톰 라이트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비평


                                       김원호(dent4834@hanmail.net)


대속적 죽음에 대한 비난이 사실무근?


톰 라이트는 파이퍼가 자신의 칭의 교리를 비판하였는데 내용인즉 예수의 죽음, 그 대속적인 구원이 가지는 중요성을 평가 절하 했다고 비난해 왔다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그러난 이러한 비난이 사실무근이라고 말한다.(톰 라이트 칭의를 말한다, 15)


톰 라이트는 자신의 칭의 교리에서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평가절하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실재는 평가 절하를 넘어서 내용을 왜곡시키는 상태이다.


톰 라이트는 예수의 죽음에 어떠한 속죄신학도 없다고 말하면서, 교회가 초창기부터 예수의 죽음을 속죄 사역으로 이해한 것을 부정한다.


톰 라이트는 예수의 죽음이 이스라엘 민족의 운명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있다고 말한다.(Challenge of Jesus, 86)



(비평)


톰 라이트는 예수의 죽음을 유대적 이스라엘의 운명과 동일시하고있다.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의 멸망과 더불어 멸망된 것이 자신의 죽음과 연결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의 부활이 유대적 이스라엘의 부활로 이어지는 것을 시사하는 말이다.


예수의 죽으심과 주활이 이스라엘의 죽음과 부활로 연결되어질 때 예수의 부활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나라는 역사적 유대주의의 새로운 버전이되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바로 유대적 이스라엘의 새로운 버전이며 이러한 형태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연결된 이스라엘의 멸망과 새로운 이스라엘의 탄생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여기서 새롭게 탄생된 이스라엘은 분명 예수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 탄생된 신약의 교회와는 구별되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분명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속죄의 의미를 부정하고있다.


톰 라이트는 갈라디아서 3장은 범법한 자들이 마땅히 감당해야 할 형벌을 대신 담당하시는 예수님에 관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바울이 말하는 것은 죄인인 유대인과 이방인이 공히 해택을 받을 그리스도의 사역에 관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라이트는 모든 죄인을 위한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이라는 전통적 해석은 잘못이라고 말한다.


톰 라이트는 이 문장이 1세기 유대주의의 입장과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언약적 약속 가운데에서 읽혀진다면 바울이 유대인들이 겪고있는 유배생활에 대하여 말하고 있음을 알 수있다고 말한다.



예수의 죽음은 자신의 사역과 이스라엘의 소명을 하나로 묶어주는가?


1) 톰 라이트는 예수가 최후의 만찬을 통하여 자신의 죽음이 이스라엘의 소명과 하나로 묶여있음을 말했다고 한다.


2) 톰 라이트는 다가오는 종말론적 구속에 대한 제2성전기라는 믿음(슈바이처의 종말론적 이해)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해석한다.


즉 메시아적 저주라고 불리는 심한 고난의 시기를 거친 후에 구원이 실현된다는 것이다. 대환란이 닥칠 것이고, 그것을 통해 구속, 새 시대, 죄 용서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한다.


3) 예수님이 이스라엘에 도래하는 시험의 때를 보셨고 그 분이 그것을 온 몸으로 받으려고 하셨다는 것이다. (Challenge of Jesus, 87)


(비평)


1.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이스라엘에 임하는 저주의 맥락에서 풀어나가고있다.


톰 라이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유대적 이스라엘의 면죄부로 활용하고있다.


율법주의와 인간의 죄를 고발하면서, 구원의 은혜를 선포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니라, 유대적 이스라엘에 대한 저주를 종결시키면서 유대적 이스라엘의 소망, 즉 유대적 이스라엘의 새로운 버전인 하나님 나라 운동으로 확대시켜나아간다.


이는 슈바이처가 그리스도의 희생을 “유대적 이스라엘의 종식과 새로운 유대적 이스라엘의 탄생”이라고 보는 것과 유사하며, 톰 라이트는 슈바이처의 이러한 해석을 응용하고있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슈바이처가 말하는 새로운 유대적 이스라엘과 매우 유사하다.


2. 톰 라이트는 환란이 죄 용서의 수단, 혹은 원인이 된다고 말한다.


이스라엘과 그리스도의 수난이 막연한 죄용서의 수단으로 해석되지만, 이는 인류를 향한 십자가의 속죄 사역을 통한 회복이 아니라 환란 즉 이스라엘의 범죄에만 관련된 환란 후에 죄용서가 이루어진다는 톰 라이트만의 독자적인 해석이다.


여기에는 대속의 개념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3. 톰 라이트의 해석대로라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유대적 이스라엘에 쏟아지는 저주의 방패막이가 된다.


슈바이처나 톰 라이트나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유대적 이스라엘의 새로운 탄생을 위한 십자가이지만, 이는 율법주의의 종결과 믿음으로 탄생한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언약적 율법주의를 바탕으로하는 유대주의적 하나님 나라를 말한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와 용어만 같을 뿐 내용에서는 전혀 다르다.



예수의 죽으심은 이스라엘에 퍼부어질 메시아의 저주인가?


톰 라이트에 의하면, 예수는 자신이 홀로 이스라엘에 퍼부어질 메시아의 저주를 받아야한다고 믿었다는 것이다.(예수의 도전, 131)


톰 라이트는 예수의 십자가를 이스라엘에 퍼부어질 메시아의 저주라는 말로 규정하고있다.


(비평)


1. 톰 라이트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아담의 범죄하고는 전혀 관련이 없이 이스라엘의 죄에만 국한 시키고있다.


2. 죄에 대한 형벌로서의 저주는 이스라엘의 행위에 대한 것이다.


행위를 바로 했다면 형벌을 받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또 다른 방식의 행위를 제공해주는 모본으로 삼는다.


이는 인간이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존재라는 전제에서 나온 생각이다.


3. 톰 라이트는 인간의 전적인 부패를 인정하지 않는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죄인이기에 죄의 열매를 맺을 수 밖에 없다.


잘못된 행위는 잘못된 존재에서 나올 수 밖에 없는 열매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인간에게 전가된 인간의 존재론적 죄에 대한 것이다.


의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존재론적으로 의인이 되어야만 하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지 않고는 어떠한 방법으로도 불가능한 것이다.


톰 라이트는 아담에 의한 죄의 전가와 두번째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에 의한 의의 전가 개념을 부인하고 있기에 인간의 구원을 인간의 행위와 연계시켜서 논리를 전개할 수 밖에 없다.


톰 라이트의 논리대로 예수가 이스라엘에 대한 메시아적 저주를 받은 것이라면, 새로운 이스라엘로서의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은 또 다른 죄악된 행동으로 말미암아 결국 최후의 심판에서 아무도 구원받을 자가 없을 것이다.


또한 톰 라이트는 예수의 죽음에 대한 메시아적 저주를 마치 최후의 심판과 같은 성격으로 규정하고있지만, 만약에 예수가 받은 저주가 최후의 심판이라면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은 어떠한 행동을 하던지 간에 모두 구원받아야 되는 것이다.



예수는 로마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셨나?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로마와의 관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예수의 죽으심은 로마에 대한 반역에 의한 것이다?(예수의 도전, 123)


2) 이스라엘 민족이 로마에 대한 저항을 어떠한 방식으로 하여야하는지 방식의 본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다.


3) 예수의 죽음은  로마에 의한 정치적 희생이다.


4) 예수님의 로마에 대한 의제는 이스라엘 민족이 성전을 회복하고자하는 로마에 대한 의제와 같다.


5) 예수님은 성전을 회복하고자 로마에 대한 반역을 죽음을 통하여 하신 것이다.


6) 예수님은 (실패한) 혁명적인 왕으로 처형되었다.(예수의 도전, 131)


예수는 (이스라엘을 해방 시키기 위한 메시아로서) 로마 총독을 대면했고 로마 군대에 의하여 처형된 인물이다.


7) 예수께서는 생존하시는 동안 메시아처럼 행동하시고 말씀하셨으며, 이런 행동과 말이 그 분을 죽음으로 몰고간 직접적인 원인이었던 것으로 가정해야하며, 이런 내용은 사복음서도 권유한다.(예수의 도전, 202)


이와같이 톰 라이트는 예수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인 로마 군인에 의해 죽으셨다고 말한다.(Challenge of Jesus,138)


예수가 이방인에게서 이스라엘을 해방시켜야할 메시아이시기에 죽으시지 말아야했는데 죽으셨다는 것이다.


여기서 톰 라이트가 말하는 메시아의 개념은 이방인에게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실 유대적 이스라엘의 메시아다.


톰 라이트가 “예수는 메시아시다”라고 강조하는 것은 그 당시의 대립구조를 예수님과 율법주의자가 아닌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조로 보고있는 데서 나오는 개념이다.


톰 라이트는 예수를 메시아로, 메시아는 이방인에게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는 자로, 이스라엘은 바벨론의 포로 상태였다는 점진적 논리를 통하여 예수님은 메시아의 자격으로서 이스라엘을 이방인에게서 구출하시기 위하여 어떻게 (이방인에게) 희생되셨는지를 보여주시는 분으로 묘사하고있다.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율법주의자로 대표되는 바리세인이나 율법사들과의 대립, 즉 자신의 힘으로 구원을 이루겠다는 인본주의자들과의 대립이 아니라, 이방세계와의 정치적 대립을 통한 희생으로 풀어나감으로서, 유대인들에게 면죄부를 주면서 유대적 이스라엘을 하나님 나라의 주역으로 부각시키고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으심을 어떻게 해석하셨는가?


1.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이스라엘의 소망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한다.(예수의 도전, 105)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의 죽음은 야웨께서 이스라엘을 구속하시는 이야기라는 큰 맥락에서 보아야한다고 말한다.  


즉 그리스도는 죽음을 통한 이스라엘의 소망을 성취하셨다는 것이다.(예수의 도전, 121)


톰 라이트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가난과 고난, 바벨론 포로 생활 경험과 순교를  통하여 믿음이 다져짐으로 구속을 이루는 도구가 될지도 모른다는 믿음을 가졌다는 것이다.


예수는 이스라엘이 구속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되어져야 한다는 자기 이해를 가지고 있었으며, 자신의 고난이 이스라엘의 고난의 절정이 되어야한다는 1세기 유대인들의 생각에 부합된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예수께서는 이스라엘의 고난을 통한 구속을 이룰 인물이 바로 자신이라고 믿으셨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라이트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구속(이스라엘의 귀환)의 이야기가 지향하던 그 절정의 순간을 의미한다.(예수의 도전, 127)



(비평)


라이트는 일관되게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에서의 귀환과 연결 시키고있다.



순교자의 본을 보여주시는 예수님.


예수님 이전의 순교자들은 고발자들을 향하여 욕설과 협박을 퍼부었지만 초기 기독교의 전통은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오직 용서와 소망의 말만을 담아내었다.(예수의 도전, 130)


톰 라이트는 초기 기독교 순교자들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순교자로서의 삶을 살라는 본을 본받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비평)


예수님 이전의 순교자와 예수님 이후의 순교자를 동일한 목적을 가졌지만 방법만 다른 사람들로 묘사하고있다.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대속의 의미를 제거함으로서, 창조주이신 그리스도를 성육신하신 구속주가 아니라 희생의 본을 보여준 한 사람의 선지자로 격하시켜버림 것이다.



그리스도는 누구를 위하여 죽으셨나


그리스도는 창세 전에 택하신 자를 위하여 죽으셨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이 아니다.

선택받은 자들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는 자들이다.

이들에게는 어떠한 요구도 없는 오직 전적인 은혜로 부르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사랑하는 자를 위해서 막힌 담을 허신 것이다.

인간은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자이기에 어떠한 공로나 선행도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없으며, 인간은 구원의 값을 지불할 능력이 없는 자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하여 오직 값없이 은혜로 구원해 주시는 것이다.

이러한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의한 것이기에 선택받지 않았다고 항의조차 없다.

그날에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자들은 선택받지 못함의 분노가 아니라 자신의 뜻이 좌절된 것에 대하여 분노할 것이다.

새관점이 말하는 십자가는 사랑의 십자가가 아니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십자가의 길을 걸어야한다면, 전쟁의 위협에서 그냥 희생 당해야만 할 것이며, 북한이 침공한다면 그냥 당하는 것이 답일 것이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십자가는, 선택받은 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희생적인 삶을 요구하는 무거운 것이다.

새관점에서의 십자가는 세대주의자들 보다도 한 걸음 더 나아가 유대적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삶의 지침이면서 기독교를 유대교에 흡수하려는 것이다.

새관점에서의 십자가는 선택과 예정이라는 개념이 없다.

새관점에서의 십자가는 속죄사역이 아니기에 칼빈의 5대강령을 찾아 볼 수가 없다.

새관점에서의 십자가는 율법의 멍에보다 더 무거운 멍에를 요구한다.

새관점에서의 십자가는 정통 안에서 찾아 볼 수 없는 다른 복음의 십자가인 것이다.

새관점의 십자가에 의하면 이 세상에는 어느 누구도 구원받을 것에 대하여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

톰 라이트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김원호(dent4834@hanmail.net)


톰 라이트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정통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많은 차이가 있다.


차라리 많은 차이가 있다기보다는 용어만 같을 뿐 내용에 있어서는 전혀 다르다는 표현이 적합할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십자가의 의미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해석을 한다.


1)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이스라엘의 소망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예수의 도전,105)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의 죽음은 야웨께서 이스라엘을 구속하시는 이야기라는 큰 맥락에서 보아야한다고 말한다.  즉 그리스도의 죽음은 이스라엘의 소망의 실현을 성취하시는 것이라고 말한다.(예수의 도전,121)


여기서 라이트가 말하는 이스라엘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이루실 새이스라엘이 아니라 역사적 유대주의의  이스라엘을 말하며, 이스라엘의 소망이란 바벨론 유배생활의 청산과 이 땅에 유대주의적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말한다.


2) 이스라엘은 가난과 고난, 바벨론 포로 생활 경험과 순교를  통하여 믿음이 다져짐으로 구속을 이루는 도구가 될지도 모른다는 믿음을 가졌다.


여기서 말하는 구속을 이루는 도구는 하나님 나라 건설에 바벨론 유수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이 중심이 되어 도구로 사용될 것을 말한다.


3) 예수는 이스라엘이 구속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되어져야 한다는 자기 이해를 가지고 있었으며, 자신의 고난이 이스라엘의 고난의 절정이 되어야한다는 1세기 유대인들의 생각에 부합된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라이트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유대 이스라엘의 포로 생활과 연계시켜 풀어나간다.


4) 예수께서는 이스라엘의 고난을 통한 구속을 이룰 인물이 바로 자신이라고 믿으셨을 수도 있다.


라이트는 예수의 소명이 둘째 아담으로서의 인류의 구속이 아니라 유대 이스라엘의 구속이라는 영역으로 한정시키며, 삼위 하나님의 제2격이라는 예수의 신성의 의미를 제거하며, 유대적 구속자로 제한시킴으로서 예수의 속성 자체를 인간적으로 격하시킨다.


5)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구속( 이스라엘의 귀환)의 이야기가 지향하던 그 절정의 순간을 의미한다.(예수의 도전,127)


여기서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인간의 보편적 죄와는 관계없는,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에서의 귀환과 연결 시키고있다.


6)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중의 혁명적 메세지이다.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통하여 혁명적 메세지를 전하였는데 이 이중의 혁명적 메세지는 강경파의 단순한 혁명적 메세지가 아니라 혁명의 의제까지 포함하면서 다른 모든 의제를 뒤엎을 메세지이다.(예수의 도전,72)


톰 라이트는 예수의 십자가를 로마에 대한 투쟁 방식의 한 가지로 해석한다.


그동안 이스라엘이 로마에 대하여 취했던 여러가지 방식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며, 예수는 새로운 방식을 제공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을 택하였다는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를 통한 혁명의 방식은 열혈당처럼 물리적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다른 뺨도 돌려대고 십리도 가라는 메세지의 실천이다.(예수의 도전, 122)


7)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메시아적 소명을 이루는 예수의 방법이다.


예수가 이루고자하는 메시아적 소명은 물리적인 전쟁에 의한 혁명 프로그램의 참여가 아닌  예수의 메시아적 소명을 예수의 방법을 통하여 실현한다.


여기서 톰 라이트가 말하는 메시아적 소명은 속죄 사역에 대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 대항하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하는 방법론에 대한 것이다.


8)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대안적 나라의 이야기에 동참을 요구한다.


기존 체제를 전복하는 예수의 의제의 중심에는 제자들에게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따르고, 자신이 실현하는 대안적인 나라(즉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에 동참하라는 요청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목적


톰 라이트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이 땅에서 유대 이스라엘의 완성을 위한 것이다.


세대주의는 유대 이스라엘의 구원 방식과 이방인의 구원 방식의 두 가지 구원 방식을 추구하는 반면에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바울에 관한 새관점”(앞으로 새관점으로 통일함)은 “하나님의 단일한 구원 계획”이라는 한 가지만 고집한다.


이는 개혁 정통주의가 말하는 단일한 구원 계획과는 다른 것이다.


개혁 정통주의에서는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구속 사역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칭의된 자만이 구원 받을 수 있다.


그러나 톰 라이트는 세대주의의 이중의 구원방식에서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이신칭의를 제거하고 오직 유대 중심적 구원방식만을 주장한다.


톰 라이트는 유대 중심적인 단일한 구원 계획을 위해서 개혁주의의 구원 방식을 유대교의 틀 안에서 다시 해석하는 방식을 취한다.


이러한 방식이 바로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새관점이다.


톰 라이트는 자신의 새관점을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오직 유대적 이스라엘의 회복과 유대 중심적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라는 틀 안에서 재해석한다.


이를 위해 톰 라이트는 다음과 같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목적을 해석한다.


1)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국가적 저주를 제거하는 죽음이었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이스라엘의 죄는 이스라엘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구원하시고자하는 단일한 계획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것이었으며, 바벨론 유배생활은 이러한 죄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한다.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이스라엘에게 임한 국가적 저주를 제거하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약속한 언약적 축복을 온 세계에 전달하는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말한다.


2)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스라엘의 소망을 실현하기 위한 죽음이었다.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이스라엘의 소망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며, 야웨께서 이스라엘을 구속하시는 이야기라는 큰 맥락에서 보아야한다고 말한다. (Challenge of Jesus, 85)


여기서 톰 라이트가 말하는 이스라엘의 소망은, 새이스라엘로서의 성도의 소망과는 관계없는, 유대적 이스라엘의 소망이며,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유대적 이스라엘의 소망의 실현이라는 맥락에서 보고있는 것이다.


3)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포로시대의 종말을 뜻한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극치에 다달았던 유배생활의 저주를 단번에 해결하심으로서 포로시대의 종말을 고할 수 있었으며, 예수의 죽으심과 더불어 저주가 제거되고 새롭게 된 언약의 축복이 하나님께서 의도 하셨던 데로 바깥으로 넘쳐 흐를 수 있었다는 것이다.


4)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자신의 사역과 이스라엘의 소명을 하나로 묶어준다.


톰 라이트는 예수가 최후의 만찬을 통해서 자신의 죽음이 자신의 사역과 이스라엘의 소명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이라고 말했다고한다. (Challenge of Jesus, 87)


톰 라이트의 이러한 이해는 슈바이처의 종말론적 이해와 맥락을 같이하는 것으로서, 다가오는 종말론적 구속에 대한 제2성전기라는 믿음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해석하는 것이다.


즉 메시아적 저주라고 불리는 심한 고난의 시기를 거친 후에 구원이 실현된다는 것이다.

대환란이 닥칠 것이고, 그것을 통해 구속, 새 시대, 죄 용서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한다.


예수님이 이스라엘에 도래하는 시험의 때를 보셨고 그 분이 그것을 온 몸으로 받으려고 하셨다는 것이다.


환란이 죄 용서의 수단, 혹은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5)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순교자의 본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예수님 이전의 순교자들은 고발자들을 향하여 욕설과 협박을 퍼부었지만 초기 기독교의 전통은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오직 용서와 소망의 말만을 담아내었다늠 것이다.


예수께서 고난 가운데도 침묵을 유지하시고 오직 용서와 소망의 말만을 담으신 것은 순교자의 전통에서보면 너무나 새로운 것이어서 설명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초기 기독교 순교자들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순교자로서의 삶을 살라는 본을 본받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예수의 도전,130)


여기서 톰 라이트는 예수님 이전의 순교자와 예수님 이후의 순교자를 동일한 목적을 가졌지만 방법만 다른 사람들로 묘사하고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유대 전통의 순교자의 맥락에서 그려내고있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유대 전통의 순교자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 전통과는 상관없는, 아담에서 유래된 인류의 죄를, 둘째 아담으로서 담당하신 것이다.


톰 라이트는 예수님 이전의 순교자나 예수님 이후의 순교자나 동일하게 유대적 이스라엘의 회복이라는 유대적 메시아 사상의 선상에 놓고있다.



십자가가 상징하는 것들


톰 라이트는 예수께서 자신이 지신 십자가가 다음과 같은 내용을 상징한다고 말한다.(예수의 도전,169)


1) 십자가는 로마의 압제를 상징한다.


라이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간의 보편적 죄에 대한 것이 아니라 로마의 압제에 대한 것으로 축약시킨다.


2) 십자가는 사랑과 평화의 길, 그 분이 승리의 길이라고 선포하셨던 패배의 길을 상징하였다.


이는 카이사르와 이를 저항하는 이들과는 다른 승리를 상징한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로마는 세상 정부를 대표하기에, 로마에 대한 승리는 세상의 압제에 대한 승리라고 말한다.


세상에 대한 승리는 구속사역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예수의 행동방식이 옳다고 인정하는 증거인 부활을 통한 것이다.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수의 로마에 저항하는 행동 방식이 옳았음을 하나님께서 증거하신 것이라고 설명한다.


3) 십자가는 실천이 아닌 수동성의 상징, 행동이 아닌 수난의 상징이었다.(예수의 도전,133)


톰 라이트는 성전과 다락방에서 예수께서 행하신 것이 실천과 행동이었다고 보며, 십자가는 이와 대비되는 수동적인 것으로 보고있다.


이는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수동적 순종으로서의 십자가와는 다른 것이다.


4) 십자가는 부활이라는 더 크고 의미심장한 상징적 행동이 성취될 것임을 가리키는 표지이다.



톰 라이트가 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비평


1) 속죄 사역과는 관계없다.


라이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을 속죄 사역으로 보고있지 않으며, 이와 관련하여 믿는 자의 칭의에 대한 어떠한 역할도 설명하지 않는다.


그가 말하는 십자가는 율법의 저주 아래에 있는 죄인들에 대한 형벌을 대신 감당하시며, 고통을 대신 당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역사적 이해에 전혀 동조하지 않는다.


그가 말하는 예수의 죽으심은,  유배생활의 종식을 의미하는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메시아이심을 나타낼 뿐이다.


그가 말하는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은 이스라엘의 유배생활의 회복을 의미하며, 유배 생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을 중심으로하는 하나님 나라를 만들기 위한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통해서 이루신 하나님 나라와는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라이트는 칭의에 관한 바울의 교리가 인간의 죄성의 문제와 관련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기에, 속죄 사역과 관련되어 형성된 그리스도의 역할에 대한 역사적 이해에 관하여 거의 언급을 하고있지 않다.


톰 라이트가 이해하는 칭의란 누가 언약 안에 속하여 있는지 답을 주는 신분 증명서와 같은 것이기에, 톰 라이트는 전통적 개혁주의 신학이 강조하는 속죄교리에 대하여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2) 대속과 하나님의 의(propitiatory substitution vs the righteous of God)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으로 해석되는데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심판과 아담의 범죄 개념이 빠져있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공의는 아담의 범죄로 인한 인류의 보편적 죄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행동 방식의 문제에 관한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의에는 심판의 개념이 빠져있기에 그리스도의 대속에 의한 속죄 사역은 필연적으로 제외시켜야하는 개념이었다.


심판의 개념이 없는 상태에서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은 있을 자리가 없을 수 밖에 없고 더군다나 대속의 개념도 자리를 잡을 곳이 없다.


로마서 1-3장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진노하심과 심판과 연결되어 나타나며,  하나님과 동격이신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심판의 진노를 해결하실 수있는 분이시다.


그러나 새관점에서 보여주는 그리스도의 사역은, 두번째 아담으로서 첫번째 아담에서 나타난 죄의 문제를 해결하신는 분으로서의 속죄나 대속이 배제된체, 오직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시는 정치적 의미의 메시아로만 그려지고 있다.


3) 힘에 대한 승리를 말한다.


톰 라이트가 언급하는 “그리스도의 주되심”은 십자가를 통하여 로마에 대항하여 죽으심의 방법으로 얻으신 것이기에, 물리적 힘에 대한 승리를 말한다.


이는 인간의 죄성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을 충족시킨다는 개념과는 다른 것이며, 세상 권력을 상징하는 로마에 대하여 어떠한 방식으로 승리를 할 수 있으셨는지를 손수 모범을 보여주심으로, 세상 권세에 대한 승리의 한 방법을 제시해주셨다고 말한다.


4) 유대적 이스라엘의 소망의 성취


톰 라이트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아담의 범죄와는 관계가 없는, 단지 유배 생활 상태에 있는 이스라엘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제시된 것이다.


톰 라이트는 예수의 최후의 만찬이 이스라엘의 유배 생활 상태의 종식을 선언하는 것이었으며, 이스라엘이 더 이상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새로운 행동방식을 제시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본을 보여주셨다고 말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톰 라이트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유대 이스라엘의 완성을 위한 해석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는 누구를 위하여 죽으셨나


그리스도는 창세 전에 택하신 자를 위하여 죽으셨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이 아니다.

선택받은 자들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는 자들이다.

이들에게는 어떠한 요구도 없는 오직 전적인 은혜로 부르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사랑하는 자를 위해서 막힌 담을 허신 것이다.

인간은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자이기에 어떠한 공로나 선행도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없으며, 인간은 구원의 값을 지불할 능력이 없는 자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하여 오직 값없이 은혜로 구원해 주시는 것이다.

이러한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의한 것이기에 선택받지 않았다고 항의조차 없다.

그날에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자들은 선택받지 못함의 분노가 아니라 자신의 뜻이 좌절된 것에 대하여 분노할 것이다.

새관점이 말하는 십자가는 사랑의 십자가가 아니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십자가의 길을 걸어야한다면, 전쟁의 위협에서 그냥 희생 당해야만 할 것이며, 북한이 침공한다면 그냥 당하는 것이 답일 것이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십자가는, 선택받은 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희생적인 삶을 요구하는 무거운 것이다.

새관점에서의 십자가는 세대주의자들 보다도 한 걸음 더 나아가 유대적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삶의 지침이면서 기독교를 유대교에 흡수하려는 것이다.

새관점에서의 십자가는 선택과 예정이라는 개념이 없다.

새관점에서의 십자가는 속죄사역이 아니기에 칼빈의 5대강령을 찾아 볼 수가 없다.

새관점에서의 십자가는 율법의 멍에보다 더 무거운 멍에를 요구한다.

새관점에서의 십자가는 정통 안에서 찾아 볼 수 없는 다른 복음의 십자가인 것이다.

새관점의 십자가에 의하면 이 세상에는 어느 누구도 구원받을 것에 대하여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

톰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의 소명의식과 상징적 행동들


김원호(dent4834@hanmail.net)


예수의 소명의식


왜 톰 라이트는 예수께서 메시아로서의 소명의식을 가지고 있으셨는지, 그리고 그 소명의식이 어떠한 행동으로 표현되었는지, 그 결과가무엇인지에 대하여 많은 지면을 할애하면서 서술을 하고있다. 여기서는 톰 라이트가 예수가 소명의식을 가지고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있는 그의 서술들을 통하여 개혁주의 입장에서 이를 분석 비판하고자한다.


1)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하여야만 하는 소명의식


톰 라이트는 예수께서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아셨가는 개념보다는 마땅히 하나님이 하실 수있는 메시아로서의 일을 하심으로 하나님께 인정받음으로서 하나님의 보좌의 우편에 앉아야만 하는 소명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한다.

이는 마치 사람이 신이 되어야만 하는 의무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표현으로 들리기도 하고 아니면 하나님께 인정 받아야만 하는 의무감? 혹은 자신이 메시아가 되어야만 하는 소명감 등으로 오해를 받을 수 있는 모호한 표현들을 하고 있다.


톰 라이트는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아셨다"라는 말을 명쾌하게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님은 이스라엘과 온 세상을 위해 성경에 따라 야웨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행하고 그 분만이 되실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만 한다"고  믿으셨다는 것이다"라고 표현한다.

오직 야웨만 성취하실 수 있는 일을 이루시는 것이 자신의 과업이라고 생각하셨다는 것이다.(N.T. Wright’s ‘The Challenge of Jesus’,121)


이는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초자연적인 의식을 품었다는 말이 아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초자연적인 의식을 품었다는 말은 오히려 예수에 대하여 가현설(docetism)을 주장해야만 예수의 신성을 고수할 수있는 18세기의 이신론적 맥락과 함께하는 이들의 견해라는 것이다.(N.T. Wright’s ‘The Challenge of Jesus’, 121)


라이트는 예수의 인성을 강조하다가 오히려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 쪽으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다.


2) 유대교가 상징하는 것을 구현해야하는 소명의식


예수께서는 유대교의 상징들 즉 성전과 토라, 말씀(word)과 영spirit)과 지혜(wisdom)들이  야웨께서 온 세상을 위해 이스라엘 가운데 계시며 구원을 베푸신 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기에 이러한 상징들을  몸소 구현하는 것이 예수 자신의 소명이라고 믿으셨다는 것이다.(N.T. Wright’s ‘The Challenge of Jesus 122)


3) 예루살렘 입성을 통해  역사적 사실로서 증명되는 나사렛 예수의 소명의식


톰 라이트는 예수가 심판자이자 구속자로 시온에  돌아오실 야웨의 이야기를 몸소 구현하여야 하는 소명의식을 가졌다고 말한다.


라이트는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면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신 것은, 야웨께서 심판자이자 구속자로 시온에 돌아오실 것에 대한 예언이며, 성전파괴를 상징하고 최후의 출애굽을 경축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몸소 구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톰 라이트는 나사렛 예수께서 어떤 소명을 의식하셨다는 것을 역사적 사실로서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N.T. Wright’s ‘The Challenge of Jesus’, 123)


4) 유대의 행동방식에 대한 수정을 통하여 새로운 이스라엘의 행동 규범을 제공해주어야했다.


유대 이스라엘의 문제는 로마에 항거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동 방식에 문제가 있었다고 본다.


톰 라이트에 의하면 유대 이스라엘은 1) 로마와 결탁하는 헤롯방식, 2) 로마와 분리된 삶을 추구하는 이원론적 방식, 3) 로마에 정면으로 투쟁하는 시카리(Sicarii)의 열혈당방식이 있었다고 말한다.


예수는 이들에게 유대주의의 행동 방식과는 다른 방식을 제공해주는 것이 소명이었다는 것이다.(예수의 도전, 48)


5) 하나님 나라 운동을 시작 할 소명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 나라 운동의 주체가 되심으로 세상을 위한 사역을 감당해야 한다는 소명의식을 가지셨다.(예수의 도전, 39)


예수님의 사역 중의 하나는 하나님 나라 운동을 지원할 세력 즉 새로운 백성을 부르시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진정 만왕의 왕이 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하신 일이다.(예수의 도전, 52)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초기 기독교 자체가 하나님 나라 운동이라고 생각했으며, 유대교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가 탄생되었다고 말한다.(예수의 도전, 193)


6) 이스라엘의 대표로서의 메시아적 소명 의식


“예수께서는 이스라엘이 이교사상과 싸우려는 욕망 자체를 타락으로 보셨는데 이는 이스라엘이 민족주의 혁명의 온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이스라엘의 대표로서 이스라엘의 고난의 문제를 스스로 짊어지시는 것이다.


예수는 이스라엘의 대표로서 이스라엘이 할 수 없었던 이스라엘의 소명, 곧 세상의 빛이요 종이 되는 그 소명을 이루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이해하셨던 자신의 메시아적 소명이다.

(예수의 도전, 129)


7) 성전의 존재와 역할로서의 부르심의 소명 의식


예수님께서 지니신 소명의식의 중심에는 자신이 성전의 존재와 역할을 하도록 부름받았다고 믿는 신앙이 있었다.


성전에서의 예수님의 행동은 자신이 메시아이심을 주장하는 상징적 행동이었다.


즉 이스라엘의 긴 이야기가 자신 안으로 집약되는 것이 자신의 운명이라고 믿었음을 보여주는 행동이었다.


예수는 자신이 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하시는 장소요 수단이라고 주장하셨다.


예수는 자신의 소명이 새로운 성전으로 행동하는 것이라고 믿으셨다. (N.T. Wright’s ‘The Challenge of Jesus’, 111)


8) 전투에서 지는 소명의식


톰 라이트는 예수의 소명을  모든 인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의 보혈을 통한 속죄 사역이 아니라, 유대 이스라엘의 잘못에 종지부를 찍고서 새로운 방법을 시도하는 예수님으로 묘사하고자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있다.


“예수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해 그 전투에서 지는 것이 자신의 과업이자 역할이며 이스라엘의 대표로서 맡은 소명이라고 확신하셨다.” (예수의 도전, 128)


전투에서 지는 것은,  이스라엘이 마케베우스의 반란과 같이 로마에 대하여 무력적으로 저항하는 것은 세상의 빛이 되기 위한 이스라엘의 해방을 가져올 수 없기에 예수께서는 무저항을 통한 죽으심으로 메시아적 소명을 성취하셨다는 것이다.


9) 이스라엘이 하여야할 역할을 대신할 소명


톰 라이트가 보는 예수의 소명은, 원래 이스라엘이 당담했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함으로서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였기에, 유월절 만찬을 통하여 바벨론 포로의 생활을 청산시키고서, 스스로 이스라엘이 되셔서 로마에 죽임을 당하는 길을 걸음으로서 이스라엘이 하여야 할 것을 친히 담당하셨다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의 십자가는 이스라엘의 소명을 위한 것이다.


10) 이스라엘과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과 공의의 선포


예수는 이스라엘과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과 공의의 계획을  예수 자신의 현존, 자신의 일, 자신의 운명으로  실현시켜야 할 소명을 가지고 있다.(예수의 도전, 49)


여기서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구원과 공의의 계획은 이 땅에서 완성되는 하나님 나라 나라이며, 하나님 나라와 구원이 유대적  이스라엘을 통하여 실현되는 것이다.


예수의 상징적 행동들


예수의 소명 의식은 예수의 상징적 행동들을 통해서 구체화된다.


톰 라이트는 예수의 상징적 행동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는 예수가 하나님의 선택된 대리자였다는 사실을 생각하여야한다고 말한다.(N.T. Wright’s ‘The Challenge of Jesus’, 105)


성전에서의 예수의 행동은 자신이 메시아이심을 주장하는 상징적 행동이었으며, 이스라엘의 긴 이야기가 자신 안으로 집약되는 것이 자신의 운명이라고 믿었음을 보여주는 행동이었다는 것이다.


예수의 행동들은 상징적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는, 최후의 만찬, 성전에서의 행동, 예루살렘 입성, 십자가에서의 죽음, 부활등이 있다고 말한다.(예수의 도전,169)


하지만 상징적 행동들에 대한 톰 라이트의 해석은 지극히 유대주의적인 해석이며, 자신이 그리는 유대주의적 구도에 맞춘 인위적이고 보편성이 결여된 모습을  보여주고있다.



상징적 행동들이 바리세인과 충돌하는 이유


예수님과 바리세인의 충돌하였던 이유에 대하여 톰 라이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 예수와 바리세인의 충돌은 믿음과 행위의 충돌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의제를 내세워, 조상의 규약으로 인한 과대망상적인 자기 방어를 내려놓고 세상의 빛과 이 땅의 소금이 되라는 소명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하셨기 때문이다.


2) 이들의 충돌은 서로 다른 종말론적 믿음과 기대로 인한 서로 다른 정치적 의제라는 측면에서 봐야한다.


3) 예수님은 바리세파를 주도하던 그룹의 혁명적인 열정을 가열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문시하는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다.(예수의 도전, 81)


4) 예수는 공생애 전체에 걸쳐 마치 자신이 새로운 출애굽을 시작하는 듯 행동하셨다.(예수의 도전, 168)


톰 라이트는 예수의 행동이, 노예상태의 하나님의 백성을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고서 구출하러오신것과 같은 상징적 행동 방식으로 해석되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톰 라이트는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 상태를 애굽에서의 노예 상태에 적용시키고있으며, 예수의 상징적 행동들은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연상시키는 행동들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바리세인들이 자신들이 종이 된 적이 없다고 말하는데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죄를 짓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바벨론 포로가 아닌 죄의 종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 8:33-34)


신약 어디에도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였음을 시사하는 내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톰 라이트는 줄곧 바벨론 포로생활을 말하고있다.



톰 라이트의 다른 관점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의 소명 의식과 상징적 행동방식에 대한 해석이 전통적 개혁주의와 다른 것은 톰 라이트의 다음과 같은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1) 톰 라이트는, 복음주의를 비롯한 서양의 정통파는 하나님에 대해 지나치게 높고 초연한  견해를 오랫동안 지속해왔다고 말한다.(예수의 도전, 181)


그러나 과연 개혁파의 생각이 지나치게 높고 초연한 견해일까?


라이트는 모든 인간이 아담의 후손으로서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인간의 죄성에 대한 인식이 있을 때는 분리의 개념인 거룩하신 하나님과 가까이하는데 한계를 인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새관점에서의 인간론은 존재론적으로 아담의 죄와는 관계가 없다는 생각에서, 유대 이스라엘을 유대 시오니즘적으로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자부심으로 인하여, 하나님은 인간 사회의 완성을 위한 하나님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라이트가 말하는 시오니즘적 하나님은 초연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현실적인 삶의 영역에 깊숙히 들어오셔서 인간의 왕이 되시는 하나님이시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에서의 하나님은, 인간 사회 깊숙히 들어오셔서 직접 나라를 다스리시는 왕으로서, 인간 사회와 분리될 수없는 하나님이시다.


이는 개혁파에서 말하는 “이미와 아직”의 긴장감보다는, 이미 이 땅에 실현된 하나님 나라라는 관점을 견지하고있는 것이다.


2) 톰 라이트는 개혁주의가 하나님에 대한 높고 초연한 견해를 전제로 기독론의 문제에 접근한 뒤에 예수를 거기에 끼워 맞추는 경향이 있었다고 말한다.(예수의 도전,181)


톰 라이트는 개혁주의가 가지고있는 전제주의를 비판하고있다.


하지만 전제는 성경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개념이다.


톰 라이트는 제2성전 유대교에 대한 역사적 예수 연구를 성경 해석의 전제로 삼는다.


하지만 제2성전 유대교의 자료들에 대하여 얼마나 객관적으로 접근하고 있는지는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사도 시대의 행적들을 보면, 유대인 성도들이 유대교에서 명확하게 분리되어있지 않은 모습들이 많이 나타난다.


지금의 기독교 교리와 제2성전 유대교에서의 성도들과는 많은 면에서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톰 라이트가 근거로 제시하는 제2성전 유대교에 대한 역사적 탐구는 현재 기독교의 표준이 될 수 없다.


톰 라이트는 기독교가 어거스틴 이후에 변질되었다고 보지만, 오히려 아거스틴을 계시로 제대로 교리의 틀이 갖추어지기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예수는 성경의 중심이며,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서도 중심이 되실 수밖에 없다.


예수를 중심으로 성경을 해석하면 예수는 유대주의와 대립 될 수밖에 없다.


구속주로서의 예수는 예수에 대한 전제가 아니라 성경 전체가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톰 라이트는 제2성전 유대교의 언약적 율법주의라는 전제에서 예수를 무리하게 유대 중심적으로 해석하고있다.


톰 라이트가 해석하는 예수를 경륜적 삼위일체의 관점에서 본다면, 예수는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신 하나님이 아니다.


여기서 톰 라이트의 기독론의 문제가 드러난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


1. 참된 예수는 역사적 예수 탐구 없이는 알 수 없는가?


톰 라이트는 예수의 소명 의식과 상징적 행동들에 대한 해석의 근거로 “역사적 예수 탐구”에 의한 자료들을 제시한다.


톰 라이트는 자신이 역사적 예수 탐구를 하는 이유는 참된 예수를 알기 위한 것이라고한다.(Simply Jesus, 31)


톰 라이트는 역사적 예수 탐구라는 방법을 통하지 않고는 참된 예수를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제1,2차 대전 동안에 교회가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를 하지 않았을 때 비역사적 예수가 제시되어 나치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했다는 에른스트 케제만의 1953년에 행한 연설에 동의하면서, 역사적 예수 탐구가 없는 동안에는 진정한 예수를 알 수가 없고 이 예수를 따를 수도 없다는 것이다.(Challenge of Jesus, 21)


톰 라이트는 제 3의 탐구라고 불리우는 새로운 탐구가 시작된 1980년대 이후에야 비로소 진정한 예수를 알 수 있었다고 말함으로써, 지상의 교회들은 지난 2000년 동안 잘못된 만들어진 예수를 믿어 왔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2. 성경보다는 1세기 유대문서를 성경 해석의 근거로 삼고있다.


톰 라이트는 성경 해석의 출발을 성경 이외의 자료를 근거로 하고 있다.


그는 성경에 대한 해석은 역사적 검증과 신학적 검증을 통과하여야한다고한다고 말한다.(Simply Jesus, 20)


이를 위해서 신자는 모두 다 1세기의 역사가가 되어야한다는 것이다.(Simply Jesus, 21)


그의 검증 방식은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개혁주의의 방식과는 다른 것이다.


톰 라이트는 성경을 그대로 믿고서 역사적 예수 탐구를 하는 것도 아니며, 성경을 통하여 역사적 탐구를 하는 것도 아니고, 오직 성경이외의 1세기 역사적 자료를 근거로하여 성경을 해석하고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근거로 내세우는  1세기 자료는 일부 지역의 보편성이 결여된 자료를 근거로 하기에 성경 해석의 기준이 될 수 없는 자료들이다.


3. 전통적 기독교는 우리가 만든 예수라는 우상을 섬기고 있다?


톰 라이트는 예수께서 품으신 1세기 사고방식은 우리에게 낯설기도하고 불쾌감마저 주고 있다고 말한다.(예수의 도전,134)


전통적 기독교는 1세기 제2 성전 유대교에서 이해하는 예수와 너무도 동떨어진 예수 이기에, 이에 익숙한 전통 기독교에서는 자신의 예수에 대한 해석에 당황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예수에 대한 계속적인 역사적 탐구는 계속되는 기독교적 제자도에 필수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Challenge of Jesus, 15)


그는 심지어 서구 기독교가 동정녀 탄생이라는 신화(?)를 믿고있으며(Simply Jesus, 18), 서구 기독교는 예수에 대한 환타지를 만들고 있다고 말한다.(Simply Jesus, 21)



비평


1. 마치 사람이 신이 되었다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톰 라이트는 예수가 소명의식을 가지고있음으로 인하여 사람이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고 하나님께 인정 받음으로서,  하나님의 보좌의 우편에 앉으셨으며,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하나님이 되셨다는 의미가 풍겨진다.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예수의 소명의식과 역할은 삼위 하나님의 위격을 가지고있지 않더라도 가능한 역할이기에, 예수의 신성과 인성에 논쟁의 소지를 제공한다.


달리 말하면 사람이신 예수님이 어떻게 하나님이 되셨는가에 대한 이야기로 이해될 수도 있는 해석이다.


2. 유대주의적 메시아 사상의 완성을 말한다.


예수를 소명의식을 통한 메시아로 규정함으로서, 유대적  메시아 사상을 기초로 한 시오니즘이 예수의 소명의식을 기초로 완성되었음을 주장하고 있다.


유대인들이 고대하던 메시아의 돌아오심이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을 통하여 이루어졌음을 말함으로서 유대주의적 시오니즘의 완성을 말하고있다.


3. 유대주의적 하나님 나라를 말하고있다.


톰 라이트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적 이스라엘의 구현이다.


톰 라이트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적 이스라엘의 성전이시며, 예수 그리스도는 새이스라엘이시다.


톰 라이트는 예수 그리스도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을 중심으로하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구현하시는 분으로 묘사한다.


톰 라이트가 보는 예수의 행동 방식은 새롭게 구성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 행하여야 할 행동 방식의 규범을 보여주신 분이시다.


4. 힘에 대한 승리라는 구속 방식을 말한다.


톰 라이트가 언급하는 “그리스도의 주되심”은 개혁주의가 전통적으로 이해하고있던 형벌에 대한 충족의 개념보다는 힘에 대한 승리 개념의 교리를 강조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로마의 압제에 대한 항거 방식으로서 희생을 통한 승리를 강조하고있다.


5. 새로운 성전?


예수님께서 자신이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하는 장소요  수단이라고 주장하셨다면 현재 우리가 예수님을 생각할 때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전과 같은 개념에서 생각하여야 하는가?


톰 라이트는 예수님이 성전이 되신다는 말을 할 때 새관점에서 주장하는 언약적 율법주의 개념에서의 성전을 말하고있다.


언약적 율법주의 개념에서의 성전은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성전과는 차이가 있다.



posted by Wonho Ki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