmans, 1966), p. 86.

[51] Mark A. Seifrid, “The Pauline Gospel in a Postmodern Age,” in The Challenge of Postmodernity: An Evangelical Engagement, ed. David S. Dockery (Wheaton: Victor Books, 1995), p. 191.

[52] Rudolf Bultmann,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Complete in One Volume, trans. Kendrick Grobel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51-55), vol. 1, p. 270.

[53] Calvin, Romans, p. 201.

[54] John Calvin, Galatians, Ephesians, Philippians, & Colossians, trans. T. H. L. Parker, Calvin’s New Testament Commentaries, vol. 11, eds. David W. Torrance and T. F. Torrance (Grand Rapids: Eerdmans, 1965), pp. 144-45.

[55] Seifrid remarks that “Sanders’ ‘covenantal nomism’ is at root quite similar to the medieval understanding of facienti quod in se est Deus non denegat gratiam, particularly in the via moderna” (Seifrid, “Pauline Gospel,” p. 202).  Cf. McGrath, Iustitia Dei, pp. 70-91.

[56] James D. G. Dunn, “Works of the Law and the Curse of the Law (Galatians 3.10-14),” in New Testament Studies, 31 (1985), pp. 523-42; idem, Paul and the Law, p. 230; idem, Theology of Paul the Apostle (Grand Rapids: Eerdmans, 1998), p. 13, n. 13: “There is roughly even split among critical commentators on Colossians and 2 Thessalonians (I regard the latter as written by Paul and the former probably written by Timothy before Paul’s death…), while the majority regard Ephesians and the Pastorals as definitely post-Pauline (I side with the majority).”  Cf. Silva, “The Law and Christianity,” pp. 351-52.  For general coverage of the debate over Pauline authorship of Ephesians cf. Andrew T. Lincoln, Ephesians,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42 (Dallas: Word Books, 1990), pp. lix-lxiii; and Peter T. O’Brien, The Letter to the Ephesians, Pillar New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Eerdmans, 1999), pp. 37-45.  In addition to issues of canon, Dunn also rejects the doctrine of inerrancy (see Roger Nicole, “The Inspiration and Authority of Scripture: J. D. G. Dunn versus B. B. Warfield,” Churchman 97/3, 98/1, 98/3 [1983], also in Standing Forth: Collected Writings of Roger Nicole [Fearn: Christian Focus, 2002], pp. 159-222).


[57] Trueman, “Martin Luther,” p. 1.

[58] These are not the only questionable areas in the theology of new perspective advocates.  Wright, for example, does not come out and say he believes in the virgin birth of Christ but that it is a possibility and that the New Testament authors believed it: “What if we find that, very early within the movement that grew up around [Christ], there arose two independent sources claiming that he had been conceived without a human father?  Faced with all of this, a belief in this God, and this Jesus, may compel us to hold open the possibility that this account of his conception might just be true” (Wright, Who Was Jesus?, p. 83).  He also states, “One of the best possible answers is that [Matthew and Luke] very firmly believed it to be true” (Wright, Who Was Jesus?, p. 84).

[59] Søren Kierkegaard, Attack Upon ‘Christendom,’ trans. Walter Lowrie (1944; Princeton :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68), p. 57.

[60] J. Gresham Machen, Christianity and Liberalism (1923; Grand Rapids : Eerdmans, 1999), p. 177.

[61] George Grant, “Books: Revisiting the Apostle,” World Magazine, 1 Nov 1997 .

[62] Douglas Wilson, “N. T. Wright and All That,” Credenda Agenda 13/3 (2002), p. 10.

[63] Wilson , loc. cit.

[64] Peter Enns, “Book Review of N. T. Wright’s Crown of Fire and Following Jesus,”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58/2 (1996), p. 328.

posted by Wonho Kim
:

톰 라이트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비평


                                       김원호(dent4834@hanmail.net)


대속적 죽음에 대한 비난이 사실무근?


톰 라이트는 파이퍼가 자신의 칭의 교리를 비판하였는데 내용인즉 예수의 죽음, 그 대속적인 구원이 가지는 중요성을 평가 절하 했다고 비난해 왔다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그러난 이러한 비난이 사실무근이라고 말한다.(톰 라이트 칭의를 말한다, 15)


톰 라이트는 자신의 칭의 교리에서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평가절하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실재는 평가 절하를 넘어서 내용을 왜곡시키는 상태이다.


톰 라이트는 예수의 죽음에 어떠한 속죄신학도 없다고 말하면서, 교회가 초창기부터 예수의 죽음을 속죄 사역으로 이해한 것을 부정한다.


톰 라이트는 예수의 죽음이 이스라엘 민족의 운명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있다고 말한다.(Challenge of Jesus, 86)



(비평)


톰 라이트는 예수의 죽음을 유대적 이스라엘의 운명과 동일시하고있다.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의 멸망과 더불어 멸망된 것이 자신의 죽음과 연결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의 부활이 유대적 이스라엘의 부활로 이어지는 것을 시사하는 말이다.


예수의 죽으심과 주활이 이스라엘의 죽음과 부활로 연결되어질 때 예수의 부활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나라는 역사적 유대주의의 새로운 버전이되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바로 유대적 이스라엘의 새로운 버전이며 이러한 형태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연결된 이스라엘의 멸망과 새로운 이스라엘의 탄생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여기서 새롭게 탄생된 이스라엘은 분명 예수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 탄생된 신약의 교회와는 구별되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분명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속죄의 의미를 부정하고있다.


톰 라이트는 갈라디아서 3장은 범법한 자들이 마땅히 감당해야 할 형벌을 대신 담당하시는 예수님에 관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바울이 말하는 것은 죄인인 유대인과 이방인이 공히 해택을 받을 그리스도의 사역에 관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라이트는 모든 죄인을 위한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이라는 전통적 해석은 잘못이라고 말한다.


톰 라이트는 이 문장이 1세기 유대주의의 입장과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언약적 약속 가운데에서 읽혀진다면 바울이 유대인들이 겪고있는 유배생활에 대하여 말하고 있음을 알 수있다고 말한다.



예수의 죽음은 자신의 사역과 이스라엘의 소명을 하나로 묶어주는가?


1) 톰 라이트는 예수가 최후의 만찬을 통하여 자신의 죽음이 이스라엘의 소명과 하나로 묶여있음을 말했다고 한다.


2) 톰 라이트는 다가오는 종말론적 구속에 대한 제2성전기라는 믿음(슈바이처의 종말론적 이해)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해석한다.


즉 메시아적 저주라고 불리는 심한 고난의 시기를 거친 후에 구원이 실현된다는 것이다. 대환란이 닥칠 것이고, 그것을 통해 구속, 새 시대, 죄 용서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한다.


3) 예수님이 이스라엘에 도래하는 시험의 때를 보셨고 그 분이 그것을 온 몸으로 받으려고 하셨다는 것이다. (Challenge of Jesus, 87)


(비평)


1.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이스라엘에 임하는 저주의 맥락에서 풀어나가고있다.


톰 라이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유대적 이스라엘의 면죄부로 활용하고있다.


율법주의와 인간의 죄를 고발하면서, 구원의 은혜를 선포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니라, 유대적 이스라엘에 대한 저주를 종결시키면서 유대적 이스라엘의 소망, 즉 유대적 이스라엘의 새로운 버전인 하나님 나라 운동으로 확대시켜나아간다.


이는 슈바이처가 그리스도의 희생을 “유대적 이스라엘의 종식과 새로운 유대적 이스라엘의 탄생”이라고 보는 것과 유사하며, 톰 라이트는 슈바이처의 이러한 해석을 응용하고있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슈바이처가 말하는 새로운 유대적 이스라엘과 매우 유사하다.


2. 톰 라이트는 환란이 죄 용서의 수단, 혹은 원인이 된다고 말한다.


이스라엘과 그리스도의 수난이 막연한 죄용서의 수단으로 해석되지만, 이는 인류를 향한 십자가의 속죄 사역을 통한 회복이 아니라 환란 즉 이스라엘의 범죄에만 관련된 환란 후에 죄용서가 이루어진다는 톰 라이트만의 독자적인 해석이다.


여기에는 대속의 개념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3. 톰 라이트의 해석대로라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유대적 이스라엘에 쏟아지는 저주의 방패막이가 된다.


슈바이처나 톰 라이트나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유대적 이스라엘의 새로운 탄생을 위한 십자가이지만, 이는 율법주의의 종결과 믿음으로 탄생한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언약적 율법주의를 바탕으로하는 유대주의적 하나님 나라를 말한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와 용어만 같을 뿐 내용에서는 전혀 다르다.



예수의 죽으심은 이스라엘에 퍼부어질 메시아의 저주인가?


톰 라이트에 의하면, 예수는 자신이 홀로 이스라엘에 퍼부어질 메시아의 저주를 받아야한다고 믿었다는 것이다.(예수의 도전, 131)


톰 라이트는 예수의 십자가를 이스라엘에 퍼부어질 메시아의 저주라는 말로 규정하고있다.


(비평)


1. 톰 라이트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아담의 범죄하고는 전혀 관련이 없이 이스라엘의 죄에만 국한 시키고있다.


2. 죄에 대한 형벌로서의 저주는 이스라엘의 행위에 대한 것이다.


행위를 바로 했다면 형벌을 받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또 다른 방식의 행위를 제공해주는 모본으로 삼는다.


이는 인간이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존재라는 전제에서 나온 생각이다.


3. 톰 라이트는 인간의 전적인 부패를 인정하지 않는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죄인이기에 죄의 열매를 맺을 수 밖에 없다.


잘못된 행위는 잘못된 존재에서 나올 수 밖에 없는 열매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인간에게 전가된 인간의 존재론적 죄에 대한 것이다.


의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존재론적으로 의인이 되어야만 하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지 않고는 어떠한 방법으로도 불가능한 것이다.


톰 라이트는 아담에 의한 죄의 전가와 두번째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에 의한 의의 전가 개념을 부인하고 있기에 인간의 구원을 인간의 행위와 연계시켜서 논리를 전개할 수 밖에 없다.


톰 라이트의 논리대로 예수가 이스라엘에 대한 메시아적 저주를 받은 것이라면, 새로운 이스라엘로서의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은 또 다른 죄악된 행동으로 말미암아 결국 최후의 심판에서 아무도 구원받을 자가 없을 것이다.


또한 톰 라이트는 예수의 죽음에 대한 메시아적 저주를 마치 최후의 심판과 같은 성격으로 규정하고있지만, 만약에 예수가 받은 저주가 최후의 심판이라면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은 어떠한 행동을 하던지 간에 모두 구원받아야 되는 것이다.



예수는 로마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셨나?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로마와의 관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예수의 죽으심은 로마에 대한 반역에 의한 것이다?(예수의 도전, 123)


2) 이스라엘 민족이 로마에 대한 저항을 어떠한 방식으로 하여야하는지 방식의 본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다.


3) 예수의 죽음은  로마에 의한 정치적 희생이다.


4) 예수님의 로마에 대한 의제는 이스라엘 민족이 성전을 회복하고자하는 로마에 대한 의제와 같다.


5) 예수님은 성전을 회복하고자 로마에 대한 반역을 죽음을 통하여 하신 것이다.


6) 예수님은 (실패한) 혁명적인 왕으로 처형되었다.(예수의 도전, 131)


예수는 (이스라엘을 해방 시키기 위한 메시아로서) 로마 총독을 대면했고 로마 군대에 의하여 처형된 인물이다.


7) 예수께서는 생존하시는 동안 메시아처럼 행동하시고 말씀하셨으며, 이런 행동과 말이 그 분을 죽음으로 몰고간 직접적인 원인이었던 것으로 가정해야하며, 이런 내용은 사복음서도 권유한다.(예수의 도전, 202)


이와같이 톰 라이트는 예수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인 로마 군인에 의해 죽으셨다고 말한다.(Challenge of Jesus,138)


예수가 이방인에게서 이스라엘을 해방시켜야할 메시아이시기에 죽으시지 말아야했는데 죽으셨다는 것이다.


여기서 톰 라이트가 말하는 메시아의 개념은 이방인에게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실 유대적 이스라엘의 메시아다.


톰 라이트가 “예수는 메시아시다”라고 강조하는 것은 그 당시의 대립구조를 예수님과 율법주의자가 아닌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조로 보고있는 데서 나오는 개념이다.


톰 라이트는 예수를 메시아로, 메시아는 이방인에게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는 자로, 이스라엘은 바벨론의 포로 상태였다는 점진적 논리를 통하여 예수님은 메시아의 자격으로서 이스라엘을 이방인에게서 구출하시기 위하여 어떻게 (이방인에게) 희생되셨는지를 보여주시는 분으로 묘사하고있다.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율법주의자로 대표되는 바리세인이나 율법사들과의 대립, 즉 자신의 힘으로 구원을 이루겠다는 인본주의자들과의 대립이 아니라, 이방세계와의 정치적 대립을 통한 희생으로 풀어나감으로서, 유대인들에게 면죄부를 주면서 유대적 이스라엘을 하나님 나라의 주역으로 부각시키고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으심을 어떻게 해석하셨는가?


1.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이스라엘의 소망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한다.(예수의 도전, 105)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의 죽음은 야웨께서 이스라엘을 구속하시는 이야기라는 큰 맥락에서 보아야한다고 말한다.  


즉 그리스도는 죽음을 통한 이스라엘의 소망을 성취하셨다는 것이다.(예수의 도전, 121)


톰 라이트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가난과 고난, 바벨론 포로 생활 경험과 순교를  통하여 믿음이 다져짐으로 구속을 이루는 도구가 될지도 모른다는 믿음을 가졌다는 것이다.


예수는 이스라엘이 구속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되어져야 한다는 자기 이해를 가지고 있었으며, 자신의 고난이 이스라엘의 고난의 절정이 되어야한다는 1세기 유대인들의 생각에 부합된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예수께서는 이스라엘의 고난을 통한 구속을 이룰 인물이 바로 자신이라고 믿으셨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라이트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구속(이스라엘의 귀환)의 이야기가 지향하던 그 절정의 순간을 의미한다.(예수의 도전, 127)



(비평)


라이트는 일관되게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에서의 귀환과 연결 시키고있다.



순교자의 본을 보여주시는 예수님.


예수님 이전의 순교자들은 고발자들을 향하여 욕설과 협박을 퍼부었지만 초기 기독교의 전통은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오직 용서와 소망의 말만을 담아내었다.(예수의 도전, 130)


톰 라이트는 초기 기독교 순교자들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순교자로서의 삶을 살라는 본을 본받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비평)


예수님 이전의 순교자와 예수님 이후의 순교자를 동일한 목적을 가졌지만 방법만 다른 사람들로 묘사하고있다.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대속의 의미를 제거함으로서, 창조주이신 그리스도를 성육신하신 구속주가 아니라 희생의 본을 보여준 한 사람의 선지자로 격하시켜버림 것이다.



그리스도는 누구를 위하여 죽으셨나


그리스도는 창세 전에 택하신 자를 위하여 죽으셨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이 아니다.

선택받은 자들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는 자들이다.

이들에게는 어떠한 요구도 없는 오직 전적인 은혜로 부르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사랑하는 자를 위해서 막힌 담을 허신 것이다.

인간은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자이기에 어떠한 공로나 선행도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없으며, 인간은 구원의 값을 지불할 능력이 없는 자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하여 오직 값없이 은혜로 구원해 주시는 것이다.

이러한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의한 것이기에 선택받지 않았다고 항의조차 없다.

그날에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자들은 선택받지 못함의 분노가 아니라 자신의 뜻이 좌절된 것에 대하여 분노할 것이다.

새관점이 말하는 십자가는 사랑의 십자가가 아니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십자가의 길을 걸어야한다면, 전쟁의 위협에서 그냥 희생 당해야만 할 것이며, 북한이 침공한다면 그냥 당하는 것이 답일 것이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십자가는, 선택받은 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희생적인 삶을 요구하는 무거운 것이다.

새관점에서의 십자가는 세대주의자들 보다도 한 걸음 더 나아가 유대적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삶의 지침이면서 기독교를 유대교에 흡수하려는 것이다.

새관점에서의 십자가는 선택과 예정이라는 개념이 없다.

새관점에서의 십자가는 속죄사역이 아니기에 칼빈의 5대강령을 찾아 볼 수가 없다.

새관점에서의 십자가는 율법의 멍에보다 더 무거운 멍에를 요구한다.

새관점에서의 십자가는 정통 안에서 찾아 볼 수 없는 다른 복음의 십자가인 것이다.

새관점의 십자가에 의하면 이 세상에는 어느 누구도 구원받을 것에 대하여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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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라이트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김원호(dent4834@hanmail.net)


톰 라이트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정통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많은 차이가 있다.


차라리 많은 차이가 있다기보다는 용어만 같을 뿐 내용에 있어서는 전혀 다르다는 표현이 적합할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십자가의 의미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해석을 한다.


1)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이스라엘의 소망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예수의 도전,105)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의 죽음은 야웨께서 이스라엘을 구속하시는 이야기라는 큰 맥락에서 보아야한다고 말한다.  즉 그리스도의 죽음은 이스라엘의 소망의 실현을 성취하시는 것이라고 말한다.(예수의 도전,121)


여기서 라이트가 말하는 이스라엘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이루실 새이스라엘이 아니라 역사적 유대주의의  이스라엘을 말하며, 이스라엘의 소망이란 바벨론 유배생활의 청산과 이 땅에 유대주의적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말한다.


2) 이스라엘은 가난과 고난, 바벨론 포로 생활 경험과 순교를  통하여 믿음이 다져짐으로 구속을 이루는 도구가 될지도 모른다는 믿음을 가졌다.


여기서 말하는 구속을 이루는 도구는 하나님 나라 건설에 바벨론 유수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이 중심이 되어 도구로 사용될 것을 말한다.


3) 예수는 이스라엘이 구속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되어져야 한다는 자기 이해를 가지고 있었으며, 자신의 고난이 이스라엘의 고난의 절정이 되어야한다는 1세기 유대인들의 생각에 부합된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라이트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유대 이스라엘의 포로 생활과 연계시켜 풀어나간다.


4) 예수께서는 이스라엘의 고난을 통한 구속을 이룰 인물이 바로 자신이라고 믿으셨을 수도 있다.


라이트는 예수의 소명이 둘째 아담으로서의 인류의 구속이 아니라 유대 이스라엘의 구속이라는 영역으로 한정시키며, 삼위 하나님의 제2격이라는 예수의 신성의 의미를 제거하며, 유대적 구속자로 제한시킴으로서 예수의 속성 자체를 인간적으로 격하시킨다.


5)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구속( 이스라엘의 귀환)의 이야기가 지향하던 그 절정의 순간을 의미한다.(예수의 도전,127)


여기서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인간의 보편적 죄와는 관계없는,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에서의 귀환과 연결 시키고있다.


6)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중의 혁명적 메세지이다.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통하여 혁명적 메세지를 전하였는데 이 이중의 혁명적 메세지는 강경파의 단순한 혁명적 메세지가 아니라 혁명의 의제까지 포함하면서 다른 모든 의제를 뒤엎을 메세지이다.(예수의 도전,72)


톰 라이트는 예수의 십자가를 로마에 대한 투쟁 방식의 한 가지로 해석한다.


그동안 이스라엘이 로마에 대하여 취했던 여러가지 방식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며, 예수는 새로운 방식을 제공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을 택하였다는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를 통한 혁명의 방식은 열혈당처럼 물리적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다른 뺨도 돌려대고 십리도 가라는 메세지의 실천이다.(예수의 도전, 122)


7)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메시아적 소명을 이루는 예수의 방법이다.


예수가 이루고자하는 메시아적 소명은 물리적인 전쟁에 의한 혁명 프로그램의 참여가 아닌  예수의 메시아적 소명을 예수의 방법을 통하여 실현한다.


여기서 톰 라이트가 말하는 메시아적 소명은 속죄 사역에 대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 대항하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하는 방법론에 대한 것이다.


8)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대안적 나라의 이야기에 동참을 요구한다.


기존 체제를 전복하는 예수의 의제의 중심에는 제자들에게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따르고, 자신이 실현하는 대안적인 나라(즉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에 동참하라는 요청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목적


톰 라이트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이 땅에서 유대 이스라엘의 완성을 위한 것이다.


세대주의는 유대 이스라엘의 구원 방식과 이방인의 구원 방식의 두 가지 구원 방식을 추구하는 반면에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바울에 관한 새관점”(앞으로 새관점으로 통일함)은 “하나님의 단일한 구원 계획”이라는 한 가지만 고집한다.


이는 개혁 정통주의가 말하는 단일한 구원 계획과는 다른 것이다.


개혁 정통주의에서는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구속 사역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칭의된 자만이 구원 받을 수 있다.


그러나 톰 라이트는 세대주의의 이중의 구원방식에서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이신칭의를 제거하고 오직 유대 중심적 구원방식만을 주장한다.


톰 라이트는 유대 중심적인 단일한 구원 계획을 위해서 개혁주의의 구원 방식을 유대교의 틀 안에서 다시 해석하는 방식을 취한다.


이러한 방식이 바로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새관점이다.


톰 라이트는 자신의 새관점을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오직 유대적 이스라엘의 회복과 유대 중심적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라는 틀 안에서 재해석한다.


이를 위해 톰 라이트는 다음과 같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목적을 해석한다.


1)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국가적 저주를 제거하는 죽음이었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이스라엘의 죄는 이스라엘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구원하시고자하는 단일한 계획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것이었으며, 바벨론 유배생활은 이러한 죄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한다.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이스라엘에게 임한 국가적 저주를 제거하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약속한 언약적 축복을 온 세계에 전달하는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말한다.


2)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스라엘의 소망을 실현하기 위한 죽음이었다.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이스라엘의 소망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며, 야웨께서 이스라엘을 구속하시는 이야기라는 큰 맥락에서 보아야한다고 말한다. (Challenge of Jesus, 85)


여기서 톰 라이트가 말하는 이스라엘의 소망은, 새이스라엘로서의 성도의 소망과는 관계없는, 유대적 이스라엘의 소망이며,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유대적 이스라엘의 소망의 실현이라는 맥락에서 보고있는 것이다.


3)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포로시대의 종말을 뜻한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극치에 다달았던 유배생활의 저주를 단번에 해결하심으로서 포로시대의 종말을 고할 수 있었으며, 예수의 죽으심과 더불어 저주가 제거되고 새롭게 된 언약의 축복이 하나님께서 의도 하셨던 데로 바깥으로 넘쳐 흐를 수 있었다는 것이다.


4)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자신의 사역과 이스라엘의 소명을 하나로 묶어준다.


톰 라이트는 예수가 최후의 만찬을 통해서 자신의 죽음이 자신의 사역과 이스라엘의 소명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이라고 말했다고한다. (Challenge of Jesus, 87)


톰 라이트의 이러한 이해는 슈바이처의 종말론적 이해와 맥락을 같이하는 것으로서, 다가오는 종말론적 구속에 대한 제2성전기라는 믿음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해석하는 것이다.


즉 메시아적 저주라고 불리는 심한 고난의 시기를 거친 후에 구원이 실현된다는 것이다.

대환란이 닥칠 것이고, 그것을 통해 구속, 새 시대, 죄 용서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한다.


예수님이 이스라엘에 도래하는 시험의 때를 보셨고 그 분이 그것을 온 몸으로 받으려고 하셨다는 것이다.


환란이 죄 용서의 수단, 혹은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5)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순교자의 본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예수님 이전의 순교자들은 고발자들을 향하여 욕설과 협박을 퍼부었지만 초기 기독교의 전통은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오직 용서와 소망의 말만을 담아내었다늠 것이다.


예수께서 고난 가운데도 침묵을 유지하시고 오직 용서와 소망의 말만을 담으신 것은 순교자의 전통에서보면 너무나 새로운 것이어서 설명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초기 기독교 순교자들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순교자로서의 삶을 살라는 본을 본받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예수의 도전,130)


여기서 톰 라이트는 예수님 이전의 순교자와 예수님 이후의 순교자를 동일한 목적을 가졌지만 방법만 다른 사람들로 묘사하고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유대 전통의 순교자의 맥락에서 그려내고있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유대 전통의 순교자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 전통과는 상관없는, 아담에서 유래된 인류의 죄를, 둘째 아담으로서 담당하신 것이다.


톰 라이트는 예수님 이전의 순교자나 예수님 이후의 순교자나 동일하게 유대적 이스라엘의 회복이라는 유대적 메시아 사상의 선상에 놓고있다.



십자가가 상징하는 것들


톰 라이트는 예수께서 자신이 지신 십자가가 다음과 같은 내용을 상징한다고 말한다.(예수의 도전,169)


1) 십자가는 로마의 압제를 상징한다.


라이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간의 보편적 죄에 대한 것이 아니라 로마의 압제에 대한 것으로 축약시킨다.


2) 십자가는 사랑과 평화의 길, 그 분이 승리의 길이라고 선포하셨던 패배의 길을 상징하였다.


이는 카이사르와 이를 저항하는 이들과는 다른 승리를 상징한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로마는 세상 정부를 대표하기에, 로마에 대한 승리는 세상의 압제에 대한 승리라고 말한다.


세상에 대한 승리는 구속사역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예수의 행동방식이 옳다고 인정하는 증거인 부활을 통한 것이다.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수의 로마에 저항하는 행동 방식이 옳았음을 하나님께서 증거하신 것이라고 설명한다.


3) 십자가는 실천이 아닌 수동성의 상징, 행동이 아닌 수난의 상징이었다.(예수의 도전,133)


톰 라이트는 성전과 다락방에서 예수께서 행하신 것이 실천과 행동이었다고 보며, 십자가는 이와 대비되는 수동적인 것으로 보고있다.


이는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수동적 순종으로서의 십자가와는 다른 것이다.


4) 십자가는 부활이라는 더 크고 의미심장한 상징적 행동이 성취될 것임을 가리키는 표지이다.



톰 라이트가 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비평


1) 속죄 사역과는 관계없다.


라이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을 속죄 사역으로 보고있지 않으며, 이와 관련하여 믿는 자의 칭의에 대한 어떠한 역할도 설명하지 않는다.


그가 말하는 십자가는 율법의 저주 아래에 있는 죄인들에 대한 형벌을 대신 감당하시며, 고통을 대신 당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역사적 이해에 전혀 동조하지 않는다.


그가 말하는 예수의 죽으심은,  유배생활의 종식을 의미하는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메시아이심을 나타낼 뿐이다.


그가 말하는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은 이스라엘의 유배생활의 회복을 의미하며, 유배 생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을 중심으로하는 하나님 나라를 만들기 위한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통해서 이루신 하나님 나라와는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라이트는 칭의에 관한 바울의 교리가 인간의 죄성의 문제와 관련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기에, 속죄 사역과 관련되어 형성된 그리스도의 역할에 대한 역사적 이해에 관하여 거의 언급을 하고있지 않다.


톰 라이트가 이해하는 칭의란 누가 언약 안에 속하여 있는지 답을 주는 신분 증명서와 같은 것이기에, 톰 라이트는 전통적 개혁주의 신학이 강조하는 속죄교리에 대하여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2) 대속과 하나님의 의(propitiatory substitution vs the righteous of God)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으로 해석되는데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심판과 아담의 범죄 개념이 빠져있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공의는 아담의 범죄로 인한 인류의 보편적 죄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행동 방식의 문제에 관한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의에는 심판의 개념이 빠져있기에 그리스도의 대속에 의한 속죄 사역은 필연적으로 제외시켜야하는 개념이었다.


심판의 개념이 없는 상태에서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은 있을 자리가 없을 수 밖에 없고 더군다나 대속의 개념도 자리를 잡을 곳이 없다.


로마서 1-3장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진노하심과 심판과 연결되어 나타나며,  하나님과 동격이신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심판의 진노를 해결하실 수있는 분이시다.


그러나 새관점에서 보여주는 그리스도의 사역은, 두번째 아담으로서 첫번째 아담에서 나타난 죄의 문제를 해결하신는 분으로서의 속죄나 대속이 배제된체, 오직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시는 정치적 의미의 메시아로만 그려지고 있다.


3) 힘에 대한 승리를 말한다.


톰 라이트가 언급하는 “그리스도의 주되심”은 십자가를 통하여 로마에 대항하여 죽으심의 방법으로 얻으신 것이기에, 물리적 힘에 대한 승리를 말한다.


이는 인간의 죄성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을 충족시킨다는 개념과는 다른 것이며, 세상 권력을 상징하는 로마에 대하여 어떠한 방식으로 승리를 할 수 있으셨는지를 손수 모범을 보여주심으로, 세상 권세에 대한 승리의 한 방법을 제시해주셨다고 말한다.


4) 유대적 이스라엘의 소망의 성취


톰 라이트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아담의 범죄와는 관계가 없는, 단지 유배 생활 상태에 있는 이스라엘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제시된 것이다.


톰 라이트는 예수의 최후의 만찬이 이스라엘의 유배 생활 상태의 종식을 선언하는 것이었으며, 이스라엘이 더 이상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새로운 행동방식을 제시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본을 보여주셨다고 말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톰 라이트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유대 이스라엘의 완성을 위한 해석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는 누구를 위하여 죽으셨나


그리스도는 창세 전에 택하신 자를 위하여 죽으셨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이 아니다.

선택받은 자들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는 자들이다.

이들에게는 어떠한 요구도 없는 오직 전적인 은혜로 부르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사랑하는 자를 위해서 막힌 담을 허신 것이다.

인간은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자이기에 어떠한 공로나 선행도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없으며, 인간은 구원의 값을 지불할 능력이 없는 자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하여 오직 값없이 은혜로 구원해 주시는 것이다.

이러한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의한 것이기에 선택받지 않았다고 항의조차 없다.

그날에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자들은 선택받지 못함의 분노가 아니라 자신의 뜻이 좌절된 것에 대하여 분노할 것이다.

새관점이 말하는 십자가는 사랑의 십자가가 아니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십자가의 길을 걸어야한다면, 전쟁의 위협에서 그냥 희생 당해야만 할 것이며, 북한이 침공한다면 그냥 당하는 것이 답일 것이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십자가는, 선택받은 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희생적인 삶을 요구하는 무거운 것이다.

새관점에서의 십자가는 세대주의자들 보다도 한 걸음 더 나아가 유대적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삶의 지침이면서 기독교를 유대교에 흡수하려는 것이다.

새관점에서의 십자가는 선택과 예정이라는 개념이 없다.

새관점에서의 십자가는 속죄사역이 아니기에 칼빈의 5대강령을 찾아 볼 수가 없다.

새관점에서의 십자가는 율법의 멍에보다 더 무거운 멍에를 요구한다.

새관점에서의 십자가는 정통 안에서 찾아 볼 수 없는 다른 복음의 십자가인 것이다.

새관점의 십자가에 의하면 이 세상에는 어느 누구도 구원받을 것에 대하여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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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의 소명의식과 상징적 행동들


김원호(dent4834@hanmail.net)


예수의 소명의식


왜 톰 라이트는 예수께서 메시아로서의 소명의식을 가지고 있으셨는지, 그리고 그 소명의식이 어떠한 행동으로 표현되었는지, 그 결과가무엇인지에 대하여 많은 지면을 할애하면서 서술을 하고있다. 여기서는 톰 라이트가 예수가 소명의식을 가지고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있는 그의 서술들을 통하여 개혁주의 입장에서 이를 분석 비판하고자한다.


1)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하여야만 하는 소명의식


톰 라이트는 예수께서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아셨가는 개념보다는 마땅히 하나님이 하실 수있는 메시아로서의 일을 하심으로 하나님께 인정받음으로서 하나님의 보좌의 우편에 앉아야만 하는 소명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한다.

이는 마치 사람이 신이 되어야만 하는 의무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표현으로 들리기도 하고 아니면 하나님께 인정 받아야만 하는 의무감? 혹은 자신이 메시아가 되어야만 하는 소명감 등으로 오해를 받을 수 있는 모호한 표현들을 하고 있다.


톰 라이트는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아셨다"라는 말을 명쾌하게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님은 이스라엘과 온 세상을 위해 성경에 따라 야웨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행하고 그 분만이 되실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만 한다"고  믿으셨다는 것이다"라고 표현한다.

오직 야웨만 성취하실 수 있는 일을 이루시는 것이 자신의 과업이라고 생각하셨다는 것이다.(N.T. Wright’s ‘The Challenge of Jesus’,121)


이는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초자연적인 의식을 품었다는 말이 아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초자연적인 의식을 품었다는 말은 오히려 예수에 대하여 가현설(docetism)을 주장해야만 예수의 신성을 고수할 수있는 18세기의 이신론적 맥락과 함께하는 이들의 견해라는 것이다.(N.T. Wright’s ‘The Challenge of Jesus’, 121)


라이트는 예수의 인성을 강조하다가 오히려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 쪽으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다.


2) 유대교가 상징하는 것을 구현해야하는 소명의식


예수께서는 유대교의 상징들 즉 성전과 토라, 말씀(word)과 영spirit)과 지혜(wisdom)들이  야웨께서 온 세상을 위해 이스라엘 가운데 계시며 구원을 베푸신 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기에 이러한 상징들을  몸소 구현하는 것이 예수 자신의 소명이라고 믿으셨다는 것이다.(N.T. Wright’s ‘The Challenge of Jesus 122)


3) 예루살렘 입성을 통해  역사적 사실로서 증명되는 나사렛 예수의 소명의식


톰 라이트는 예수가 심판자이자 구속자로 시온에  돌아오실 야웨의 이야기를 몸소 구현하여야 하는 소명의식을 가졌다고 말한다.


라이트는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면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신 것은, 야웨께서 심판자이자 구속자로 시온에 돌아오실 것에 대한 예언이며, 성전파괴를 상징하고 최후의 출애굽을 경축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몸소 구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톰 라이트는 나사렛 예수께서 어떤 소명을 의식하셨다는 것을 역사적 사실로서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N.T. Wright’s ‘The Challenge of Jesus’, 123)


4) 유대의 행동방식에 대한 수정을 통하여 새로운 이스라엘의 행동 규범을 제공해주어야했다.


유대 이스라엘의 문제는 로마에 항거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동 방식에 문제가 있었다고 본다.


톰 라이트에 의하면 유대 이스라엘은 1) 로마와 결탁하는 헤롯방식, 2) 로마와 분리된 삶을 추구하는 이원론적 방식, 3) 로마에 정면으로 투쟁하는 시카리(Sicarii)의 열혈당방식이 있었다고 말한다.


예수는 이들에게 유대주의의 행동 방식과는 다른 방식을 제공해주는 것이 소명이었다는 것이다.(예수의 도전, 48)


5) 하나님 나라 운동을 시작 할 소명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 나라 운동의 주체가 되심으로 세상을 위한 사역을 감당해야 한다는 소명의식을 가지셨다.(예수의 도전, 39)


예수님의 사역 중의 하나는 하나님 나라 운동을 지원할 세력 즉 새로운 백성을 부르시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진정 만왕의 왕이 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하신 일이다.(예수의 도전, 52)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초기 기독교 자체가 하나님 나라 운동이라고 생각했으며, 유대교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가 탄생되었다고 말한다.(예수의 도전, 193)


6) 이스라엘의 대표로서의 메시아적 소명 의식


“예수께서는 이스라엘이 이교사상과 싸우려는 욕망 자체를 타락으로 보셨는데 이는 이스라엘이 민족주의 혁명의 온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이스라엘의 대표로서 이스라엘의 고난의 문제를 스스로 짊어지시는 것이다.


예수는 이스라엘의 대표로서 이스라엘이 할 수 없었던 이스라엘의 소명, 곧 세상의 빛이요 종이 되는 그 소명을 이루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이해하셨던 자신의 메시아적 소명이다.

(예수의 도전, 129)


7) 성전의 존재와 역할로서의 부르심의 소명 의식


예수님께서 지니신 소명의식의 중심에는 자신이 성전의 존재와 역할을 하도록 부름받았다고 믿는 신앙이 있었다.


성전에서의 예수님의 행동은 자신이 메시아이심을 주장하는 상징적 행동이었다.


즉 이스라엘의 긴 이야기가 자신 안으로 집약되는 것이 자신의 운명이라고 믿었음을 보여주는 행동이었다.


예수는 자신이 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하시는 장소요 수단이라고 주장하셨다.


예수는 자신의 소명이 새로운 성전으로 행동하는 것이라고 믿으셨다. (N.T. Wright’s ‘The Challenge of Jesus’, 111)


8) 전투에서 지는 소명의식


톰 라이트는 예수의 소명을  모든 인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의 보혈을 통한 속죄 사역이 아니라, 유대 이스라엘의 잘못에 종지부를 찍고서 새로운 방법을 시도하는 예수님으로 묘사하고자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있다.


“예수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해 그 전투에서 지는 것이 자신의 과업이자 역할이며 이스라엘의 대표로서 맡은 소명이라고 확신하셨다.” (예수의 도전, 128)


전투에서 지는 것은,  이스라엘이 마케베우스의 반란과 같이 로마에 대하여 무력적으로 저항하는 것은 세상의 빛이 되기 위한 이스라엘의 해방을 가져올 수 없기에 예수께서는 무저항을 통한 죽으심으로 메시아적 소명을 성취하셨다는 것이다.


9) 이스라엘이 하여야할 역할을 대신할 소명


톰 라이트가 보는 예수의 소명은, 원래 이스라엘이 당담했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함으로서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였기에, 유월절 만찬을 통하여 바벨론 포로의 생활을 청산시키고서, 스스로 이스라엘이 되셔서 로마에 죽임을 당하는 길을 걸음으로서 이스라엘이 하여야 할 것을 친히 담당하셨다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의 십자가는 이스라엘의 소명을 위한 것이다.


10) 이스라엘과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과 공의의 선포


예수는 이스라엘과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과 공의의 계획을  예수 자신의 현존, 자신의 일, 자신의 운명으로  실현시켜야 할 소명을 가지고 있다.(예수의 도전, 49)


여기서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구원과 공의의 계획은 이 땅에서 완성되는 하나님 나라 나라이며, 하나님 나라와 구원이 유대적  이스라엘을 통하여 실현되는 것이다.


예수의 상징적 행동들


예수의 소명 의식은 예수의 상징적 행동들을 통해서 구체화된다.


톰 라이트는 예수의 상징적 행동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는 예수가 하나님의 선택된 대리자였다는 사실을 생각하여야한다고 말한다.(N.T. Wright’s ‘The Challenge of Jesus’, 105)


성전에서의 예수의 행동은 자신이 메시아이심을 주장하는 상징적 행동이었으며, 이스라엘의 긴 이야기가 자신 안으로 집약되는 것이 자신의 운명이라고 믿었음을 보여주는 행동이었다는 것이다.


예수의 행동들은 상징적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는, 최후의 만찬, 성전에서의 행동, 예루살렘 입성, 십자가에서의 죽음, 부활등이 있다고 말한다.(예수의 도전,169)


하지만 상징적 행동들에 대한 톰 라이트의 해석은 지극히 유대주의적인 해석이며, 자신이 그리는 유대주의적 구도에 맞춘 인위적이고 보편성이 결여된 모습을  보여주고있다.



상징적 행동들이 바리세인과 충돌하는 이유


예수님과 바리세인의 충돌하였던 이유에 대하여 톰 라이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 예수와 바리세인의 충돌은 믿음과 행위의 충돌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의제를 내세워, 조상의 규약으로 인한 과대망상적인 자기 방어를 내려놓고 세상의 빛과 이 땅의 소금이 되라는 소명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하셨기 때문이다.


2) 이들의 충돌은 서로 다른 종말론적 믿음과 기대로 인한 서로 다른 정치적 의제라는 측면에서 봐야한다.


3) 예수님은 바리세파를 주도하던 그룹의 혁명적인 열정을 가열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문시하는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다.(예수의 도전, 81)


4) 예수는 공생애 전체에 걸쳐 마치 자신이 새로운 출애굽을 시작하는 듯 행동하셨다.(예수의 도전, 168)


톰 라이트는 예수의 행동이, 노예상태의 하나님의 백성을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고서 구출하러오신것과 같은 상징적 행동 방식으로 해석되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톰 라이트는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 상태를 애굽에서의 노예 상태에 적용시키고있으며, 예수의 상징적 행동들은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연상시키는 행동들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바리세인들이 자신들이 종이 된 적이 없다고 말하는데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죄를 짓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바벨론 포로가 아닌 죄의 종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 8:33-34)


신약 어디에도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였음을 시사하는 내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톰 라이트는 줄곧 바벨론 포로생활을 말하고있다.



톰 라이트의 다른 관점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의 소명 의식과 상징적 행동방식에 대한 해석이 전통적 개혁주의와 다른 것은 톰 라이트의 다음과 같은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1) 톰 라이트는, 복음주의를 비롯한 서양의 정통파는 하나님에 대해 지나치게 높고 초연한  견해를 오랫동안 지속해왔다고 말한다.(예수의 도전, 181)


그러나 과연 개혁파의 생각이 지나치게 높고 초연한 견해일까?


라이트는 모든 인간이 아담의 후손으로서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인간의 죄성에 대한 인식이 있을 때는 분리의 개념인 거룩하신 하나님과 가까이하는데 한계를 인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새관점에서의 인간론은 존재론적으로 아담의 죄와는 관계가 없다는 생각에서, 유대 이스라엘을 유대 시오니즘적으로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자부심으로 인하여, 하나님은 인간 사회의 완성을 위한 하나님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라이트가 말하는 시오니즘적 하나님은 초연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현실적인 삶의 영역에 깊숙히 들어오셔서 인간의 왕이 되시는 하나님이시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에서의 하나님은, 인간 사회 깊숙히 들어오셔서 직접 나라를 다스리시는 왕으로서, 인간 사회와 분리될 수없는 하나님이시다.


이는 개혁파에서 말하는 “이미와 아직”의 긴장감보다는, 이미 이 땅에 실현된 하나님 나라라는 관점을 견지하고있는 것이다.


2) 톰 라이트는 개혁주의가 하나님에 대한 높고 초연한 견해를 전제로 기독론의 문제에 접근한 뒤에 예수를 거기에 끼워 맞추는 경향이 있었다고 말한다.(예수의 도전,181)


톰 라이트는 개혁주의가 가지고있는 전제주의를 비판하고있다.


하지만 전제는 성경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개념이다.


톰 라이트는 제2성전 유대교에 대한 역사적 예수 연구를 성경 해석의 전제로 삼는다.


하지만 제2성전 유대교의 자료들에 대하여 얼마나 객관적으로 접근하고 있는지는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사도 시대의 행적들을 보면, 유대인 성도들이 유대교에서 명확하게 분리되어있지 않은 모습들이 많이 나타난다.


지금의 기독교 교리와 제2성전 유대교에서의 성도들과는 많은 면에서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톰 라이트가 근거로 제시하는 제2성전 유대교에 대한 역사적 탐구는 현재 기독교의 표준이 될 수 없다.


톰 라이트는 기독교가 어거스틴 이후에 변질되었다고 보지만, 오히려 아거스틴을 계시로 제대로 교리의 틀이 갖추어지기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예수는 성경의 중심이며,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서도 중심이 되실 수밖에 없다.


예수를 중심으로 성경을 해석하면 예수는 유대주의와 대립 될 수밖에 없다.


구속주로서의 예수는 예수에 대한 전제가 아니라 성경 전체가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톰 라이트는 제2성전 유대교의 언약적 율법주의라는 전제에서 예수를 무리하게 유대 중심적으로 해석하고있다.


톰 라이트가 해석하는 예수를 경륜적 삼위일체의 관점에서 본다면, 예수는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신 하나님이 아니다.


여기서 톰 라이트의 기독론의 문제가 드러난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


1. 참된 예수는 역사적 예수 탐구 없이는 알 수 없는가?


톰 라이트는 예수의 소명 의식과 상징적 행동들에 대한 해석의 근거로 “역사적 예수 탐구”에 의한 자료들을 제시한다.


톰 라이트는 자신이 역사적 예수 탐구를 하는 이유는 참된 예수를 알기 위한 것이라고한다.(Simply Jesus, 31)


톰 라이트는 역사적 예수 탐구라는 방법을 통하지 않고는 참된 예수를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제1,2차 대전 동안에 교회가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를 하지 않았을 때 비역사적 예수가 제시되어 나치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했다는 에른스트 케제만의 1953년에 행한 연설에 동의하면서, 역사적 예수 탐구가 없는 동안에는 진정한 예수를 알 수가 없고 이 예수를 따를 수도 없다는 것이다.(Challenge of Jesus, 21)


톰 라이트는 제 3의 탐구라고 불리우는 새로운 탐구가 시작된 1980년대 이후에야 비로소 진정한 예수를 알 수 있었다고 말함으로써, 지상의 교회들은 지난 2000년 동안 잘못된 만들어진 예수를 믿어 왔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2. 성경보다는 1세기 유대문서를 성경 해석의 근거로 삼고있다.


톰 라이트는 성경 해석의 출발을 성경 이외의 자료를 근거로 하고 있다.


그는 성경에 대한 해석은 역사적 검증과 신학적 검증을 통과하여야한다고한다고 말한다.(Simply Jesus, 20)


이를 위해서 신자는 모두 다 1세기의 역사가가 되어야한다는 것이다.(Simply Jesus, 21)


그의 검증 방식은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개혁주의의 방식과는 다른 것이다.


톰 라이트는 성경을 그대로 믿고서 역사적 예수 탐구를 하는 것도 아니며, 성경을 통하여 역사적 탐구를 하는 것도 아니고, 오직 성경이외의 1세기 역사적 자료를 근거로하여 성경을 해석하고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근거로 내세우는  1세기 자료는 일부 지역의 보편성이 결여된 자료를 근거로 하기에 성경 해석의 기준이 될 수 없는 자료들이다.


3. 전통적 기독교는 우리가 만든 예수라는 우상을 섬기고 있다?


톰 라이트는 예수께서 품으신 1세기 사고방식은 우리에게 낯설기도하고 불쾌감마저 주고 있다고 말한다.(예수의 도전,134)


전통적 기독교는 1세기 제2 성전 유대교에서 이해하는 예수와 너무도 동떨어진 예수 이기에, 이에 익숙한 전통 기독교에서는 자신의 예수에 대한 해석에 당황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예수에 대한 계속적인 역사적 탐구는 계속되는 기독교적 제자도에 필수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Challenge of Jesus, 15)


그는 심지어 서구 기독교가 동정녀 탄생이라는 신화(?)를 믿고있으며(Simply Jesus, 18), 서구 기독교는 예수에 대한 환타지를 만들고 있다고 말한다.(Simply Jesus, 21)



비평


1. 마치 사람이 신이 되었다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톰 라이트는 예수가 소명의식을 가지고있음으로 인하여 사람이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고 하나님께 인정 받음으로서,  하나님의 보좌의 우편에 앉으셨으며,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하나님이 되셨다는 의미가 풍겨진다.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예수의 소명의식과 역할은 삼위 하나님의 위격을 가지고있지 않더라도 가능한 역할이기에, 예수의 신성과 인성에 논쟁의 소지를 제공한다.


달리 말하면 사람이신 예수님이 어떻게 하나님이 되셨는가에 대한 이야기로 이해될 수도 있는 해석이다.


2. 유대주의적 메시아 사상의 완성을 말한다.


예수를 소명의식을 통한 메시아로 규정함으로서, 유대적  메시아 사상을 기초로 한 시오니즘이 예수의 소명의식을 기초로 완성되었음을 주장하고 있다.


유대인들이 고대하던 메시아의 돌아오심이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을 통하여 이루어졌음을 말함으로서 유대주의적 시오니즘의 완성을 말하고있다.


3. 유대주의적 하나님 나라를 말하고있다.


톰 라이트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적 이스라엘의 구현이다.


톰 라이트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적 이스라엘의 성전이시며, 예수 그리스도는 새이스라엘이시다.


톰 라이트는 예수 그리스도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을 중심으로하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구현하시는 분으로 묘사한다.


톰 라이트가 보는 예수의 행동 방식은 새롭게 구성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 행하여야 할 행동 방식의 규범을 보여주신 분이시다.


4. 힘에 대한 승리라는 구속 방식을 말한다.


톰 라이트가 언급하는 “그리스도의 주되심”은 개혁주의가 전통적으로 이해하고있던 형벌에 대한 충족의 개념보다는 힘에 대한 승리 개념의 교리를 강조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로마의 압제에 대한 항거 방식으로서 희생을 통한 승리를 강조하고있다.


5. 새로운 성전?


예수님께서 자신이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하는 장소요  수단이라고 주장하셨다면 현재 우리가 예수님을 생각할 때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전과 같은 개념에서 생각하여야 하는가?


톰 라이트는 예수님이 성전이 되신다는 말을 할 때 새관점에서 주장하는 언약적 율법주의 개념에서의 성전을 말하고있다.


언약적 율법주의 개념에서의 성전은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성전과는 차이가 있다.



posted by Wonho Kim
:

톰 라이트가 말하는 젊은 유대인 예수


김원호(dent4834@hanmail.net)


젊은 유대인 예수


톰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는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예수와 많은 차이가 있다.


그 가운데 한 가지는 라이트가 예수를 유대주의적인 맥락에서 삶의 새로운 행동 방식을 보여준 패기 넘치는 유대인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묘사하는 예수는 유대주의와 대립적이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이 중심이 되는 하나님 나라를 새롭게 시작한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톰 라이트는 정통 개혁주의의 기독론을 거부하며, “젊은 유대인”으로서의 예수를 새롭게 정립하고있다.


톰 라이트는 가현설적인, 혹은 반가현설적인 예수를 그리고 있다는 서구 기독교 사회의 예수에 대한 초자연성을 거부하며 좀 더 현실 세계 속에 깊숙히 관여하고있는 예수에 대한 이미지를 그리고자 예수에 대하여 '젊은 유대인'이라는 표현을 하고있다.


라이트는 이 젊은 유대인을 굉장히 위험한, 아니 무모하기 그지없는 소명에 사로잡힌 나머지 눈물을 흘리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성전을 모독한 뒤에 로마의 십자가에 달려 죽는 한 젊은 유대인으로서의 예수라고 말한다.(예수의 도전, 181)


라이트는 십자가의 예수에 대하여, 가시관에 둘러싸인 한 인간의 얼굴로서,소명을 품은 젊은 유대인이 메시아적 사명을 가지고 하나님의 초상화를 다시 그렸다고 말한다.(예수의 도전, 182)


톰 라이트가 사용하는 젊은 유대인이라는 표현은 매우 생소하다.


아마 톰 라이트는 예수를 유대인이라는 맥락에서 그리고 싶었으며, 예수의 삶의 모습이 로마에 떳떳하게 맞서는 용기있는 청년이라는 의미에서 젊다는 표현을 하고있다.


이는 매우 인간적인 표현이며, 예수를 유대교의 완성이라는 맥락 속에 집어넣고서 유대적 이스라엘이 따라가야할 모델로서 그리고 있는 것이다.


톰 라이트에게 예수의 성육신은 1세기 제2성전 유대교에서 해석되며, 성육신 하신 예수의 역할은 유대교와 대립 관계가 아닌 유대교의 완성을 위한 것이다.



새로운 도덕률을 만드신 예수님?


톰 라이트는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하시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시는 것은 그들에게 새로운 도덕률을 제시하시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예수님이 사시던 시대의 유대인들은 이미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높은 도덕률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들에게 더 높은 도덕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도덕과는 다른 새로운 도덕률을 제공하시기 위한 것이라고한다.


라이트는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행실이란 하나님의 주도권과 언약에서 마땅히 흘러 나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예수의 도전, 61)


이와같이 라이트는 유대인의 행실과 예수님의 행실을 같은 속성을 가진 동일한 맥락에서, 같은 목적을 가지고, 같은 방법으로 행하여 질 수 밖에 없는 것으로 본다.


라이트가 보는 예수의 행실은 유대인의 행동 방식의 연장 선상에 있는 것이다.


라이트가 보는 복음은 율법과 대립 관계가 아니며, 율법과 연속성을 가지고 있으며, 불연속적인 속성은 배제된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주의의 완성을 위하여 오셨는가?


톰 라이트는 돌아온 탕자 비유에서, 돌아온 탕자는 바벨론 포로에서 귀한 하는 둘째 아들로, 아버지는 예수님으로, 첫째 아들은 바리세인과 율법사로 묘사하고있다.


라이트는 아버지와 첫째 아들은 같은 집에 있으면서 평소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말한다.(예수의 도전, 52)


이를 직접적으로 표현하면, 예수님은 바리세인과 율법사와 평상시에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는데 바벨론 포로 생활하는 이들에 대한 수용에 있어서 의견 충돌을 빚었다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해석하는 탕자의 비유는, 항상 아버지 안에 있던 바리세인과 율법사들에게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을 수용하라는 것으로 이스라엘의 회복을 통한 유대주의의 완성을 말하고 있다.


라이트는 “네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것이로되” (눅15:31)의 말씀은  바리세인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었음을 암시하고있다고 본다.


즉 최후의 만찬 이전의 예수님과 바리세인 율법사는 아버지와 첫째 아들로서 평소에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보며 최후의 만찬은 둘째 아들을 받아들이는 잔치로 해석한다.


이러한 해석은 라이트만의 독특한 유대주의적인 새관점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


톰 라이트는 바울과 예수는 1세기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고 말한다.(예수의 도전, 76)


라이트는 바울이 그가 저술할 당시에 유대 유일신 사상의 한 분 하나님에 관해 말할 때와 똑같이 예수에 대하여 말하고있다고 말한다.(예수의 도전, 156)


라이트가 주장하는 유일신 사상은, 바울이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 안에 있었다는 것과 같이 예수도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 안에서 이해되어야한다는 것이다.


라이트가 말하는 유일신 사상은, 예수의 행적도 언약적 율법주의라는 1세기 제2성전 유대교의 맥락에서 해석함으로서, 예수를 유대주의의 틀 안에서 해석하려는 시도이다.


라이트가 말하는 유일신은 인간의 구원을 이루는 의의 근원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이다.


이는 구약의 이스라엘이 유일하신 하나님의 의를 근거로한 은혜 안에 머물렀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신약의 성도들도 유일하신 하나님의 의를 근거로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성도의 칭의는 그리스도의 공로에 기초한 것이며, 성도는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아야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


하지만 톰 라이트가 말하는 의의 근거는 불트만 학파인 케제만이 말하는 “하나님의 의”, 즉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이라는 의를 근거로 하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유일신 사상은 의의 근거를 성부 하나님께 통합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유대교의 성전으로서의 예수


라이트는, 성전은 유대교의 핵심적인 ‘성육신’의 상징이었으며, 예수는 진정한 성전이라고 말한다.(예수의 도전, 161)


라이트는, 예수님께서 지니신 소명의식의 중심에는 자신이 성전의 존재와 역할을 하도록 부름받았다고 믿는 신앙이 있었다는 것이고, 자신이 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하는 장소요 수단이라고 주장하셨다고 말한다.


예수는 자신의 소명이 새로운 성전으로 행동하는 것이라고 믿으셨다는 것이다.(예수의 도전, 165)


라이트는, 예수가 자신과 자신의 사명이 성전을 대체한다고 주장하셨다고 말한다.(예수의 도전120)


예수께서는 성전이 상징했던 것을 몸소 구현한 인물이라는 것이다.(예수의 도전,162)


이상에서 톰 라이트가 말하는 성전으로서의 예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언약적 울법주의 맥락에서 성전이 가졌던 의미가 예수로 대체되었다는 것이다.


라이트가 말하는 성전이 되신 예수는,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형성된 유대적 이스라엘의 완성을 의미한다.


라이트가 말하는 성전은 믿음을 통하여 참여되는 것도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성전은 둘째 아담으로서 첫째 아담이 실패한 성전으로서의 에덴을 완성시키신 것이며, 성령의 새창조로 시작된 하나님 나라 백성 가운데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라이트가 말하는 성전되신 예수는 단지 예수를 유대적 이스라엘로 편입시키는 방법에 불과하다.



종식된 유대교의 부활


톰 라이트는 예수가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유대교 세계관의 대표적인 상징에 사로잡히지 말라고 도전하는 의미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을 하셨다고 말한다.


1)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2) 내가 온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하려함이라


이는 오는 시대를 유산으로 받으려면 가족을 떠나야한다는 것이다.


즉 소유를 버리라는 명령이며, 이는 개인의 헌신을 시험하는 최고의 잣대로서, 수도원적인 도전의 원형으로 간주되었다고 말한다.


이는 다음의 이중적 경고와 함께 등장한다고 말한다.


1. 이스라엘은 성전을 짓고있는데 과연 완공할 수 있을까?


2. 이스라엘은 거룩한 전쟁을 하고 싶어 하는데 과연 이길 수 있을까?


이러한 경고는 양도 불가능한 것이 되어 버린 민족적 정체성의 싱징들에 사로 잡히지 말라는 촉구였다고 말한다.(예수의 도전, 87)


이는 예루살렘 성전 파괴와 유대주의의 종식을 설명하기 위한 무리한 적용이다.


라이트의 해석은 유대주의의 종식에 대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사라졌던 유대주의의 부활을 위한 해석이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주의의 종식을 선언하셨는데 반하여 톰 라이트는 다른 차원의 유대적 하나님 나라를 부활시키고있다.



예수의 소명과 유대교


톰 라이트는 예수가 유대교의 상징들을 몸소 구현하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고 말한다.


유대교의 상징로서는 성전과 토라, 말씀(word)과 영spirit)과 지혜(wisdom)들이 있으며, 예수는 야웨께서 온 세상을 위해 이스라엘 가운데 계시며 구원을 베푸신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라고 말한다.(예수의 도전, 179)


이와같이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는 유대교의 부활을 의미한다.



예수의 메시아적 소명


톰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 자신의 메시아적 소명은, 이스라엘의 대표로서 이스라엘이 할 수 없었던 이스라엘의 소명, 곧 세상의 빛이요 종이 되는 그 소명을 이루시는 것이었다고 말한다.(도전 129)


라이트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이스라엘이 이교사상과 싸우려는 욕망 자체를 타락으로 보셨는데 이는 이스라엘이 민족주의 혁명의 온상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며, 예수는 이스라엘의 대표로서 이스라엘의 고난의 문제를 스스로 짊어지시는 것이다.


여기서 라이트가 말하는 이스라엘의 고난은 로마에 대하여 싸우는 방식의 문제였으며, 예수는 이러한 고난을 해결하시고자 새로운 방식을 보여주셨다는 것이다.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의 메시아적 소명은 유대적 이스라엘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예수의 행동 방식


톰 라이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새로운 유대주의적 행동 방식으로 보고있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유대인들의 행동 방식으로는 다음의 세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헤롯방식으로서 로마와 타협하는 유형을 말한다.


두 번째는 이원론적 방식으로서 상황을 피해서 숨어버리는 방식이다.


세 번째로는 시카리(Sicarii)의 열혈당 방식으로서 로마와 정면 충돌하는 방식이다.


예수님의 행동 방식은 유대주의의 행동 방식과 다르며, 예수의 소명과 의제가 극적이고 충격적이라고 말한다.(예수의 도전, 48)


톰 라이트의 이러한 해석은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희생을 속죄 사역이 아니라 유대 이스라엘이 로마에 대하여 어떠한 방식으로 행동하여야 하는지 본을 보여준 방식 차원으로 해석한다.


톰 라이트가 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속죄 사역과는 관계없기에, 십자가를 통한 의도 성립되지 않으며, 전가될 의도 없기에 의의전가 교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로마에 대한 예수의 행동방식이 옳다는 것을 믿으라는 이야기로서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믿음과는 다른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유대주의적 행동방식에 대한 새로운 대안으로서, 그리스도가 유대주의를 완성시키기 위해서 오신 분으로 묘사된다.


톰 라이트는 예수가 유대적 이스라엘을 완성시키신 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반대하던 일부 랍비들은 주후 135년 이후에 메시아주의를 포기하고 사적인 종교로 변해서 토라의 준수를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고 주장한다.(예수의 도전, 205)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톰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는 유대주의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이를 근거로 기독교의 틀을 유대주의의 틀에 맞추어 재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톰 라이트의 “바울에 관한 새관점”은 개혁주의의 교리들을 분해하여 유대주의 맥락에서 다시 조립한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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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라이트가 말하는 믿음의 대상으로서의 예수



톰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의 “회개하고 믿어라”는 무슨 뜻인가?


1) 정치적 의미를 지니고있다?


톰 라이트는, 요세프스가 로마의 지휘관으로 예루살렘 귀족들에게 로마에 대한 반역을 하지 말도록 설득하면서 말한 “회개하고 나를 믿어라”와 같은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말한다.


요세푸스의 말은 정치적 의미를 지니고있는 것과 같이 예수님께서 회개하고 믿으라고 할 때에는 정치적 의미를 지니고있다는 것이다.(예수의 도전, 58)


예수님과 요세푸스의 차이가 있다면 예수님의 말씀에는 종교적이고 신학적인 차원이 있다는 것이다.(25)


2) 무엇을 회개하라는 것인가?


청중들에게 자신들의 의제, 즉 요세푸스와 같이 민족주의 혁명과 같은 터무니 없는 꿈을 포기하고 예수 자신이 보여주시는 이스라엘다운 모습, 하나님 나라의 도래, 하나님의 의제를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혁명의 방식을 포기하라는 것인지 민족적인 꿈을 포기하라는 것인지 불분명하다.)


톰 라이트는, 예수가 무장 혁명을 반대한 것은 이런 혁명은 신에게 불충성하고 이스라엘이 세상의 빛이 되길 바라는 그 분의 뜻을 거스르는 방법이란 이유로 반대를 표명했다는 것이다.(예수의 도전, 59)


여기서는 방법에 대한 포기를 촉구한 것이지 민족주의적인 꿈을 포기하라는 말은 아니었다.


라이트는 예수가 믿음을 말한 것은 예수 자신이 로마에 대하여 하려는 행동 방식에 대하여 믿고 신뢰하라는 것이라고 말한다.


라이트가 말하는 믿음은 민족주의적인 꿈을 이루기 위한 행동방식에 대한 방법론적 신뢰를 말하는 것이다.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의 십자가는, 로마 정부에게 어떠한 방식으로 저항해야하는지 삶의 방식을 보여준 것이며, 제자들에게 이렇게 하는 방식이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가야할 방식이며 이러한 방식이 효과있는 방식임을 믿으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예수의 희생을 유대인이나 아니면 인간의 죄악과의 관계성에서 풀어나가지 않고 오직 로마 정부와의 관계성의 문제에서 풀어나간다.


이는 톰 라이트의 유대 중심적 사고에서 나온 것이다.


따름의 대상으로서의 예수


톰 라이트는 예수의 행동 방식이 옳다는 것을 믿었을 때는 이러한 방식을 따라서 살아야한다고 말한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행위와 말을 통하여 새로운 정체성을 지닌 백성, 새로운 가족을 창조하고자 했으며, 이들에게 요구되는 유일한 조건은 예수와 그분이 전하는 메세지를 따르는 것이라고 말한다.(예수의 도전, 97)



믿음의 내용

톰 라이트가 말하는 믿음은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믿음과 많은 차이가 있다.

용어만 같을 뿐 내용에 있어서는 전혀 다르다.

톰 라이트는 예수가 제자들에게 자기를 믿으라고 할 때 그 믿음의 내용은 예수의 행동 방식에 대한 신뢰를 가질 것을 말하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믿음의 내용을 정리하기 위해서 몇 가지 개념을 간략하게 정리해보면서 살펴보고자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

톰 라이트가 말하는 그리스도가 걸어간 십자가에서의 처형은,그동안 이스라엘이 자신들을 압제하던 이들에 대하여 하였던 행동 방식을 수정하는 새로운 방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십자가는 세상에 대한 삶의 투쟁 방식을 제공하는 것이다.

(최후의 만찬의 의미)

톰 라이트는 최후의 만찬이 예수의 성육신 사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말한다.

라이트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의 포로생활을 청산시키고자 오신 것이라고 말한다.


포로생활의 청산 방법은, 유월절 식사를 통하여 유월절을 기념하며 이스라엘이 애굽의 종살이를 청산하였던 것을 상기시키면서, 바벨론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해방을 선포하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왜 십자가를 지셨나?

그동안 이스라엘은 로마와 타협하는 이들도 있었고, 숨어 피해 다니는 이들도 있었고, 또한 격렬하게 투쟁하는 이들도 있었는데, 이러한 방식들이 모두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최후의 만찬을 통하여 포로생활의 종식과 더불어 유대적 이스라엘이 앞으로 어떻게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가야하는가를 보여주는 십자가에서의 희생이라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단일 계획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함으로서 범한 죄로 인한 이스라엘의 국가적 저주를 제거하는 죽음이었다.(박영돈. 톰 라이트 칭의론 다시보기, 136)


예수가 제자들에게 자신을 믿으라는 것은, 이스라엘이 더 이상 똑같은 범죄를 하지 않기 위해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공할 자신의 방식을 믿으라는 것이다.

예수는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서, 십자가를 통한 희생방식이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방식이고, 이스라엘이 이러한 방식을 따라 살아갈 때 유대적 이스라엘을 넘어서 이방 세계로 확장된 이스라엘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라이트가 말하는 십자가에서의 희생은 예수가 자신의 죽음을 통해 이스라엘의 구속과 온 세상의 구속이 성취될 것이라고 믿었음을 보여주는 행동이라는 것이다.(예수의 도전,169)


예수는 누구에 의하여 희생 당했나?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의 죽으심은 로마에 대한 반역에 의한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 민족이 로마에 대한 반역을 어떠한 방식으로 하여야하는지 방식의 본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

(예수의 도전,123)

예수의 죽음은  로마에 의한 정치적 희생이었으며, 예수님의 로마에 대한 의제는 이스라엘 민족이 성전을 회복하고자하는 로마에 대한 의제와 같았다.


라이트는 예수님은 성전을 회복하고자 로마에 대한 반역을 죽음을 통하여 하신 것으로서, 예수님은 혁명적인 왕으로 처형되었다는 것이다.(예수의 도전,131)


라이트는 예수가 성전을 회복하기 위해서 혁명적으로 처형을 당한 것을 믿고서 이스라엘 민족도 자신의 방식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방식이라는 것을 믿고서 이를 따르는 삶을 살 것을 요고한다.


톰 라이트는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에 처형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는 예수를 죽인 주체가 유대인이 아니라 로마였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그리스도는 유대인에 의한 희생이 아니라 세상 정부를 대변하는 로마에 의한 희생이라는  것이다.

라이트는 예수가 이스라엘을 해방 시키기 위한 메시아로서 로마 총독을 대면했으며 로마 군대에 의하여 처형된 인물이라고 말한다.(예수의 도전, 202)



부활의 의미


라이트는 예수가 처형 당한 후 하나님이 예수의 로마에 대한 혁명적 행동방식의 정당성을 입증하시기 위해서 예수를 부활시키셨다고 말한다.(예수의 도전, 25)


톰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의 부활은 로마에 대항하여 로마에 처형당한 예수의 행동 방식이 옳았음을 하나님께로부터 증명받은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옳다고 인정받은 표시로서의 부활은 이스라엘을 포로 생활에서 위대하게 복귀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에스겔 37장 시대 이후 ‘부활’은 다양한 의미를 지녔으며, 이는 포로 생활에서 위대하게 복귀하는 것과 언약이 갱신되는 것을 나타내는 이미지였다고 말한다.


부활은 이스라엘이 지닌 죄와 죽음의 문제(포로 상태)가 해결되었고 야웨께서 자기 백성과 맺은 언약을 갱신하셨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이미지였다고 말한다.(예수의 도전,198)


이와같이 톰 라이트는 부활을 유대적 이스라엘의 정치적 상황에 적용시킴으로서,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처형당함이라는 행동 방식이 옳은 것이기에, 포로에서 해방된 이스라엘은 예수의 행동 방식을 믿고서 이를 따라서 희생적으로 살 때 더 이상의 포로생활을 하지 않게 되리라는 것이다.


신약의 교회

라이트는, 오늘날의 교회는 예수가 이루신 과거의 예수와 이스라엘의 관계를 모델로 삼아 세상을 위한 존재가 되어야 하며, 예수께서 당시 유대교에서 행하시고 말씀하셨던 모든 것은, 오늘날 교회가 세상을 위해 어떤 일을 하고 어떤 모습을 지녀야하는지를 적용해야하는데, 이는 예수의 본을 따라서 해야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도전73)


톰 라이트가 말하는 교회는 이방인 가운데 세워지는 확장된 이스라엘이며, 톰 라이트는 이러한 교회의 중심에는 유대인들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확장된 이스라엘로서의 교회는, 예수를 삶의 모본으로 본을 받는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확장이 되어야한다고 말한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신약의 교회의 믿음은 유대교 안에서 예수의 행동 방식이 하나님께 인정받은 옳은 방식임을 믿으라는 것이다.


나가는 말

메이첸은 예수의 행하신 일보다는 예수 자신을 믿어야하고 예수의 죽음보다는 예수의 인격을 믿어야한다고 말한다. (기독교와 자유주의, 그레샴 메이첸, 76)

예수가 하시는 말씀을 따르는 것은 아담의 후손인 인간에게는 매우 절망적일 수 밖에 없다.

산상수훈은 표면적인 율법보다도 더욱 강화된 내면의 문제를 다루고 있기에 율법도 지킬 수 없는 인간에게는 절망적인 말씀일 수 밖에 없다.

산상수훈은 한편으론 인간이 본질적인 죄인이라는 것을 깊이 깨닫게 해주며, 다른 한편으로는 베드로와 사도들의 변화된 모습과 같이, 성령의 도우시는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감당하여야 할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율법이 하나님의 언약 안에 머물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는 새관점의 주장을 신약에 적용한다면, 산상수훈은 신약시대에 하나님의 의(케제만이 주장하는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의) 안에 머물기 위한 조건이 되는 것이며, 이는 오히려 율법의 멍에보다도 더욱 무거운 멍에을 지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예수의 희생의 방식을 믿으면서 이러한 방식을 따라서 살 것을 말하지만, 성전도 상실된 신약 시대에 이러한 방식으로는 하나님의 의 안에 머무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의 행동 방식을 믿고 따르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삶으로는, 최종적 구원에 이르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에, 예수를 더욱 믿을 수 없는 인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더군다나 한때 새관점을 강하게 비판했던 것과 달리, 새관점을 옹호하는 방향으로 선회한 김세윤 교수는, 성화를 새관점의 율법의 역할과 대비시키면서 "산상수훈은 이중사랑(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같이 사랑하라)에 대한 강해로서 서기관과 바리세인보다도 더 나은 의를 행해야한다"고 절망적인 방향을 제시하고있다. (칭의와 성화, 김세윤, 118)

이러한 새로운 기준은 성화를 구원의 조건이 되는 행함의 원리로 바꾸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

톰 라이트의 메시아 사상 비평


김원호(dent4834@hanmail.net)


메시아라는 용어는 이방인인 우리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개념이지만 유대인들에게는 절대적으로 중요하면서도 그들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개념이기에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과연 어떠한 메시아였는지는 우리에게도 그리스도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기름부음 받은 자로서의 메시아, 즉 그리스도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성경에 대한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


이제껏 기독교 안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는 교파 간에 큰 차이가 없었지만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이제껏 우리가 이해하였던 개념과 다른 개념의 메시아를 소개하고있다.


톰 라이트가 예수를 어떠한 메시아로 규정하는지 살펴봄으로서 톰 라이트가 말하는 새관점이 정통 개혁주의와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재정의된 메시아개념


톰 라이트는 메시아의 개념과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재정의한다.


재정의된 메시아는 포로 상태에서 귀환한 백성의 중심에 있었다.


예수님은 자신이 귀환한 포로의 중심에 있었기에 자신을 재정의된 메시아라고 생각하게되었다는 것이다.


이전의 왕으로서의 메시아는 유대적 이스라엘 성전을 관리 보수(?)하였지만 재정의된 메시아는 혁명적으로 재정의된 하나님 나라 개념에 맞는 것이다.


재정의된 하나님 나라는 포로 상태에서 귀환한 백성으로 구성되었다.(예수의 도전 116)


이와같이 톰 라이트는 예수를 이스라엘을 포로 상태에서 해방시키신 분으로 규정하며 예수님을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고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메시아로 한정 시키면서 메시아를 포로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중심의 혁명적인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방인인 우리에게 톰 라이트가 말하는 메시아로서의 예수는 어떠한 분이신가라는 질문을 낳게된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메시아의 의미


1. 메시아’라는 단어는 ‘신성’의 의미를 가졌다.


2. 예수는 자신을 메시아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그 분이 자신을 신적인 존재로 생각하셨다는 의미로 여겨진다. (예수의 도전 156)


3.제 2성전 유대교인들은 예수가 부활하시기 이전에  이미 예수를 메시아라고 생각했었다. (예수의 도전108.)




유대인들이 기대하였던 메시아


라이트가 전하는 유대인들이 기대하였던 메시아는


1. 이방인을 물리치고

2. 성전을 재건하며

3. 하나님의 공의를 온 세상에 실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님은


1. 자칭 메시아가 이방인의 손에 죽으시고

2. 성전을 재건하지도 못하셨고

3.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거나 공의를 세상에 실현시키지 못했다.

(예수의 도전 203)


여기서 라이트는 예수가 이방인의 손에 죽었다고 말한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는 분명하게 유대 지도자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리스도를 죽였다고 전하고있다.


그러나 라이트는 예수의 희생을, 유대인이 아닌, 세상을 대변하는 로마 정부에 의한 것으로 규정함으로서 메시아이신 예수를 세상 정부를 대변하는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신 분으로 재정의하고있다.



예수는 어떤 의미에서 메시아인가?


1) 단순한 부활 때문이 아니다. 제2성전 유대교인들은 예수가 부활하시기 이전에  메시아라고 생각했었다. 제자들이나 제2성전 유대인들이 부활을 통하여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생각했던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이전에 예수님이 (유대주의적)메시아라고 생각했지만 부활은 이러한 생각을 확증해 주는 사건이었다.


2) 예수의 임무는 이전의 왕족들이 가지고 있었던 임무를 완성하는 것이었다. 예수께서 진정한 메시아라는 믿음은 아주 초창기 기독교에 뿌리 박혀있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께 사용한  ‘크리스토스’(Christos)라는 단어는 왕족의 색체를 지니고있었지만 이들은 위험을 감수하고 예수께 이 용어를 사용하였다.


3) 예수께서는 이스라엘의 역사가 (자신이 사역하는 시간에) 초점에 도달했다고 믿으셨다. 즉 포로상태가 절정에 도달했고 이 중대한 시점에 자신이 이스라엘의 운명을 짊어진 인물이라고 믿으셨다. 예수는 이 운명을 자신의 것으로 삼고 메시아로서 이 임무를 완수하셨다.(예수의 도전 105, 128)


4) 예수는 성전을 재건하시기 위하여 오신 분이시다. 예수가 메시아이심을 나타내는 가장 확실하고 명백한 증거는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하신 행동에서 찾을 수 있다. 예수님의 성전에서의 행하심은 개혁의 시도로 보아서는 안되고 심판의 상징으로 보아야한다.


제2성전기의 유대인이 생각하는 메시아는 이스라엘을 구출하고 세상에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는 일이었다.

유대 역사의 왕권을 가진 이들은 첫째로 성전을 짓거나 보수할 것이고 둘째는 적을 상대로 결정적인 전투를 벌이는 것이다. 유대 역사의 왕들은 적과의 싸움과 동시에 성전을 짓거나 보수하는 일을 하였다. 메시아는  궁극적으로 유대 역사의 왕들이 하는 일을 완전하게 행하시는 이로 인식되었다.(예수의 도전 108)


예수님은 이러한 과업을 이어받아서 하셨다면 예수님은 메시아로서의 역할을 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소명이 이스라엘의 메시아가 되는 것이라고 줄곳 믿으셨던 것으로 보인다.(예수의 도전 116)


5) 메시아는 혁명적이다. 예수께서는 혁명적 메세지를 전하였는데 이 이중의 혁명적 메세지는 강경파의 단순한 혁명적 메세지가 아니라 혁명의 의제까지 포함하면서 다른 모든 의제를 뒤엎을 메세지다.이러한 혁명을 통하여 예수께서는 자신의 메시아적 역할과 구속적 고난의 소명이 모두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했다.(예수의 도전 72)


6) 예수는 십자가에 대한 소명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메시아로 부름 받았다는 예수의 믿음은 십자가에 대한 예수의 소명의식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이다.(예수의 도전117)


여기서 라이트는 메시아개념을 십자가와 연결시킨다. 여기서 메시아라는 개념은 왕의 개념과 연결되며 왕의 역할과 의무는 성전을 관리, 보수하는 일이었기에 메시아의 사역은 성전을 건축하는 일과 연결된다는 것이다. 예수가 메시아로 부름을 받았으며 또한 십자가에 대한 소명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십자가를 통하여 성전을 건축하는 일이되는 것이라고 라이트는 말한다.


7) 예수는 이스라엘의 대표이시다. “예수께서는 이스라엘이 이교사상과 싸우려는 욕망 자체를 타락으로 보셨는데 이는 이스라엘이 민족주의 혁명의 온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이스라엘의 대표로서 이스라엘의 고난의 문제를 스스로 짊어지시는 것이다.


예수는 이스라엘의 대표로서 이스라엘이 할 수 없었던 이스라엘의 소명, 곧 세상의 빛이요 종이 되는 그 소명을 이루시는 것이다.이건이 바로 예수께서 이해하셨던 자신의 메시아적 소명이다.(예수의 도전 109,  129)


8) 예수는 메시아적 저주(Messianic Woes)를 감당하신 분이시다. 구원이 실현되기 전에는 심한 고난의 시기를 거친다. 즉 대환란이 닥칠 것이고, 그것을 통해 구속, 새 시대, 죄 용서가 이루어질 것이다. 슈바이처는 예수께서 이스라엘에 도래하는 시험(메시아적 저주)의 때를 보셨고 예수께서 이 메시아적 저주를 온 몸으로 받으려고 하셨다는 것이다.(예수의 도전 116)



메시아의 실현을 위한 예루살렘 입성


라이트는 예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은 야웨께서 시온으로 귀한 하신 것을 분명히 하는 것이며, 예루살렘 입성은 예수께서 메시아적 소명을 감당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라이트가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이 뜻하는 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왕으로서의 상징적 행동이다.(예수의 도전, 110) 유다스 마케베우스가 이방인을 물리치고 성소에 참 예배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들어올 때 야자수 가지를 흔들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행동도 이와같이 왕으로서 행하신 것이다?(마카비후서 10:7)


2) 오랜 기다림 끝에 야웨께서 시온에 복귀하는 것을 상징하고 구현하는 것이다.(도전169)


3)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장면은 야웨께서  시온으로 귀환하셔서 자신의 백성들과 (언약백성으로 제대로 살았는지) 정산을 하고 모든 일을 결말짓기 위해 그들을 방문하시는 것이라고 말한다.(도전172)


4) 야웨께서 마침내 되돌아 오신다는 경고다. 야웨께서 예루살렘에  되돌아 오신 것은 “평화에 관한 일을  거부했던 자들에게 내려질 끔찍한 심판을 의미한다.(예수의 도전, 172)


5)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마태복음 25장의 왕/주인의 비유에 대한 것이다.


6) 예수님은 자신이 장차 야웨의 우편에 앉게 될 것을 받아들인 후에 자신을 통하여 메시아의 소명이 실현되는 것을 예견하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


7) 야웨께서 심판자이자 구속자로 시온에 돌아오실 것이라고 예언하고서 성전파괴를 상징하고 최후의 출애굽을 경축하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신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이 이야기를 몸소 구현하는 것이다. (예수의 도전 180)



예수의 이중의 혁명적 메세지


라이트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혁명적 메세지를 전하였는데 이 이중의 혁명적 메세지는 강경파의 단순한 혁명적 메세지가 아니라 혁명의 의제까지 포함하면서 다른 모든 의제를 뒤엎을 메세지다.(예수의 도전, 72) 예수의 혁명적 메세지의 특징은 다음과같다.


1) 예수가 이루고자하는 메시아적 소명은 물리적인 전쟁에 의한 혁명 프로그램의 참여가 아닌  예수의 메시아적 소명(아래 참조)을 예수의 방법을 통하여 실현한다. 예수의 혁명의 방식은 열혈당처럼 물리적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다른 뺨도 돌려대고 십리도 가라는 메세지의 실천이다.(예수의 도전, 122)


2) 예수의 혁명은 유대적 이스라엘의 성전회복을 통한 메시아적 소명의 성취를 말하고있다. 유대적 이스라엘에 대한 메시아적 성취는 유대인들이 포로에서 귀환함과 동시에 예수가 직접 유대적 이스라엘의 성전이 되심으로 포로에서 귀환한 백성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이루어가는 것이다.(예수의 도전, 116)


3) 기존 체제를 전복하는 예수의 의제의 중심에는 제자들에게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따르고, 자신이 실현하는 대안적인 나라(즉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에 동참하라는 요청이다.



톰 라이트의 메시아 사상 비평


포로에서 귀환한 백성들을 중심으로한 하나님 나라


라이트가 예수님께 대하여 사용하는 “메시아”라는 용어는 일반적으로 기독교에서 생각하는 의미와 많은 차이가 있다.


라이트가 말하는 메시아는 유대주의적 이스라엘의 한계를 받아나지 못하고있으며, 예수를 유대인을 중심으로한 지상에서의 유대적  하나님 나라를 완성시킨 유대주의적 메시아 사상을 가지고 있다.


라이트는 예수의 혁명이 유대적 이스라엘의 성전회복을 통한 메시아적 소명의 성취라고 말한다.


라이트에 의하면, 유대적 이스라엘에 대한 메시아적 성취는 유대인들이 포로에서 귀환함과 동시에 예수가 직접 유대적 이스라엘의 성전이 되심으로 포로에서 귀환한 백성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이루어가는 것이다.(예수의 도전 116)


톰 라이트의 메시아의 개념은 하나님 나라의 개념과 긴밀하게 연관되어있다.


라이트가 보는 예수는 포로 상태의 이스라엘에 혁명적인 하나님 나라를 세운 메시아이시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에는 포로 상태에서 귀환한 백성이 중심에 있다.




재정의된 메시아


톰 라이트는 예수가 귀환한 백성들의 한 가운데 있었기에 자신을 재정의된 메시아라고 생각하게되었다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메시아는 왕으로서의 개념으로서 유대적 이스라엘 성전을 관리 보수하는 역할을 하며, 이스라엘 성전을 중심으로하는 혁명적인 나라를 세우는 사람이었다.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는 스스로 유대적 이스라엘의 성전이 되심으로 귀환한 백성들의 중심에 설 수 있었으며, 유대적 이스라엘을 중심으로하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세우는 분이셨다.


여기서 라이트는 예수의 메시아적 소명을 민족적 이스라엘로 한정 시키고 있다.


이는 그가 민족적 이스라엘을 하나님 나라의 실체로 보고있기 때문이다.


정통 개혁주의에서 보는 유대적 이스라엘은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며,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한 신자들 가운데 임한 나라를 하나님 나라의 실체로 보고있다.


하지만 라이트는 신자들의 모임인 교회를 유대적 이스라엘의 확장 개념으로 보면서 개혁주의와 차이를 보이고 있다.


톰 라이트의 메시아 개념과 하나님 나라 개념은 톰 라이트가 유대중심적 신학자임을 보여주는 증거들이다.



예수, 제2성전 유대교에서의 해방자


톰 라이트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이전에 제2성전 유대교 안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이는 톰 라이트가 제2성전 유대교의 율법적 특징이 언약적 율법주의이며, 유대인들은 구원을 얻기 위해서 율법을 지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안에 머물기 위해서 율법을 지켰다는 신율주의적 사고 안에서 그리스도를 보고있었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구원을 가져다주시는 분이 아니시며, 단지 유대인들이 구원의 은혜 안에 제대로 머물기 위해서 포로된 상태에서 해방을 주시는 유대주의적 이스라엘의 해방자로서의 메시아를 말하고 있다.



이방인의 손에 죽은 메시아


톰 라이트는 예수를 이방인, 즉 로마인들에 의해 처형된 메시아들 중의 하나로 묘사하고있다.(예수의 도전 203)


부활은, 다른 메시아들은 실패했는데 예수가 메시아로서 성공했다는 근거가 된다고 말한다.


이와같이 라이트는 예수가 유대인, 즉 이스라엘의 새로운 희망을 위해서 세상을 대변하는 로마 정부에 의하여 희생되었다고 규정함으로서 유대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한 메시아로 규정하고있다.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의 죽음은 이전까지 유대인들이 로마에 대하여 타협하거나, 도피하거나, 투쟁하는 방식이 아닌, 희생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본을 보여주신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라이트가 보는 그리스도의 죽음은 인류의 죄를 대신한 속죄 사역도 아니며, 유대인들의 손에 죽지도 않았으며, 속죄 사역을 통한 의의 전가도 잘못된 교리라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루터는 이신칭의 교리가 교회의 존립을 좌우하는 문제라고 말하고 있지만, 톰 라이트는 루터의 생각이 전적으로 잘못된 사적인 생각일 뿐이라며 종교 개혁의 교리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다.


예수가 유대인들에 의하여 죽었다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하면서 인간이 얼마나 부패한 죄인이가를 보여주는 것이기에, 인간의 부패성을 부정하며 유대적 이스라엘을 옹호하는 라이트가 받아들일 수 없는 사실이다.


혁명가로서의 메시아


라이트에 의하면 예수는 이스라엘이 포로 상태에서 돌아오는 일이 자신의 사역 안에서 자신의 사역을 통하여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예수의 도전, 75)


라이트는 예수를 포로 상태의 이스라엘에 혁명적인 하나님 나라를 세운 메시아로 규정하고있다.


라이트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혁명을 통하여 자신의 메시아적 역할과 구속적 고난의 소명이 모두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했다.


라이트는 산상수훈을 혁명의 의제가 포함하고있는 예수가 전하는 메세지로 보고있다.


라이트가 말하는 산상수훈은 열혈당과 같이 물리적 힘에 의한 것이 아닌 희생적 메세지다.


라이트는 예수가 전하는 혁명적 메세지는 포로에서 귀환한 백성들을 중심으로 세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삶의 지침으로 제시한다.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의 혁명적 메세지는 대안적인 하나님 나라에 동참하기 위해서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의 희생정신을 본받아서 예수를 따르라는 것이다.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는 구체제의 이스라엘을 전복하고 새로운 체제로서의 대안적 하나님 나라를 세운 분이시다.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유대 이스라엘의 새로운 체제다.


라이트가 말하는 메시아는 이전의 왕으로서의 실패한 메시아와 혁명에 성공한 메시아로 구분함으로서 메시아 개념을 이스라엘의 민족적 해방의 관점으로 국한 시킨다.


혁명적으로 재정의된 하나님 나라는 유대적 이스라엘 성전을 관리 보수하였던 이전의 왕으로서의 메시아가 제공하였던 개념과는 다르다.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은 그리스도의 몸된 신자들이 아닌 포로에서 해방된 이들이 중심이다.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기 위한 조건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은 죄사함을 받은 이들과는 관계가 없다.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의 구속은 아담의 후손의로서의 인간의 보편적 죄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민족적 행동방식과 포로생활에 관한 것이다.


라이트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속죄 사역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 정부에 대항하는 새로운 방식의 투쟁이다.



왕로서 성전을  재건시킨 메시아


라이트는 예수님이 유대인이 기다리던 성전을 재건하신 분이라고 기술하고 있다(예수의 도전, 108)


유대인에게 메시아는 성전을 재건하시는 분이어야했기에 예수님은 성전에서 하시는 행동을 통하여 자신이 메시아이심을 증거한다고 말한다.


이전의 왕들은 메시아로서 성전을 건축하는 일을 하였지만 예수는 스스로가 성전이 되셔서 왕으로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신 분이다.


라이트는 사도신경에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만 호칭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며, 시편2편과 사무엘하7장에 비추어보면 예수는 유대인을 구출하여 왕으로 오신 분이라고 기술한다.(하나님은 어떻게 왕이 되셨나, 351)

라이트는 메시아라는 조건을 성전 재건과 연관시키고있다.


라이트가 예수님께서 진정한 메시아라는 인식은 역사적인 이스라엘의 회복이라는 시오니즘적 메시아사상을 말하는 것이다.


라이트가 주장하는 메시아로서의 싸움은 한마디로 유대교적 메시아 사상을 벗어나지 못하고있다.


U라이트가 묘사하는 메시아 개념은 유대적 이스라엘의 회복이며 이러한 회복은 유다 마카베우스 같은 열혈당의 폭력적 모습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비폭력적 희생적 방법으로 성취되며,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를 통하여 말씀하신 것을 손수 실천하는 본을 보여주신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예수님의 비폭력적 메시아로서 성취한 것은 유대적 방식의 하나님 나라이다.


톰 라이트는 예수님께서 메시아의 싸움을 싸우시기 위하여 죽음의 길을 걸으셨다고 말하고있다.(도전130)


이런 논리라면 김세윤 교수가 지적했듯이 새관점이 기독교를 유대교에 편입시키는데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유대교가 유대인만을 위한 종교라는 개념이 상실되는 또 다른 문제에 직면하게된다.

라이트는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메시아로 오셔서 이 세상의 왕이 되셨다는 논리를 전개하지만 이런 논리는 기독교를 유대교에 편입시키려는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예루살렘 입성이 뜻하는 것


라이트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장면은 야웨께서  시온으로 귀환하셔서 자신의 백성들이 언약백성으로 제대로 살았는지 정산을 하고 모든 일을 결말짓기 위해 그들을 방문하시는 것이라고 말한다.(예수의 도전172)


시온으로서의 예루살렘은 성전의 관점서 접근하여 한다.


아담은 성전으로서의 에덴에서 실패를 하였지만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성전으로서의 예루살렘에서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순종으로 구속사역의 삶을 마감하셔야만 했다.


라이트가 주장하는 것과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은혜 안에 제대로 머물었는지를 정산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순종한 아담의 후손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질 언약 백성의 모형일 뿐이지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는 실체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라이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실체적인 하나님 나라로 보고, 예수님이 이루시는 새로운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중심은 포로에서 귀환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라고 보고 있기에 이러한 해석이 나오는 것이다.


라이트는 예수님 자신이 장차 야웨의 우편에 앉게 될 것을 받아들인 후에 자신을 통하여 메시아의 소명이 실현되는 것을 예견하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고 말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예수님이 인간으로서 선지자적 소명을 가지고있었다는 말과 유사하다.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완전한 사람으로서 죄인을 구속하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오신 것이다.


아담은 성부 하나님께 범죄하였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성부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 아니시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불가능한 것이다.


구속사가 제거된 라이트의 관점이라면 구태여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신  예수님의 성육신이 아니어도 선지자 가운데 한 사람을 택하여 할 수 있는 것이다.


라이트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이방인을 물리치고 성소에 참배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들어온 유다 마카비우스와 마찬가지 차원의 왕으로서의 행동으로 규정한다.


이는 이스라엘의 실패한 여러 왕들을 실패한  메시아로 보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의 신격을 격하 시키는 것이다.


종종 라이트는 자신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정한다는 오해를 받는다고 항변하면서 이는 자신이 받는 모함이 마치 스데반 집사가 모함을 받는 것과 유사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님의 역할은 신격을 지니지 않은 선지자도 할 수 있는 역할로서, 마치 인간이신 예수님이 신의식에 의해서 하나님의 선택으로 신이 되셨다는 개념과 유사한 논리를 전개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라이트의 논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인정하지 않기에, 구태여 예수님이 하나님의 위격을 가질 필요가 없는 것이다.


라이트는 제2성전 유대교라는 기반 위에서 초기 기독교를 해석한다.


라이트가 말하는 ‘초기’ 나 ‘아주 초창기’는 기독교가 교리의 체계를 갖추기 전의 상태를 말한다.


라이트는 어거스틴 이후의 기독교 즉 체계적으로 교리가 갖추어지기 시작한 이후의 교리에 대하여 부정적 자세를 취함으로서 개혁주의의 기반이 되는 어거스틴의 해석과 충돌을 일으키는 것이다.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

톰 라이트의 예수에 대한 해석은 어디에서도 마지막 아담이라는 관점에서 해석되지 않는다.

또한 이스라엘 성전을 성전으로서의 에덴과 대비시켜 해석하지 않는다.

톰 라이트가 해석하는 예수는 아담의 범죄와는 관계가 없으며, 오직 아브라함으로부터 출발한다.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예수는 예수의 모형인 처음 아담으로부터 해석되어져야한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메시아 사상은 에덴에서의 아담의 실패와 관련지어 해석되지 않는다.

또한 이스라엘을 에덴과의 유비적 관련성에서 해석하지 않는다.

아담이 하나님과 행위 언약 관계에 있었다는 것과 이스라엘도 하나님과 행위 언약 관계에 있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마이클 호튼은 톰 라이트의 새관점이 언약에 대한 잘못된 해석으로부터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언약의 관점에서보면 성경은 창세전 구속 언약, 아담 언약과 노아 언약, 아브라함 언약, 모세 언약, 다윗 언약, 선지자 언약, 새 언약이 유형학적으로 차례로 전개되고있음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라이트는 성경을 단지 이야기라는 하나의 틀에서만 해석하면서 유대적 이스라엘을 그 중심에 둔다.

성경 해석의 출발이 되는 창세기 1~3장은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해석하는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창세기1~3장과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관련성을 제외시킨 해석으로, 유대적 이스라엘을 제2성전 유대교라는 역사적 예수 탐구 틀에서 자의적으로 해석한다.

참된 메시아로서의 예수는 유대적 이스라엘의 문제 이전에 처음 아담의 에덴에서의 실패로부터 해석되어져야한다.


부활을 통하여 메시아되신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메시아되심은 부활을 떼어놓고서 생각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는 부활을 통하여 새롭게 태어난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새이스라엘이 되신다.


성도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로서 대제사장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약속의 성취이다.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행 13:33)”


낳았다는 말은 부활을 지칭을 지칭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냐(히1:5)”라고 기록하고있다.


5장에서도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히5:5)” 기록함으로서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분이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은 것을 보게된다.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분은 유대적 이스라엘 만의 대제사장이 아니라 모든 신자를 대표하시는 것이다.


로마서에서도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 1:4)”라고 기록함으로서 하나님의 아들되심의 근거를 부활에 두고 있다.


그리스도의 메시아되심은 부활의 첫 열매되심으로 모든 믿는 자들에게 더 이상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해방케하심 때문이다.


부활은 톰 라이트가 말하는 바와 같이 “예수가 로마에 저항하는 행동방식이 옳음을 인정받은 것”이라는 편협되고 왜곡된 유대중심적인 해석으로 제한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낳으신 새이스라엘로서의 그리스도는, 성도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초대하셨으며, 이는 혈통으로난 유대적 이스라엘이나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이 중심이 된 하나님 나라 백성이 아니라, 믿음을 근거로한 새로운 이스라엘로서의 하나님 나라 백성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일으켜 아들 삼으신 것은 구약의 약속을 근거로 한 것이며, 그리스도는 부활로 인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심으로서, 유대적 이스라엘을 넘어서, 모든 믿는 자의 맏형이 되셨다.


바울이 전하는 그리스도는 새로운 하나님 나라 백성의 탄생을 통하여 모든 믿는 자의 대표되시는 메시아이시다.



결론


바벨론 포로의 귀환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가리키지만, 이는 궁극적으로 참된 이스라엘 즉  참다윗 왕이신 예수의 구속사역으로 말미암는 종말론적 메시아왕국을 지향하고있다.


유대적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로부터의 귀환을 통하여 역사적 이스라엘의 회복을 시도하였지만 죄의 문제는 바벨론 포로 이전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교회가 진정한 하나님 나라가 되려면 대속적 사역을 통해서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새관점에서는 예수가 삶의 본을 보여줌으로서 모델이 되어 율법을 대신하는  산상수훈을 주셨다고하지만 아담의 후손으로서의 본질적 죄성을 극복할 수는 없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인간의 능력의 부족, 즉 전적인 부패와 전적인 무능력을 인식시킴으로서 대속적 죽음을 통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요구될 수 밖에 없음을 증명해주는 것이었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인간 스스로의 능력에 의지하여, 새로운 모델을 따라서, 산상수훈을 새로운 율법으로 삼고서, 종말론적인 이스라엘을 확장시키면서,  이를 신약의 교회와 연계시키려는 시도를 하고있다.


인간은 전적으로부패한 아담의 후손으로서 죄를 짓기 이전부터 본질적인 죄인이었기에 진정한 메시아는 처음 아담의 죄를 해결하는 마지막 아담이 되어야만 한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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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 따름의 대상인가?


김원호(dent4834@hanmail.net)


예수가 나에게 어떠한 분이신가는 신앙인에게 꼭 필요한 질문이다.


최근에 들어와서 예수가 따름의 대상으로 새롭게 조명되고있다.


최근 톰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는 이제껏 개혁주의에서 말하여왔던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는 우리에게 의를 전가시켜주신 분도 아니다.


그렇다면 톰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가 도덕적 윤리의 기준을 제시해주는 따름의 대상이라면 어떠한 문제가 있는지 살펴보고자한다.



1. 새로운 도덕률을 만드신 예수님


톰 라이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하시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시는 것은 그들에게 새로운 도덕률을 제시하시려는 것이다.


● 예수님이 사시던 유대인들은 이미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높은 도덕률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들에게 더 높은 도덕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도덕과는 다른 새로운 도덕률을 제공하시기 위한 것이다.


●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행실이란 하나님의 주도권과 언약에서 마땅히 흘러 나오는 것이다.(예수의 도전, 톰 라이트, 61)


톰 라이트는 유대인의 행실과 예수님의 행실을 같은 목적을 가진 다른 차원의 동일한 맥락에서 기술하고있다.


유대인의 행실과 예수님의 행실이 하나님의 주도권과 언약이라는 동일한 맥락 안에 있는 것이라면 유대인의 행실과 예수님의 행실이 같은 속성을 가지고 같은 목적과 방법으로 행하여 질 수밖에 없다.


부자 관원의 예를 들어보자.


톰 라이트는 부자 관원에게 요구되었던 것은 예수를 따르는 것으로서 이는 토라를 성취하는 것이며 토라를 준수하는 방식으로 예수를 따르는 자는 칭의 될 것이라고 말한다. (Jesus and the Victory of God, N. T. Wright, 303, 307)


토라를 잘 준수하는 것이 중요하며 이와같은 방식으로 예수를 따르는 자들은 칭의될 것이라고 말한다.

라이트는 예수를 따름에서 예수가 성전된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이전에 성전에서 제공하였던 속죄의 방식으로서, 예수를 따름으로서 이전에 성전에서 얻을 수 있었던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challenge of Jesus 112)

톰 라이트에게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마땅히 실천하는 따름과 하나님 나라의 요원이 되어 그 나라를 선포하고 그 실천을 수행하는 것은 일종의 칭의를 위한 공로로 드러난다.


라이트에게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공로적 행위로서, 종말에 이루어질 최종적 칭의의 조건이 된다.


김세윤 교수는 라이트의 종말론적 칭의 개념에 동의하면서 성화를 최종적 칭의를 위한 현재적 칭의의 관점에서 보고있다.


2. 도덕적 변화


메이첸은 “기독교와 자유주의”(86)에서 “기독교가 제공하는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이었으며 죄로부터의 구원은 즉각적인 도덕적 변화도 수반한다”고 말한다.


도덕적 변화는 훈련과 연습을 통하여 나오기 이전에 열매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자신의 저서 "그리스도인의 미덕"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삶은 훈련과 연습을 통한 삶이 되어야한다고 강조한다.

이는 성령의 열매로서의 삶과 차이가 있으며, 삶의 주체가 성령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이며, 성화의 과정에 훈련과 연습이라는 방법을 도입하는 것이다.

하지만 도덕적인 삶은 외적인 행동 이전에 내면의 변화에서 나오는 것이다.

내면의 변화가 없는 도덕적 삶은 바리세인들의 위선(hypocrite)과 다를 바가 없다.

만약에 내면의 변화가 없이 훈련과 연습을 통한 도덕적 삶이 강조된다면  인간은 질병과 어려운 환경과 위기 상황에서는 절망 할 수 밖에 없다.

참된 복음은 인간의 의지에 호소하여 사람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한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내적인 변화를 통하여 외적인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다.


3. 그리스도의 위격과 속죄 사역

인도 사람들은 종종 기독교를 아무 저항없이 수용하지만 이들에게 예수는 여러 성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예수가 따름의 대상이 된다면 복음을 전함으로 인한 박해도 없었을 것이다.

사도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이 받았던 박해는 예수를 믿음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신 위격을 가지고 계신 예수님이 따름의 대상이 될 경우에는 예수님을 속죄 사역에서가 아니라 교훈과 본이 되는 삶을 사신 최고의 선지자의 위치로 격하시키는 것이다.

속죄 사역은 오직 성부 하나님과 동등한 위격에서만 가능하며,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창세 전 택하신 자들을 위한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에 근거를 두고있다.

속죄 사역이 제거된 예수의 역할은 선지자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에게서 속죄 사역을 제거하는 것은 삼위 하나님으로서의 성자 그리스도의 위격 자체를 없애버리는 것이다,

따름의 대상이 된 예수의 교훈은 공자의 교훈과 비교되며 간디가 산상순훈을 통하여 존경할 수 있었던 선지자 수준으로 예수님을 격하시키는 부작용을 낳게될 것이다.

예수님이 따름의 대상이 될 때는 기독교와 타 종교의 차이가 있을 수 없게 되며 예수는 단지 기독교라는 종교의 성인에 불과한 인물이 되고만다.

마가복음 10장 45절에는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기록되어있다.

예수님의 사역에서 속죄 사역이 제거될 때 기독교는 더 이상 기독교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기독교는 인간이 만든 여러 종교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4. 따름과 성화

사람들은 예수를 따르는 삶에 너무 나도 관심이 많다.


그러나 인간은 예수를 따를 수가 없다


인간은 예수의 삶을 본받을 수는 있지만 속죄 사역까지 따라 할 수는 없다.


예수의 희생의 주 목적은 따름의 본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한 속죄 사역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다.


예수의 속죄 사역은 누구도 따라할 수가 없다.


예수를 따름의 대상으로 규정하다 보면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가리워 질 수 밖에 없고 기독교는 예수의 희생정신을 따르는 윤리적 종교가 될 수 밖에 없다.


칼빈은 윤리의 개념보다도 더욱 강도가 높은 성화의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성화가 없이 구원의 칭의만을 강조하는 것은 복음이 아니다.


이와는 반대로 성화를 너무 강조하다보면 성화가 구원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러한 경우가 김세윤 교수가 주장하는 유보적 칭의론으로서 성화가 최종적 칭의에 영향을 미친다는 개념이다.


또한 성화는 윤리로 대체되어서는 안된다.


인간이 생각하는 윤리와 성령의 열매로서의 성화는 기준이 다르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성화는 언약 안에 머물기 위한 수단으로서 율법을 지키는 것이다.


새관점에서 보는 산상수훈은 또 하나의 율법일 뿐이며, 이를 지킴으로서 최종적 칭의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산상수훈은 율법보다도 더 지키기 어렵기에 이를 기준으로한다면 이 세상에 최종적 구원을 얻을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성화는 로마 가톨릭에서 주장하는 것과 같이 공로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


로마카톨릭은 은혜를 말하여도 '오직 은혜'를 말하지는 않는다.


공로주의는 인간이 어느 정도는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말하지만 종교개혁자들은 인간의 전적인 부패 즉 '노예의지'를 말한다.


윤리는 성화를 대체할 수 없다.


성화는 (나 자신이 전적으로 부패했기에)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이 주체가 되시지만 윤리는 (내가 그래도 조금은 살아 있다고 생각하기에) 내가 주체가 되려한다.


내가 조금이라도 살아 있다면 따름의 대상이 필요할 것이다.


(새관점주의자들과 같이) 인간의 전적인 부패를 인정하지 않는 이들이 보는 예수는 속죄 사역의 예수가 아니라 희생정신을 보여주신 예수다.


하지만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하였고 노예 의지만을 가지고 있다면 예수를 따를 수 있는 힘은 인간에게는 없다.


오직 성령님이 안에서 역사 하실 때 예수의 길로 인도되는 성화의 삶을 살 수 있다.


성화는 성령님이 주체가 되시기에 윤리와는 비교될 수 없다.


윤리적 삶은 일반 은총의 영역에 속하여있지만 성화는 특별 은총에 의한 것이다.


인간은 누구도 속죄 사역을 할 수 없기에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 성화의 과정을 밟아가는 삶을 살아가야한다.


성화는 칭의를 위한 공로가 아니다.


현대 교회에서 실종된 윤리는 이들이 예수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5. 따름의 대상이 되실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


예수가 따름이 대상이 되어야한다면, 예수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우리가 본받아야한다.


예수를 따름의 대상으로 본다면 예수는 또 다른 기독교의 창시자가 되는 것이다.


예수와 우리는 엄연히 다른 존재이다.


예수는 100% 하나님이시면서 100% 사람으로서 죄가 없으신 분이시다.


기독교는 죄를 사함받기 위하여 죄를 가지고 있어야하는데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기 때문이다.

예수의 종교는 아무 문제가  없는 아들의 위치에서 가지는 종교이기에 우리는 그러한 종교를 가질 수 없다.

그럼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예수의 믿음을 제외한 행동양식을 따라야하는 것인데 이러한 방식은 의식구조가 없는 행동양식이 되는 것이다.

예수를 따름은 윤리의 영역에 한정되어야한다.

예수의 신성이 아닌 인성의 영역에서만 우리의 모범이 되시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예수의 인성에 국한되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의 신성을 깍아 내려서 우리의 모범이 되게끔하는 것은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 것이된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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