톰 라이트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비평


                                       김원호(dent4834@hanmail.net)


대속적 죽음에 대한 비난이 사실무근?


톰 라이트는 파이퍼가 자신의 칭의 교리를 비판하였는데 내용인즉 예수의 죽음, 그 대속적인 구원이 가지는 중요성을 평가 절하 했다고 비난해 왔다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그러난 이러한 비난이 사실무근이라고 말한다.(톰 라이트 칭의를 말한다, 15)


톰 라이트는 자신의 칭의 교리에서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평가절하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실재는 평가 절하를 넘어서 내용을 왜곡시키는 상태이다.


톰 라이트는 예수의 죽음에 어떠한 속죄신학도 없다고 말하면서, 교회가 초창기부터 예수의 죽음을 속죄 사역으로 이해한 것을 부정한다.


톰 라이트는 예수의 죽음이 이스라엘 민족의 운명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있다고 말한다.(Challenge of Jesus, 86)



(비평)


톰 라이트는 예수의 죽음을 유대적 이스라엘의 운명과 동일시하고있다.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의 멸망과 더불어 멸망된 것이 자신의 죽음과 연결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의 부활이 유대적 이스라엘의 부활로 이어지는 것을 시사하는 말이다.


예수의 죽으심과 주활이 이스라엘의 죽음과 부활로 연결되어질 때 예수의 부활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나라는 역사적 유대주의의 새로운 버전이되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바로 유대적 이스라엘의 새로운 버전이며 이러한 형태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연결된 이스라엘의 멸망과 새로운 이스라엘의 탄생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여기서 새롭게 탄생된 이스라엘은 분명 예수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 탄생된 신약의 교회와는 구별되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분명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속죄의 의미를 부정하고있다.


톰 라이트는 갈라디아서 3장은 범법한 자들이 마땅히 감당해야 할 형벌을 대신 담당하시는 예수님에 관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바울이 말하는 것은 죄인인 유대인과 이방인이 공히 해택을 받을 그리스도의 사역에 관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라이트는 모든 죄인을 위한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이라는 전통적 해석은 잘못이라고 말한다.


톰 라이트는 이 문장이 1세기 유대주의의 입장과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언약적 약속 가운데에서 읽혀진다면 바울이 유대인들이 겪고있는 유배생활에 대하여 말하고 있음을 알 수있다고 말한다.



예수의 죽음은 자신의 사역과 이스라엘의 소명을 하나로 묶어주는가?


1) 톰 라이트는 예수가 최후의 만찬을 통하여 자신의 죽음이 이스라엘의 소명과 하나로 묶여있음을 말했다고 한다.


2) 톰 라이트는 다가오는 종말론적 구속에 대한 제2성전기라는 믿음(슈바이처의 종말론적 이해)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해석한다.


즉 메시아적 저주라고 불리는 심한 고난의 시기를 거친 후에 구원이 실현된다는 것이다. 대환란이 닥칠 것이고, 그것을 통해 구속, 새 시대, 죄 용서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한다.


3) 예수님이 이스라엘에 도래하는 시험의 때를 보셨고 그 분이 그것을 온 몸으로 받으려고 하셨다는 것이다. (Challenge of Jesus, 87)


(비평)


1.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이스라엘에 임하는 저주의 맥락에서 풀어나가고있다.


톰 라이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유대적 이스라엘의 면죄부로 활용하고있다.


율법주의와 인간의 죄를 고발하면서, 구원의 은혜를 선포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니라, 유대적 이스라엘에 대한 저주를 종결시키면서 유대적 이스라엘의 소망, 즉 유대적 이스라엘의 새로운 버전인 하나님 나라 운동으로 확대시켜나아간다.


이는 슈바이처가 그리스도의 희생을 “유대적 이스라엘의 종식과 새로운 유대적 이스라엘의 탄생”이라고 보는 것과 유사하며, 톰 라이트는 슈바이처의 이러한 해석을 응용하고있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슈바이처가 말하는 새로운 유대적 이스라엘과 매우 유사하다.


2. 톰 라이트는 환란이 죄 용서의 수단, 혹은 원인이 된다고 말한다.


이스라엘과 그리스도의 수난이 막연한 죄용서의 수단으로 해석되지만, 이는 인류를 향한 십자가의 속죄 사역을 통한 회복이 아니라 환란 즉 이스라엘의 범죄에만 관련된 환란 후에 죄용서가 이루어진다는 톰 라이트만의 독자적인 해석이다.


여기에는 대속의 개념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3. 톰 라이트의 해석대로라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유대적 이스라엘에 쏟아지는 저주의 방패막이가 된다.


슈바이처나 톰 라이트나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유대적 이스라엘의 새로운 탄생을 위한 십자가이지만, 이는 율법주의의 종결과 믿음으로 탄생한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언약적 율법주의를 바탕으로하는 유대주의적 하나님 나라를 말한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와 용어만 같을 뿐 내용에서는 전혀 다르다.



예수의 죽으심은 이스라엘에 퍼부어질 메시아의 저주인가?


톰 라이트에 의하면, 예수는 자신이 홀로 이스라엘에 퍼부어질 메시아의 저주를 받아야한다고 믿었다는 것이다.(예수의 도전, 131)


톰 라이트는 예수의 십자가를 이스라엘에 퍼부어질 메시아의 저주라는 말로 규정하고있다.


(비평)


1. 톰 라이트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아담의 범죄하고는 전혀 관련이 없이 이스라엘의 죄에만 국한 시키고있다.


2. 죄에 대한 형벌로서의 저주는 이스라엘의 행위에 대한 것이다.


행위를 바로 했다면 형벌을 받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또 다른 방식의 행위를 제공해주는 모본으로 삼는다.


이는 인간이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존재라는 전제에서 나온 생각이다.


3. 톰 라이트는 인간의 전적인 부패를 인정하지 않는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죄인이기에 죄의 열매를 맺을 수 밖에 없다.


잘못된 행위는 잘못된 존재에서 나올 수 밖에 없는 열매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인간에게 전가된 인간의 존재론적 죄에 대한 것이다.


의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존재론적으로 의인이 되어야만 하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지 않고는 어떠한 방법으로도 불가능한 것이다.


톰 라이트는 아담에 의한 죄의 전가와 두번째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에 의한 의의 전가 개념을 부인하고 있기에 인간의 구원을 인간의 행위와 연계시켜서 논리를 전개할 수 밖에 없다.


톰 라이트의 논리대로 예수가 이스라엘에 대한 메시아적 저주를 받은 것이라면, 새로운 이스라엘로서의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은 또 다른 죄악된 행동으로 말미암아 결국 최후의 심판에서 아무도 구원받을 자가 없을 것이다.


또한 톰 라이트는 예수의 죽음에 대한 메시아적 저주를 마치 최후의 심판과 같은 성격으로 규정하고있지만, 만약에 예수가 받은 저주가 최후의 심판이라면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은 어떠한 행동을 하던지 간에 모두 구원받아야 되는 것이다.



예수는 로마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셨나?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로마와의 관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예수의 죽으심은 로마에 대한 반역에 의한 것이다?(예수의 도전, 123)


2) 이스라엘 민족이 로마에 대한 저항을 어떠한 방식으로 하여야하는지 방식의 본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다.


3) 예수의 죽음은  로마에 의한 정치적 희생이다.


4) 예수님의 로마에 대한 의제는 이스라엘 민족이 성전을 회복하고자하는 로마에 대한 의제와 같다.


5) 예수님은 성전을 회복하고자 로마에 대한 반역을 죽음을 통하여 하신 것이다.


6) 예수님은 (실패한) 혁명적인 왕으로 처형되었다.(예수의 도전, 131)


예수는 (이스라엘을 해방 시키기 위한 메시아로서) 로마 총독을 대면했고 로마 군대에 의하여 처형된 인물이다.


7) 예수께서는 생존하시는 동안 메시아처럼 행동하시고 말씀하셨으며, 이런 행동과 말이 그 분을 죽음으로 몰고간 직접적인 원인이었던 것으로 가정해야하며, 이런 내용은 사복음서도 권유한다.(예수의 도전, 202)


이와같이 톰 라이트는 예수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인 로마 군인에 의해 죽으셨다고 말한다.(Challenge of Jesus,138)


예수가 이방인에게서 이스라엘을 해방시켜야할 메시아이시기에 죽으시지 말아야했는데 죽으셨다는 것이다.


여기서 톰 라이트가 말하는 메시아의 개념은 이방인에게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실 유대적 이스라엘의 메시아다.


톰 라이트가 “예수는 메시아시다”라고 강조하는 것은 그 당시의 대립구조를 예수님과 율법주의자가 아닌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조로 보고있는 데서 나오는 개념이다.


톰 라이트는 예수를 메시아로, 메시아는 이방인에게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는 자로, 이스라엘은 바벨론의 포로 상태였다는 점진적 논리를 통하여 예수님은 메시아의 자격으로서 이스라엘을 이방인에게서 구출하시기 위하여 어떻게 (이방인에게) 희생되셨는지를 보여주시는 분으로 묘사하고있다.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율법주의자로 대표되는 바리세인이나 율법사들과의 대립, 즉 자신의 힘으로 구원을 이루겠다는 인본주의자들과의 대립이 아니라, 이방세계와의 정치적 대립을 통한 희생으로 풀어나감으로서, 유대인들에게 면죄부를 주면서 유대적 이스라엘을 하나님 나라의 주역으로 부각시키고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으심을 어떻게 해석하셨는가?


1.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이스라엘의 소망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한다.(예수의 도전, 105)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의 죽음은 야웨께서 이스라엘을 구속하시는 이야기라는 큰 맥락에서 보아야한다고 말한다.  


즉 그리스도는 죽음을 통한 이스라엘의 소망을 성취하셨다는 것이다.(예수의 도전, 121)


톰 라이트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가난과 고난, 바벨론 포로 생활 경험과 순교를  통하여 믿음이 다져짐으로 구속을 이루는 도구가 될지도 모른다는 믿음을 가졌다는 것이다.


예수는 이스라엘이 구속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되어져야 한다는 자기 이해를 가지고 있었으며, 자신의 고난이 이스라엘의 고난의 절정이 되어야한다는 1세기 유대인들의 생각에 부합된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예수께서는 이스라엘의 고난을 통한 구속을 이룰 인물이 바로 자신이라고 믿으셨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라이트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구속(이스라엘의 귀환)의 이야기가 지향하던 그 절정의 순간을 의미한다.(예수의 도전, 127)



(비평)


라이트는 일관되게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에서의 귀환과 연결 시키고있다.



순교자의 본을 보여주시는 예수님.


예수님 이전의 순교자들은 고발자들을 향하여 욕설과 협박을 퍼부었지만 초기 기독교의 전통은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오직 용서와 소망의 말만을 담아내었다.(예수의 도전, 130)


톰 라이트는 초기 기독교 순교자들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순교자로서의 삶을 살라는 본을 본받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비평)


예수님 이전의 순교자와 예수님 이후의 순교자를 동일한 목적을 가졌지만 방법만 다른 사람들로 묘사하고있다.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대속의 의미를 제거함으로서, 창조주이신 그리스도를 성육신하신 구속주가 아니라 희생의 본을 보여준 한 사람의 선지자로 격하시켜버림 것이다.



그리스도는 누구를 위하여 죽으셨나


그리스도는 창세 전에 택하신 자를 위하여 죽으셨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이 아니다.

선택받은 자들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는 자들이다.

이들에게는 어떠한 요구도 없는 오직 전적인 은혜로 부르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사랑하는 자를 위해서 막힌 담을 허신 것이다.

인간은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자이기에 어떠한 공로나 선행도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없으며, 인간은 구원의 값을 지불할 능력이 없는 자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하여 오직 값없이 은혜로 구원해 주시는 것이다.

이러한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의한 것이기에 선택받지 않았다고 항의조차 없다.

그날에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자들은 선택받지 못함의 분노가 아니라 자신의 뜻이 좌절된 것에 대하여 분노할 것이다.

새관점이 말하는 십자가는 사랑의 십자가가 아니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십자가의 길을 걸어야한다면, 전쟁의 위협에서 그냥 희생 당해야만 할 것이며, 북한이 침공한다면 그냥 당하는 것이 답일 것이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십자가는, 선택받은 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희생적인 삶을 요구하는 무거운 것이다.

새관점에서의 십자가는 세대주의자들 보다도 한 걸음 더 나아가 유대적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삶의 지침이면서 기독교를 유대교에 흡수하려는 것이다.

새관점에서의 십자가는 선택과 예정이라는 개념이 없다.

새관점에서의 십자가는 속죄사역이 아니기에 칼빈의 5대강령을 찾아 볼 수가 없다.

새관점에서의 십자가는 율법의 멍에보다 더 무거운 멍에를 요구한다.

새관점에서의 십자가는 정통 안에서 찾아 볼 수 없는 다른 복음의 십자가인 것이다.

새관점의 십자가에 의하면 이 세상에는 어느 누구도 구원받을 것에 대하여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

톰 라이트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김원호(dent4834@hanmail.net)


톰 라이트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정통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많은 차이가 있다.


차라리 많은 차이가 있다기보다는 용어만 같을 뿐 내용에 있어서는 전혀 다르다는 표현이 적합할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십자가의 의미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해석을 한다.


1)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이스라엘의 소망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예수의 도전,105)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의 죽음은 야웨께서 이스라엘을 구속하시는 이야기라는 큰 맥락에서 보아야한다고 말한다.  즉 그리스도의 죽음은 이스라엘의 소망의 실현을 성취하시는 것이라고 말한다.(예수의 도전,121)


여기서 라이트가 말하는 이스라엘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이루실 새이스라엘이 아니라 역사적 유대주의의  이스라엘을 말하며, 이스라엘의 소망이란 바벨론 유배생활의 청산과 이 땅에 유대주의적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말한다.


2) 이스라엘은 가난과 고난, 바벨론 포로 생활 경험과 순교를  통하여 믿음이 다져짐으로 구속을 이루는 도구가 될지도 모른다는 믿음을 가졌다.


여기서 말하는 구속을 이루는 도구는 하나님 나라 건설에 바벨론 유수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이 중심이 되어 도구로 사용될 것을 말한다.


3) 예수는 이스라엘이 구속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되어져야 한다는 자기 이해를 가지고 있었으며, 자신의 고난이 이스라엘의 고난의 절정이 되어야한다는 1세기 유대인들의 생각에 부합된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라이트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유대 이스라엘의 포로 생활과 연계시켜 풀어나간다.


4) 예수께서는 이스라엘의 고난을 통한 구속을 이룰 인물이 바로 자신이라고 믿으셨을 수도 있다.


라이트는 예수의 소명이 둘째 아담으로서의 인류의 구속이 아니라 유대 이스라엘의 구속이라는 영역으로 한정시키며, 삼위 하나님의 제2격이라는 예수의 신성의 의미를 제거하며, 유대적 구속자로 제한시킴으로서 예수의 속성 자체를 인간적으로 격하시킨다.


5)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구속( 이스라엘의 귀환)의 이야기가 지향하던 그 절정의 순간을 의미한다.(예수의 도전,127)


여기서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인간의 보편적 죄와는 관계없는,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에서의 귀환과 연결 시키고있다.


6)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중의 혁명적 메세지이다.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통하여 혁명적 메세지를 전하였는데 이 이중의 혁명적 메세지는 강경파의 단순한 혁명적 메세지가 아니라 혁명의 의제까지 포함하면서 다른 모든 의제를 뒤엎을 메세지이다.(예수의 도전,72)


톰 라이트는 예수의 십자가를 로마에 대한 투쟁 방식의 한 가지로 해석한다.


그동안 이스라엘이 로마에 대하여 취했던 여러가지 방식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며, 예수는 새로운 방식을 제공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을 택하였다는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를 통한 혁명의 방식은 열혈당처럼 물리적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다른 뺨도 돌려대고 십리도 가라는 메세지의 실천이다.(예수의 도전, 122)


7)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메시아적 소명을 이루는 예수의 방법이다.


예수가 이루고자하는 메시아적 소명은 물리적인 전쟁에 의한 혁명 프로그램의 참여가 아닌  예수의 메시아적 소명을 예수의 방법을 통하여 실현한다.


여기서 톰 라이트가 말하는 메시아적 소명은 속죄 사역에 대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 대항하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하는 방법론에 대한 것이다.


8)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대안적 나라의 이야기에 동참을 요구한다.


기존 체제를 전복하는 예수의 의제의 중심에는 제자들에게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따르고, 자신이 실현하는 대안적인 나라(즉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에 동참하라는 요청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목적


톰 라이트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이 땅에서 유대 이스라엘의 완성을 위한 것이다.


세대주의는 유대 이스라엘의 구원 방식과 이방인의 구원 방식의 두 가지 구원 방식을 추구하는 반면에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바울에 관한 새관점”(앞으로 새관점으로 통일함)은 “하나님의 단일한 구원 계획”이라는 한 가지만 고집한다.


이는 개혁 정통주의가 말하는 단일한 구원 계획과는 다른 것이다.


개혁 정통주의에서는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구속 사역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칭의된 자만이 구원 받을 수 있다.


그러나 톰 라이트는 세대주의의 이중의 구원방식에서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이신칭의를 제거하고 오직 유대 중심적 구원방식만을 주장한다.


톰 라이트는 유대 중심적인 단일한 구원 계획을 위해서 개혁주의의 구원 방식을 유대교의 틀 안에서 다시 해석하는 방식을 취한다.


이러한 방식이 바로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새관점이다.


톰 라이트는 자신의 새관점을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오직 유대적 이스라엘의 회복과 유대 중심적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라는 틀 안에서 재해석한다.


이를 위해 톰 라이트는 다음과 같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목적을 해석한다.


1)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국가적 저주를 제거하는 죽음이었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이스라엘의 죄는 이스라엘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구원하시고자하는 단일한 계획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것이었으며, 바벨론 유배생활은 이러한 죄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한다.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이스라엘에게 임한 국가적 저주를 제거하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약속한 언약적 축복을 온 세계에 전달하는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말한다.


2)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스라엘의 소망을 실현하기 위한 죽음이었다.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이스라엘의 소망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며, 야웨께서 이스라엘을 구속하시는 이야기라는 큰 맥락에서 보아야한다고 말한다. (Challenge of Jesus, 85)


여기서 톰 라이트가 말하는 이스라엘의 소망은, 새이스라엘로서의 성도의 소망과는 관계없는, 유대적 이스라엘의 소망이며,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유대적 이스라엘의 소망의 실현이라는 맥락에서 보고있는 것이다.


3)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포로시대의 종말을 뜻한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극치에 다달았던 유배생활의 저주를 단번에 해결하심으로서 포로시대의 종말을 고할 수 있었으며, 예수의 죽으심과 더불어 저주가 제거되고 새롭게 된 언약의 축복이 하나님께서 의도 하셨던 데로 바깥으로 넘쳐 흐를 수 있었다는 것이다.


4)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자신의 사역과 이스라엘의 소명을 하나로 묶어준다.


톰 라이트는 예수가 최후의 만찬을 통해서 자신의 죽음이 자신의 사역과 이스라엘의 소명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이라고 말했다고한다. (Challenge of Jesus, 87)


톰 라이트의 이러한 이해는 슈바이처의 종말론적 이해와 맥락을 같이하는 것으로서, 다가오는 종말론적 구속에 대한 제2성전기라는 믿음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해석하는 것이다.


즉 메시아적 저주라고 불리는 심한 고난의 시기를 거친 후에 구원이 실현된다는 것이다.

대환란이 닥칠 것이고, 그것을 통해 구속, 새 시대, 죄 용서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한다.


예수님이 이스라엘에 도래하는 시험의 때를 보셨고 그 분이 그것을 온 몸으로 받으려고 하셨다는 것이다.


환란이 죄 용서의 수단, 혹은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5)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순교자의 본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예수님 이전의 순교자들은 고발자들을 향하여 욕설과 협박을 퍼부었지만 초기 기독교의 전통은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오직 용서와 소망의 말만을 담아내었다늠 것이다.


예수께서 고난 가운데도 침묵을 유지하시고 오직 용서와 소망의 말만을 담으신 것은 순교자의 전통에서보면 너무나 새로운 것이어서 설명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초기 기독교 순교자들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순교자로서의 삶을 살라는 본을 본받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예수의 도전,130)


여기서 톰 라이트는 예수님 이전의 순교자와 예수님 이후의 순교자를 동일한 목적을 가졌지만 방법만 다른 사람들로 묘사하고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유대 전통의 순교자의 맥락에서 그려내고있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유대 전통의 순교자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 전통과는 상관없는, 아담에서 유래된 인류의 죄를, 둘째 아담으로서 담당하신 것이다.


톰 라이트는 예수님 이전의 순교자나 예수님 이후의 순교자나 동일하게 유대적 이스라엘의 회복이라는 유대적 메시아 사상의 선상에 놓고있다.



십자가가 상징하는 것들


톰 라이트는 예수께서 자신이 지신 십자가가 다음과 같은 내용을 상징한다고 말한다.(예수의 도전,169)


1) 십자가는 로마의 압제를 상징한다.


라이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간의 보편적 죄에 대한 것이 아니라 로마의 압제에 대한 것으로 축약시킨다.


2) 십자가는 사랑과 평화의 길, 그 분이 승리의 길이라고 선포하셨던 패배의 길을 상징하였다.


이는 카이사르와 이를 저항하는 이들과는 다른 승리를 상징한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로마는 세상 정부를 대표하기에, 로마에 대한 승리는 세상의 압제에 대한 승리라고 말한다.


세상에 대한 승리는 구속사역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예수의 행동방식이 옳다고 인정하는 증거인 부활을 통한 것이다.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수의 로마에 저항하는 행동 방식이 옳았음을 하나님께서 증거하신 것이라고 설명한다.


3) 십자가는 실천이 아닌 수동성의 상징, 행동이 아닌 수난의 상징이었다.(예수의 도전,133)


톰 라이트는 성전과 다락방에서 예수께서 행하신 것이 실천과 행동이었다고 보며, 십자가는 이와 대비되는 수동적인 것으로 보고있다.


이는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수동적 순종으로서의 십자가와는 다른 것이다.


4) 십자가는 부활이라는 더 크고 의미심장한 상징적 행동이 성취될 것임을 가리키는 표지이다.



톰 라이트가 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비평


1) 속죄 사역과는 관계없다.


라이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을 속죄 사역으로 보고있지 않으며, 이와 관련하여 믿는 자의 칭의에 대한 어떠한 역할도 설명하지 않는다.


그가 말하는 십자가는 율법의 저주 아래에 있는 죄인들에 대한 형벌을 대신 감당하시며, 고통을 대신 당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역사적 이해에 전혀 동조하지 않는다.


그가 말하는 예수의 죽으심은,  유배생활의 종식을 의미하는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메시아이심을 나타낼 뿐이다.


그가 말하는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은 이스라엘의 유배생활의 회복을 의미하며, 유배 생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을 중심으로하는 하나님 나라를 만들기 위한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통해서 이루신 하나님 나라와는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라이트는 칭의에 관한 바울의 교리가 인간의 죄성의 문제와 관련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기에, 속죄 사역과 관련되어 형성된 그리스도의 역할에 대한 역사적 이해에 관하여 거의 언급을 하고있지 않다.


톰 라이트가 이해하는 칭의란 누가 언약 안에 속하여 있는지 답을 주는 신분 증명서와 같은 것이기에, 톰 라이트는 전통적 개혁주의 신학이 강조하는 속죄교리에 대하여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2) 대속과 하나님의 의(propitiatory substitution vs the righteous of God)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으로 해석되는데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심판과 아담의 범죄 개념이 빠져있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공의는 아담의 범죄로 인한 인류의 보편적 죄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행동 방식의 문제에 관한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의에는 심판의 개념이 빠져있기에 그리스도의 대속에 의한 속죄 사역은 필연적으로 제외시켜야하는 개념이었다.


심판의 개념이 없는 상태에서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은 있을 자리가 없을 수 밖에 없고 더군다나 대속의 개념도 자리를 잡을 곳이 없다.


로마서 1-3장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진노하심과 심판과 연결되어 나타나며,  하나님과 동격이신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심판의 진노를 해결하실 수있는 분이시다.


그러나 새관점에서 보여주는 그리스도의 사역은, 두번째 아담으로서 첫번째 아담에서 나타난 죄의 문제를 해결하신는 분으로서의 속죄나 대속이 배제된체, 오직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시는 정치적 의미의 메시아로만 그려지고 있다.


3) 힘에 대한 승리를 말한다.


톰 라이트가 언급하는 “그리스도의 주되심”은 십자가를 통하여 로마에 대항하여 죽으심의 방법으로 얻으신 것이기에, 물리적 힘에 대한 승리를 말한다.


이는 인간의 죄성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을 충족시킨다는 개념과는 다른 것이며, 세상 권력을 상징하는 로마에 대하여 어떠한 방식으로 승리를 할 수 있으셨는지를 손수 모범을 보여주심으로, 세상 권세에 대한 승리의 한 방법을 제시해주셨다고 말한다.


4) 유대적 이스라엘의 소망의 성취


톰 라이트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아담의 범죄와는 관계가 없는, 단지 유배 생활 상태에 있는 이스라엘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제시된 것이다.


톰 라이트는 예수의 최후의 만찬이 이스라엘의 유배 생활 상태의 종식을 선언하는 것이었으며, 이스라엘이 더 이상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새로운 행동방식을 제시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본을 보여주셨다고 말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톰 라이트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유대 이스라엘의 완성을 위한 해석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는 누구를 위하여 죽으셨나


그리스도는 창세 전에 택하신 자를 위하여 죽으셨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이 아니다.

선택받은 자들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는 자들이다.

이들에게는 어떠한 요구도 없는 오직 전적인 은혜로 부르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사랑하는 자를 위해서 막힌 담을 허신 것이다.

인간은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자이기에 어떠한 공로나 선행도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없으며, 인간은 구원의 값을 지불할 능력이 없는 자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하여 오직 값없이 은혜로 구원해 주시는 것이다.

이러한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의한 것이기에 선택받지 않았다고 항의조차 없다.

그날에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자들은 선택받지 못함의 분노가 아니라 자신의 뜻이 좌절된 것에 대하여 분노할 것이다.

새관점이 말하는 십자가는 사랑의 십자가가 아니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십자가의 길을 걸어야한다면, 전쟁의 위협에서 그냥 희생 당해야만 할 것이며, 북한이 침공한다면 그냥 당하는 것이 답일 것이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십자가는, 선택받은 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희생적인 삶을 요구하는 무거운 것이다.

새관점에서의 십자가는 세대주의자들 보다도 한 걸음 더 나아가 유대적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삶의 지침이면서 기독교를 유대교에 흡수하려는 것이다.

새관점에서의 십자가는 선택과 예정이라는 개념이 없다.

새관점에서의 십자가는 속죄사역이 아니기에 칼빈의 5대강령을 찾아 볼 수가 없다.

새관점에서의 십자가는 율법의 멍에보다 더 무거운 멍에를 요구한다.

새관점에서의 십자가는 정통 안에서 찾아 볼 수 없는 다른 복음의 십자가인 것이다.

새관점의 십자가에 의하면 이 세상에는 어느 누구도 구원받을 것에 대하여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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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의 소명의식과 상징적 행동들


김원호(dent4834@hanmail.net)


예수의 소명의식


왜 톰 라이트는 예수께서 메시아로서의 소명의식을 가지고 있으셨는지, 그리고 그 소명의식이 어떠한 행동으로 표현되었는지, 그 결과가무엇인지에 대하여 많은 지면을 할애하면서 서술을 하고있다. 여기서는 톰 라이트가 예수가 소명의식을 가지고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있는 그의 서술들을 통하여 개혁주의 입장에서 이를 분석 비판하고자한다.


1)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하여야만 하는 소명의식


톰 라이트는 예수께서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아셨가는 개념보다는 마땅히 하나님이 하실 수있는 메시아로서의 일을 하심으로 하나님께 인정받음으로서 하나님의 보좌의 우편에 앉아야만 하는 소명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한다.

이는 마치 사람이 신이 되어야만 하는 의무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표현으로 들리기도 하고 아니면 하나님께 인정 받아야만 하는 의무감? 혹은 자신이 메시아가 되어야만 하는 소명감 등으로 오해를 받을 수 있는 모호한 표현들을 하고 있다.


톰 라이트는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아셨다"라는 말을 명쾌하게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님은 이스라엘과 온 세상을 위해 성경에 따라 야웨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행하고 그 분만이 되실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만 한다"고  믿으셨다는 것이다"라고 표현한다.

오직 야웨만 성취하실 수 있는 일을 이루시는 것이 자신의 과업이라고 생각하셨다는 것이다.(N.T. Wright’s ‘The Challenge of Jesus’,121)


이는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초자연적인 의식을 품었다는 말이 아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초자연적인 의식을 품었다는 말은 오히려 예수에 대하여 가현설(docetism)을 주장해야만 예수의 신성을 고수할 수있는 18세기의 이신론적 맥락과 함께하는 이들의 견해라는 것이다.(N.T. Wright’s ‘The Challenge of Jesus’, 121)


라이트는 예수의 인성을 강조하다가 오히려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 쪽으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다.


2) 유대교가 상징하는 것을 구현해야하는 소명의식


예수께서는 유대교의 상징들 즉 성전과 토라, 말씀(word)과 영spirit)과 지혜(wisdom)들이  야웨께서 온 세상을 위해 이스라엘 가운데 계시며 구원을 베푸신 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기에 이러한 상징들을  몸소 구현하는 것이 예수 자신의 소명이라고 믿으셨다는 것이다.(N.T. Wright’s ‘The Challenge of Jesus 122)


3) 예루살렘 입성을 통해  역사적 사실로서 증명되는 나사렛 예수의 소명의식


톰 라이트는 예수가 심판자이자 구속자로 시온에  돌아오실 야웨의 이야기를 몸소 구현하여야 하는 소명의식을 가졌다고 말한다.


라이트는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면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신 것은, 야웨께서 심판자이자 구속자로 시온에 돌아오실 것에 대한 예언이며, 성전파괴를 상징하고 최후의 출애굽을 경축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몸소 구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톰 라이트는 나사렛 예수께서 어떤 소명을 의식하셨다는 것을 역사적 사실로서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N.T. Wright’s ‘The Challenge of Jesus’, 123)


4) 유대의 행동방식에 대한 수정을 통하여 새로운 이스라엘의 행동 규범을 제공해주어야했다.


유대 이스라엘의 문제는 로마에 항거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동 방식에 문제가 있었다고 본다.


톰 라이트에 의하면 유대 이스라엘은 1) 로마와 결탁하는 헤롯방식, 2) 로마와 분리된 삶을 추구하는 이원론적 방식, 3) 로마에 정면으로 투쟁하는 시카리(Sicarii)의 열혈당방식이 있었다고 말한다.


예수는 이들에게 유대주의의 행동 방식과는 다른 방식을 제공해주는 것이 소명이었다는 것이다.(예수의 도전, 48)


5) 하나님 나라 운동을 시작 할 소명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 나라 운동의 주체가 되심으로 세상을 위한 사역을 감당해야 한다는 소명의식을 가지셨다.(예수의 도전, 39)


예수님의 사역 중의 하나는 하나님 나라 운동을 지원할 세력 즉 새로운 백성을 부르시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진정 만왕의 왕이 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하신 일이다.(예수의 도전, 52)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초기 기독교 자체가 하나님 나라 운동이라고 생각했으며, 유대교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가 탄생되었다고 말한다.(예수의 도전, 193)


6) 이스라엘의 대표로서의 메시아적 소명 의식


“예수께서는 이스라엘이 이교사상과 싸우려는 욕망 자체를 타락으로 보셨는데 이는 이스라엘이 민족주의 혁명의 온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이스라엘의 대표로서 이스라엘의 고난의 문제를 스스로 짊어지시는 것이다.


예수는 이스라엘의 대표로서 이스라엘이 할 수 없었던 이스라엘의 소명, 곧 세상의 빛이요 종이 되는 그 소명을 이루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이해하셨던 자신의 메시아적 소명이다.

(예수의 도전, 129)


7) 성전의 존재와 역할로서의 부르심의 소명 의식


예수님께서 지니신 소명의식의 중심에는 자신이 성전의 존재와 역할을 하도록 부름받았다고 믿는 신앙이 있었다.


성전에서의 예수님의 행동은 자신이 메시아이심을 주장하는 상징적 행동이었다.


즉 이스라엘의 긴 이야기가 자신 안으로 집약되는 것이 자신의 운명이라고 믿었음을 보여주는 행동이었다.


예수는 자신이 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하시는 장소요 수단이라고 주장하셨다.


예수는 자신의 소명이 새로운 성전으로 행동하는 것이라고 믿으셨다. (N.T. Wright’s ‘The Challenge of Jesus’, 111)


8) 전투에서 지는 소명의식


톰 라이트는 예수의 소명을  모든 인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의 보혈을 통한 속죄 사역이 아니라, 유대 이스라엘의 잘못에 종지부를 찍고서 새로운 방법을 시도하는 예수님으로 묘사하고자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있다.


“예수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해 그 전투에서 지는 것이 자신의 과업이자 역할이며 이스라엘의 대표로서 맡은 소명이라고 확신하셨다.” (예수의 도전, 128)


전투에서 지는 것은,  이스라엘이 마케베우스의 반란과 같이 로마에 대하여 무력적으로 저항하는 것은 세상의 빛이 되기 위한 이스라엘의 해방을 가져올 수 없기에 예수께서는 무저항을 통한 죽으심으로 메시아적 소명을 성취하셨다는 것이다.


9) 이스라엘이 하여야할 역할을 대신할 소명


톰 라이트가 보는 예수의 소명은, 원래 이스라엘이 당담했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함으로서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였기에, 유월절 만찬을 통하여 바벨론 포로의 생활을 청산시키고서, 스스로 이스라엘이 되셔서 로마에 죽임을 당하는 길을 걸음으로서 이스라엘이 하여야 할 것을 친히 담당하셨다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의 십자가는 이스라엘의 소명을 위한 것이다.


10) 이스라엘과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과 공의의 선포


예수는 이스라엘과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과 공의의 계획을  예수 자신의 현존, 자신의 일, 자신의 운명으로  실현시켜야 할 소명을 가지고 있다.(예수의 도전, 49)


여기서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구원과 공의의 계획은 이 땅에서 완성되는 하나님 나라 나라이며, 하나님 나라와 구원이 유대적  이스라엘을 통하여 실현되는 것이다.


예수의 상징적 행동들


예수의 소명 의식은 예수의 상징적 행동들을 통해서 구체화된다.


톰 라이트는 예수의 상징적 행동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는 예수가 하나님의 선택된 대리자였다는 사실을 생각하여야한다고 말한다.(N.T. Wright’s ‘The Challenge of Jesus’, 105)


성전에서의 예수의 행동은 자신이 메시아이심을 주장하는 상징적 행동이었으며, 이스라엘의 긴 이야기가 자신 안으로 집약되는 것이 자신의 운명이라고 믿었음을 보여주는 행동이었다는 것이다.


예수의 행동들은 상징적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는, 최후의 만찬, 성전에서의 행동, 예루살렘 입성, 십자가에서의 죽음, 부활등이 있다고 말한다.(예수의 도전,169)


하지만 상징적 행동들에 대한 톰 라이트의 해석은 지극히 유대주의적인 해석이며, 자신이 그리는 유대주의적 구도에 맞춘 인위적이고 보편성이 결여된 모습을  보여주고있다.



상징적 행동들이 바리세인과 충돌하는 이유


예수님과 바리세인의 충돌하였던 이유에 대하여 톰 라이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 예수와 바리세인의 충돌은 믿음과 행위의 충돌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의제를 내세워, 조상의 규약으로 인한 과대망상적인 자기 방어를 내려놓고 세상의 빛과 이 땅의 소금이 되라는 소명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하셨기 때문이다.


2) 이들의 충돌은 서로 다른 종말론적 믿음과 기대로 인한 서로 다른 정치적 의제라는 측면에서 봐야한다.


3) 예수님은 바리세파를 주도하던 그룹의 혁명적인 열정을 가열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문시하는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다.(예수의 도전, 81)


4) 예수는 공생애 전체에 걸쳐 마치 자신이 새로운 출애굽을 시작하는 듯 행동하셨다.(예수의 도전, 168)


톰 라이트는 예수의 행동이, 노예상태의 하나님의 백성을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고서 구출하러오신것과 같은 상징적 행동 방식으로 해석되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톰 라이트는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 상태를 애굽에서의 노예 상태에 적용시키고있으며, 예수의 상징적 행동들은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연상시키는 행동들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바리세인들이 자신들이 종이 된 적이 없다고 말하는데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죄를 짓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바벨론 포로가 아닌 죄의 종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 8:33-34)


신약 어디에도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였음을 시사하는 내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톰 라이트는 줄곧 바벨론 포로생활을 말하고있다.



톰 라이트의 다른 관점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의 소명 의식과 상징적 행동방식에 대한 해석이 전통적 개혁주의와 다른 것은 톰 라이트의 다음과 같은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1) 톰 라이트는, 복음주의를 비롯한 서양의 정통파는 하나님에 대해 지나치게 높고 초연한  견해를 오랫동안 지속해왔다고 말한다.(예수의 도전, 181)


그러나 과연 개혁파의 생각이 지나치게 높고 초연한 견해일까?


라이트는 모든 인간이 아담의 후손으로서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인간의 죄성에 대한 인식이 있을 때는 분리의 개념인 거룩하신 하나님과 가까이하는데 한계를 인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새관점에서의 인간론은 존재론적으로 아담의 죄와는 관계가 없다는 생각에서, 유대 이스라엘을 유대 시오니즘적으로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자부심으로 인하여, 하나님은 인간 사회의 완성을 위한 하나님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라이트가 말하는 시오니즘적 하나님은 초연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현실적인 삶의 영역에 깊숙히 들어오셔서 인간의 왕이 되시는 하나님이시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에서의 하나님은, 인간 사회 깊숙히 들어오셔서 직접 나라를 다스리시는 왕으로서, 인간 사회와 분리될 수없는 하나님이시다.


이는 개혁파에서 말하는 “이미와 아직”의 긴장감보다는, 이미 이 땅에 실현된 하나님 나라라는 관점을 견지하고있는 것이다.


2) 톰 라이트는 개혁주의가 하나님에 대한 높고 초연한 견해를 전제로 기독론의 문제에 접근한 뒤에 예수를 거기에 끼워 맞추는 경향이 있었다고 말한다.(예수의 도전,181)


톰 라이트는 개혁주의가 가지고있는 전제주의를 비판하고있다.


하지만 전제는 성경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개념이다.


톰 라이트는 제2성전 유대교에 대한 역사적 예수 연구를 성경 해석의 전제로 삼는다.


하지만 제2성전 유대교의 자료들에 대하여 얼마나 객관적으로 접근하고 있는지는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사도 시대의 행적들을 보면, 유대인 성도들이 유대교에서 명확하게 분리되어있지 않은 모습들이 많이 나타난다.


지금의 기독교 교리와 제2성전 유대교에서의 성도들과는 많은 면에서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톰 라이트가 근거로 제시하는 제2성전 유대교에 대한 역사적 탐구는 현재 기독교의 표준이 될 수 없다.


톰 라이트는 기독교가 어거스틴 이후에 변질되었다고 보지만, 오히려 아거스틴을 계시로 제대로 교리의 틀이 갖추어지기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예수는 성경의 중심이며,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서도 중심이 되실 수밖에 없다.


예수를 중심으로 성경을 해석하면 예수는 유대주의와 대립 될 수밖에 없다.


구속주로서의 예수는 예수에 대한 전제가 아니라 성경 전체가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톰 라이트는 제2성전 유대교의 언약적 율법주의라는 전제에서 예수를 무리하게 유대 중심적으로 해석하고있다.


톰 라이트가 해석하는 예수를 경륜적 삼위일체의 관점에서 본다면, 예수는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신 하나님이 아니다.


여기서 톰 라이트의 기독론의 문제가 드러난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


1. 참된 예수는 역사적 예수 탐구 없이는 알 수 없는가?


톰 라이트는 예수의 소명 의식과 상징적 행동들에 대한 해석의 근거로 “역사적 예수 탐구”에 의한 자료들을 제시한다.


톰 라이트는 자신이 역사적 예수 탐구를 하는 이유는 참된 예수를 알기 위한 것이라고한다.(Simply Jesus, 31)


톰 라이트는 역사적 예수 탐구라는 방법을 통하지 않고는 참된 예수를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제1,2차 대전 동안에 교회가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를 하지 않았을 때 비역사적 예수가 제시되어 나치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했다는 에른스트 케제만의 1953년에 행한 연설에 동의하면서, 역사적 예수 탐구가 없는 동안에는 진정한 예수를 알 수가 없고 이 예수를 따를 수도 없다는 것이다.(Challenge of Jesus, 21)


톰 라이트는 제 3의 탐구라고 불리우는 새로운 탐구가 시작된 1980년대 이후에야 비로소 진정한 예수를 알 수 있었다고 말함으로써, 지상의 교회들은 지난 2000년 동안 잘못된 만들어진 예수를 믿어 왔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2. 성경보다는 1세기 유대문서를 성경 해석의 근거로 삼고있다.


톰 라이트는 성경 해석의 출발을 성경 이외의 자료를 근거로 하고 있다.


그는 성경에 대한 해석은 역사적 검증과 신학적 검증을 통과하여야한다고한다고 말한다.(Simply Jesus, 20)


이를 위해서 신자는 모두 다 1세기의 역사가가 되어야한다는 것이다.(Simply Jesus, 21)


그의 검증 방식은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개혁주의의 방식과는 다른 것이다.


톰 라이트는 성경을 그대로 믿고서 역사적 예수 탐구를 하는 것도 아니며, 성경을 통하여 역사적 탐구를 하는 것도 아니고, 오직 성경이외의 1세기 역사적 자료를 근거로하여 성경을 해석하고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근거로 내세우는  1세기 자료는 일부 지역의 보편성이 결여된 자료를 근거로 하기에 성경 해석의 기준이 될 수 없는 자료들이다.


3. 전통적 기독교는 우리가 만든 예수라는 우상을 섬기고 있다?


톰 라이트는 예수께서 품으신 1세기 사고방식은 우리에게 낯설기도하고 불쾌감마저 주고 있다고 말한다.(예수의 도전,134)


전통적 기독교는 1세기 제2 성전 유대교에서 이해하는 예수와 너무도 동떨어진 예수 이기에, 이에 익숙한 전통 기독교에서는 자신의 예수에 대한 해석에 당황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예수에 대한 계속적인 역사적 탐구는 계속되는 기독교적 제자도에 필수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Challenge of Jesus, 15)


그는 심지어 서구 기독교가 동정녀 탄생이라는 신화(?)를 믿고있으며(Simply Jesus, 18), 서구 기독교는 예수에 대한 환타지를 만들고 있다고 말한다.(Simply Jesus, 21)



비평


1. 마치 사람이 신이 되었다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톰 라이트는 예수가 소명의식을 가지고있음으로 인하여 사람이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고 하나님께 인정 받음으로서,  하나님의 보좌의 우편에 앉으셨으며,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하나님이 되셨다는 의미가 풍겨진다.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예수의 소명의식과 역할은 삼위 하나님의 위격을 가지고있지 않더라도 가능한 역할이기에, 예수의 신성과 인성에 논쟁의 소지를 제공한다.


달리 말하면 사람이신 예수님이 어떻게 하나님이 되셨는가에 대한 이야기로 이해될 수도 있는 해석이다.


2. 유대주의적 메시아 사상의 완성을 말한다.


예수를 소명의식을 통한 메시아로 규정함으로서, 유대적  메시아 사상을 기초로 한 시오니즘이 예수의 소명의식을 기초로 완성되었음을 주장하고 있다.


유대인들이 고대하던 메시아의 돌아오심이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을 통하여 이루어졌음을 말함으로서 유대주의적 시오니즘의 완성을 말하고있다.


3. 유대주의적 하나님 나라를 말하고있다.


톰 라이트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적 이스라엘의 구현이다.


톰 라이트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적 이스라엘의 성전이시며, 예수 그리스도는 새이스라엘이시다.


톰 라이트는 예수 그리스도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을 중심으로하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구현하시는 분으로 묘사한다.


톰 라이트가 보는 예수의 행동 방식은 새롭게 구성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 행하여야 할 행동 방식의 규범을 보여주신 분이시다.


4. 힘에 대한 승리라는 구속 방식을 말한다.


톰 라이트가 언급하는 “그리스도의 주되심”은 개혁주의가 전통적으로 이해하고있던 형벌에 대한 충족의 개념보다는 힘에 대한 승리 개념의 교리를 강조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로마의 압제에 대한 항거 방식으로서 희생을 통한 승리를 강조하고있다.


5. 새로운 성전?


예수님께서 자신이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하는 장소요  수단이라고 주장하셨다면 현재 우리가 예수님을 생각할 때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전과 같은 개념에서 생각하여야 하는가?


톰 라이트는 예수님이 성전이 되신다는 말을 할 때 새관점에서 주장하는 언약적 율법주의 개념에서의 성전을 말하고있다.


언약적 율법주의 개념에서의 성전은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성전과는 차이가 있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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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라이트가 말하는 젊은 유대인 예수


김원호(dent4834@hanmail.net)


젊은 유대인 예수


톰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는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예수와 많은 차이가 있다.


그 가운데 한 가지는 라이트가 예수를 유대주의적인 맥락에서 삶의 새로운 행동 방식을 보여준 패기 넘치는 유대인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묘사하는 예수는 유대주의와 대립적이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이 중심이 되는 하나님 나라를 새롭게 시작한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톰 라이트는 정통 개혁주의의 기독론을 거부하며, “젊은 유대인”으로서의 예수를 새롭게 정립하고있다.


톰 라이트는 가현설적인, 혹은 반가현설적인 예수를 그리고 있다는 서구 기독교 사회의 예수에 대한 초자연성을 거부하며 좀 더 현실 세계 속에 깊숙히 관여하고있는 예수에 대한 이미지를 그리고자 예수에 대하여 '젊은 유대인'이라는 표현을 하고있다.


라이트는 이 젊은 유대인을 굉장히 위험한, 아니 무모하기 그지없는 소명에 사로잡힌 나머지 눈물을 흘리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성전을 모독한 뒤에 로마의 십자가에 달려 죽는 한 젊은 유대인으로서의 예수라고 말한다.(예수의 도전, 181)


라이트는 십자가의 예수에 대하여, 가시관에 둘러싸인 한 인간의 얼굴로서,소명을 품은 젊은 유대인이 메시아적 사명을 가지고 하나님의 초상화를 다시 그렸다고 말한다.(예수의 도전, 182)


톰 라이트가 사용하는 젊은 유대인이라는 표현은 매우 생소하다.


아마 톰 라이트는 예수를 유대인이라는 맥락에서 그리고 싶었으며, 예수의 삶의 모습이 로마에 떳떳하게 맞서는 용기있는 청년이라는 의미에서 젊다는 표현을 하고있다.


이는 매우 인간적인 표현이며, 예수를 유대교의 완성이라는 맥락 속에 집어넣고서 유대적 이스라엘이 따라가야할 모델로서 그리고 있는 것이다.


톰 라이트에게 예수의 성육신은 1세기 제2성전 유대교에서 해석되며, 성육신 하신 예수의 역할은 유대교와 대립 관계가 아닌 유대교의 완성을 위한 것이다.



새로운 도덕률을 만드신 예수님?


톰 라이트는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하시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시는 것은 그들에게 새로운 도덕률을 제시하시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예수님이 사시던 시대의 유대인들은 이미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높은 도덕률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들에게 더 높은 도덕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도덕과는 다른 새로운 도덕률을 제공하시기 위한 것이라고한다.


라이트는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행실이란 하나님의 주도권과 언약에서 마땅히 흘러 나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예수의 도전, 61)


이와같이 라이트는 유대인의 행실과 예수님의 행실을 같은 속성을 가진 동일한 맥락에서, 같은 목적을 가지고, 같은 방법으로 행하여 질 수 밖에 없는 것으로 본다.


라이트가 보는 예수의 행실은 유대인의 행동 방식의 연장 선상에 있는 것이다.


라이트가 보는 복음은 율법과 대립 관계가 아니며, 율법과 연속성을 가지고 있으며, 불연속적인 속성은 배제된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주의의 완성을 위하여 오셨는가?


톰 라이트는 돌아온 탕자 비유에서, 돌아온 탕자는 바벨론 포로에서 귀한 하는 둘째 아들로, 아버지는 예수님으로, 첫째 아들은 바리세인과 율법사로 묘사하고있다.


라이트는 아버지와 첫째 아들은 같은 집에 있으면서 평소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말한다.(예수의 도전, 52)


이를 직접적으로 표현하면, 예수님은 바리세인과 율법사와 평상시에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는데 바벨론 포로 생활하는 이들에 대한 수용에 있어서 의견 충돌을 빚었다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해석하는 탕자의 비유는, 항상 아버지 안에 있던 바리세인과 율법사들에게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을 수용하라는 것으로 이스라엘의 회복을 통한 유대주의의 완성을 말하고 있다.


라이트는 “네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것이로되” (눅15:31)의 말씀은  바리세인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었음을 암시하고있다고 본다.


즉 최후의 만찬 이전의 예수님과 바리세인 율법사는 아버지와 첫째 아들로서 평소에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보며 최후의 만찬은 둘째 아들을 받아들이는 잔치로 해석한다.


이러한 해석은 라이트만의 독특한 유대주의적인 새관점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


톰 라이트는 바울과 예수는 1세기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고 말한다.(예수의 도전, 76)


라이트는 바울이 그가 저술할 당시에 유대 유일신 사상의 한 분 하나님에 관해 말할 때와 똑같이 예수에 대하여 말하고있다고 말한다.(예수의 도전, 156)


라이트가 주장하는 유일신 사상은, 바울이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 안에 있었다는 것과 같이 예수도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 안에서 이해되어야한다는 것이다.


라이트가 말하는 유일신 사상은, 예수의 행적도 언약적 율법주의라는 1세기 제2성전 유대교의 맥락에서 해석함으로서, 예수를 유대주의의 틀 안에서 해석하려는 시도이다.


라이트가 말하는 유일신은 인간의 구원을 이루는 의의 근원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이다.


이는 구약의 이스라엘이 유일하신 하나님의 의를 근거로한 은혜 안에 머물렀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신약의 성도들도 유일하신 하나님의 의를 근거로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성도의 칭의는 그리스도의 공로에 기초한 것이며, 성도는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아야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


하지만 톰 라이트가 말하는 의의 근거는 불트만 학파인 케제만이 말하는 “하나님의 의”, 즉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이라는 의를 근거로 하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유일신 사상은 의의 근거를 성부 하나님께 통합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유대교의 성전으로서의 예수


라이트는, 성전은 유대교의 핵심적인 ‘성육신’의 상징이었으며, 예수는 진정한 성전이라고 말한다.(예수의 도전, 161)


라이트는, 예수님께서 지니신 소명의식의 중심에는 자신이 성전의 존재와 역할을 하도록 부름받았다고 믿는 신앙이 있었다는 것이고, 자신이 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하는 장소요 수단이라고 주장하셨다고 말한다.


예수는 자신의 소명이 새로운 성전으로 행동하는 것이라고 믿으셨다는 것이다.(예수의 도전, 165)


라이트는, 예수가 자신과 자신의 사명이 성전을 대체한다고 주장하셨다고 말한다.(예수의 도전120)


예수께서는 성전이 상징했던 것을 몸소 구현한 인물이라는 것이다.(예수의 도전,162)


이상에서 톰 라이트가 말하는 성전으로서의 예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언약적 울법주의 맥락에서 성전이 가졌던 의미가 예수로 대체되었다는 것이다.


라이트가 말하는 성전이 되신 예수는,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형성된 유대적 이스라엘의 완성을 의미한다.


라이트가 말하는 성전은 믿음을 통하여 참여되는 것도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성전은 둘째 아담으로서 첫째 아담이 실패한 성전으로서의 에덴을 완성시키신 것이며, 성령의 새창조로 시작된 하나님 나라 백성 가운데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라이트가 말하는 성전되신 예수는 단지 예수를 유대적 이스라엘로 편입시키는 방법에 불과하다.



종식된 유대교의 부활


톰 라이트는 예수가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유대교 세계관의 대표적인 상징에 사로잡히지 말라고 도전하는 의미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을 하셨다고 말한다.


1)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2) 내가 온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하려함이라


이는 오는 시대를 유산으로 받으려면 가족을 떠나야한다는 것이다.


즉 소유를 버리라는 명령이며, 이는 개인의 헌신을 시험하는 최고의 잣대로서, 수도원적인 도전의 원형으로 간주되었다고 말한다.


이는 다음의 이중적 경고와 함께 등장한다고 말한다.


1. 이스라엘은 성전을 짓고있는데 과연 완공할 수 있을까?


2. 이스라엘은 거룩한 전쟁을 하고 싶어 하는데 과연 이길 수 있을까?


이러한 경고는 양도 불가능한 것이 되어 버린 민족적 정체성의 싱징들에 사로 잡히지 말라는 촉구였다고 말한다.(예수의 도전, 87)


이는 예루살렘 성전 파괴와 유대주의의 종식을 설명하기 위한 무리한 적용이다.


라이트의 해석은 유대주의의 종식에 대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사라졌던 유대주의의 부활을 위한 해석이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주의의 종식을 선언하셨는데 반하여 톰 라이트는 다른 차원의 유대적 하나님 나라를 부활시키고있다.



예수의 소명과 유대교


톰 라이트는 예수가 유대교의 상징들을 몸소 구현하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고 말한다.


유대교의 상징로서는 성전과 토라, 말씀(word)과 영spirit)과 지혜(wisdom)들이 있으며, 예수는 야웨께서 온 세상을 위해 이스라엘 가운데 계시며 구원을 베푸신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라고 말한다.(예수의 도전, 179)


이와같이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는 유대교의 부활을 의미한다.



예수의 메시아적 소명


톰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 자신의 메시아적 소명은, 이스라엘의 대표로서 이스라엘이 할 수 없었던 이스라엘의 소명, 곧 세상의 빛이요 종이 되는 그 소명을 이루시는 것이었다고 말한다.(도전 129)


라이트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이스라엘이 이교사상과 싸우려는 욕망 자체를 타락으로 보셨는데 이는 이스라엘이 민족주의 혁명의 온상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며, 예수는 이스라엘의 대표로서 이스라엘의 고난의 문제를 스스로 짊어지시는 것이다.


여기서 라이트가 말하는 이스라엘의 고난은 로마에 대하여 싸우는 방식의 문제였으며, 예수는 이러한 고난을 해결하시고자 새로운 방식을 보여주셨다는 것이다.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의 메시아적 소명은 유대적 이스라엘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예수의 행동 방식


톰 라이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새로운 유대주의적 행동 방식으로 보고있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유대인들의 행동 방식으로는 다음의 세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헤롯방식으로서 로마와 타협하는 유형을 말한다.


두 번째는 이원론적 방식으로서 상황을 피해서 숨어버리는 방식이다.


세 번째로는 시카리(Sicarii)의 열혈당 방식으로서 로마와 정면 충돌하는 방식이다.


예수님의 행동 방식은 유대주의의 행동 방식과 다르며, 예수의 소명과 의제가 극적이고 충격적이라고 말한다.(예수의 도전, 48)


톰 라이트의 이러한 해석은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희생을 속죄 사역이 아니라 유대 이스라엘이 로마에 대하여 어떠한 방식으로 행동하여야 하는지 본을 보여준 방식 차원으로 해석한다.


톰 라이트가 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속죄 사역과는 관계없기에, 십자가를 통한 의도 성립되지 않으며, 전가될 의도 없기에 의의전가 교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로마에 대한 예수의 행동방식이 옳다는 것을 믿으라는 이야기로서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믿음과는 다른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유대주의적 행동방식에 대한 새로운 대안으로서, 그리스도가 유대주의를 완성시키기 위해서 오신 분으로 묘사된다.


톰 라이트는 예수가 유대적 이스라엘을 완성시키신 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반대하던 일부 랍비들은 주후 135년 이후에 메시아주의를 포기하고 사적인 종교로 변해서 토라의 준수를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고 주장한다.(예수의 도전, 205)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톰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는 유대주의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이를 근거로 기독교의 틀을 유대주의의 틀에 맞추어 재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톰 라이트의 “바울에 관한 새관점”은 개혁주의의 교리들을 분해하여 유대주의 맥락에서 다시 조립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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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라이트가 말하는 믿음의 대상으로서의 예수



톰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의 “회개하고 믿어라”는 무슨 뜻인가?


1) 정치적 의미를 지니고있다?


톰 라이트는, 요세프스가 로마의 지휘관으로 예루살렘 귀족들에게 로마에 대한 반역을 하지 말도록 설득하면서 말한 “회개하고 나를 믿어라”와 같은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말한다.


요세푸스의 말은 정치적 의미를 지니고있는 것과 같이 예수님께서 회개하고 믿으라고 할 때에는 정치적 의미를 지니고있다는 것이다.(예수의 도전, 58)


예수님과 요세푸스의 차이가 있다면 예수님의 말씀에는 종교적이고 신학적인 차원이 있다는 것이다.(25)


2) 무엇을 회개하라는 것인가?


청중들에게 자신들의 의제, 즉 요세푸스와 같이 민족주의 혁명과 같은 터무니 없는 꿈을 포기하고 예수 자신이 보여주시는 이스라엘다운 모습, 하나님 나라의 도래, 하나님의 의제를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혁명의 방식을 포기하라는 것인지 민족적인 꿈을 포기하라는 것인지 불분명하다.)


톰 라이트는, 예수가 무장 혁명을 반대한 것은 이런 혁명은 신에게 불충성하고 이스라엘이 세상의 빛이 되길 바라는 그 분의 뜻을 거스르는 방법이란 이유로 반대를 표명했다는 것이다.(예수의 도전, 59)


여기서는 방법에 대한 포기를 촉구한 것이지 민족주의적인 꿈을 포기하라는 말은 아니었다.


라이트는 예수가 믿음을 말한 것은 예수 자신이 로마에 대하여 하려는 행동 방식에 대하여 믿고 신뢰하라는 것이라고 말한다.


라이트가 말하는 믿음은 민족주의적인 꿈을 이루기 위한 행동방식에 대한 방법론적 신뢰를 말하는 것이다.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의 십자가는, 로마 정부에게 어떠한 방식으로 저항해야하는지 삶의 방식을 보여준 것이며, 제자들에게 이렇게 하는 방식이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가야할 방식이며 이러한 방식이 효과있는 방식임을 믿으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예수의 희생을 유대인이나 아니면 인간의 죄악과의 관계성에서 풀어나가지 않고 오직 로마 정부와의 관계성의 문제에서 풀어나간다.


이는 톰 라이트의 유대 중심적 사고에서 나온 것이다.


따름의 대상으로서의 예수


톰 라이트는 예수의 행동 방식이 옳다는 것을 믿었을 때는 이러한 방식을 따라서 살아야한다고 말한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행위와 말을 통하여 새로운 정체성을 지닌 백성, 새로운 가족을 창조하고자 했으며, 이들에게 요구되는 유일한 조건은 예수와 그분이 전하는 메세지를 따르는 것이라고 말한다.(예수의 도전, 97)



믿음의 내용

톰 라이트가 말하는 믿음은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믿음과 많은 차이가 있다.

용어만 같을 뿐 내용에 있어서는 전혀 다르다.

톰 라이트는 예수가 제자들에게 자기를 믿으라고 할 때 그 믿음의 내용은 예수의 행동 방식에 대한 신뢰를 가질 것을 말하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믿음의 내용을 정리하기 위해서 몇 가지 개념을 간략하게 정리해보면서 살펴보고자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

톰 라이트가 말하는 그리스도가 걸어간 십자가에서의 처형은,그동안 이스라엘이 자신들을 압제하던 이들에 대하여 하였던 행동 방식을 수정하는 새로운 방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십자가는 세상에 대한 삶의 투쟁 방식을 제공하는 것이다.

(최후의 만찬의 의미)

톰 라이트는 최후의 만찬이 예수의 성육신 사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말한다.

라이트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의 포로생활을 청산시키고자 오신 것이라고 말한다.


포로생활의 청산 방법은, 유월절 식사를 통하여 유월절을 기념하며 이스라엘이 애굽의 종살이를 청산하였던 것을 상기시키면서, 바벨론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해방을 선포하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왜 십자가를 지셨나?

그동안 이스라엘은 로마와 타협하는 이들도 있었고, 숨어 피해 다니는 이들도 있었고, 또한 격렬하게 투쟁하는 이들도 있었는데, 이러한 방식들이 모두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최후의 만찬을 통하여 포로생활의 종식과 더불어 유대적 이스라엘이 앞으로 어떻게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가야하는가를 보여주는 십자가에서의 희생이라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단일 계획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함으로서 범한 죄로 인한 이스라엘의 국가적 저주를 제거하는 죽음이었다.(박영돈. 톰 라이트 칭의론 다시보기, 136)


예수가 제자들에게 자신을 믿으라는 것은, 이스라엘이 더 이상 똑같은 범죄를 하지 않기 위해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공할 자신의 방식을 믿으라는 것이다.

예수는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서, 십자가를 통한 희생방식이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방식이고, 이스라엘이 이러한 방식을 따라 살아갈 때 유대적 이스라엘을 넘어서 이방 세계로 확장된 이스라엘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라이트가 말하는 십자가에서의 희생은 예수가 자신의 죽음을 통해 이스라엘의 구속과 온 세상의 구속이 성취될 것이라고 믿었음을 보여주는 행동이라는 것이다.(예수의 도전,169)


예수는 누구에 의하여 희생 당했나?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의 죽으심은 로마에 대한 반역에 의한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 민족이 로마에 대한 반역을 어떠한 방식으로 하여야하는지 방식의 본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

(예수의 도전,123)

예수의 죽음은  로마에 의한 정치적 희생이었으며, 예수님의 로마에 대한 의제는 이스라엘 민족이 성전을 회복하고자하는 로마에 대한 의제와 같았다.


라이트는 예수님은 성전을 회복하고자 로마에 대한 반역을 죽음을 통하여 하신 것으로서, 예수님은 혁명적인 왕으로 처형되었다는 것이다.(예수의 도전,131)


라이트는 예수가 성전을 회복하기 위해서 혁명적으로 처형을 당한 것을 믿고서 이스라엘 민족도 자신의 방식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방식이라는 것을 믿고서 이를 따르는 삶을 살 것을 요고한다.


톰 라이트는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에 처형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는 예수를 죽인 주체가 유대인이 아니라 로마였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그리스도는 유대인에 의한 희생이 아니라 세상 정부를 대변하는 로마에 의한 희생이라는  것이다.

라이트는 예수가 이스라엘을 해방 시키기 위한 메시아로서 로마 총독을 대면했으며 로마 군대에 의하여 처형된 인물이라고 말한다.(예수의 도전, 202)



부활의 의미


라이트는 예수가 처형 당한 후 하나님이 예수의 로마에 대한 혁명적 행동방식의 정당성을 입증하시기 위해서 예수를 부활시키셨다고 말한다.(예수의 도전, 25)


톰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의 부활은 로마에 대항하여 로마에 처형당한 예수의 행동 방식이 옳았음을 하나님께로부터 증명받은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옳다고 인정받은 표시로서의 부활은 이스라엘을 포로 생활에서 위대하게 복귀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에스겔 37장 시대 이후 ‘부활’은 다양한 의미를 지녔으며, 이는 포로 생활에서 위대하게 복귀하는 것과 언약이 갱신되는 것을 나타내는 이미지였다고 말한다.


부활은 이스라엘이 지닌 죄와 죽음의 문제(포로 상태)가 해결되었고 야웨께서 자기 백성과 맺은 언약을 갱신하셨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이미지였다고 말한다.(예수의 도전,198)


이와같이 톰 라이트는 부활을 유대적 이스라엘의 정치적 상황에 적용시킴으로서,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처형당함이라는 행동 방식이 옳은 것이기에, 포로에서 해방된 이스라엘은 예수의 행동 방식을 믿고서 이를 따라서 희생적으로 살 때 더 이상의 포로생활을 하지 않게 되리라는 것이다.


신약의 교회

라이트는, 오늘날의 교회는 예수가 이루신 과거의 예수와 이스라엘의 관계를 모델로 삼아 세상을 위한 존재가 되어야 하며, 예수께서 당시 유대교에서 행하시고 말씀하셨던 모든 것은, 오늘날 교회가 세상을 위해 어떤 일을 하고 어떤 모습을 지녀야하는지를 적용해야하는데, 이는 예수의 본을 따라서 해야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도전73)


톰 라이트가 말하는 교회는 이방인 가운데 세워지는 확장된 이스라엘이며, 톰 라이트는 이러한 교회의 중심에는 유대인들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확장된 이스라엘로서의 교회는, 예수를 삶의 모본으로 본을 받는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확장이 되어야한다고 말한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신약의 교회의 믿음은 유대교 안에서 예수의 행동 방식이 하나님께 인정받은 옳은 방식임을 믿으라는 것이다.


나가는 말

메이첸은 예수의 행하신 일보다는 예수 자신을 믿어야하고 예수의 죽음보다는 예수의 인격을 믿어야한다고 말한다. (기독교와 자유주의, 그레샴 메이첸, 76)

예수가 하시는 말씀을 따르는 것은 아담의 후손인 인간에게는 매우 절망적일 수 밖에 없다.

산상수훈은 표면적인 율법보다도 더욱 강화된 내면의 문제를 다루고 있기에 율법도 지킬 수 없는 인간에게는 절망적인 말씀일 수 밖에 없다.

산상수훈은 한편으론 인간이 본질적인 죄인이라는 것을 깊이 깨닫게 해주며, 다른 한편으로는 베드로와 사도들의 변화된 모습과 같이, 성령의 도우시는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감당하여야 할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율법이 하나님의 언약 안에 머물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는 새관점의 주장을 신약에 적용한다면, 산상수훈은 신약시대에 하나님의 의(케제만이 주장하는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의) 안에 머물기 위한 조건이 되는 것이며, 이는 오히려 율법의 멍에보다도 더욱 무거운 멍에을 지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예수의 희생의 방식을 믿으면서 이러한 방식을 따라서 살 것을 말하지만, 성전도 상실된 신약 시대에 이러한 방식으로는 하나님의 의 안에 머무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의 행동 방식을 믿고 따르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삶으로는, 최종적 구원에 이르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에, 예수를 더욱 믿을 수 없는 인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더군다나 한때 새관점을 강하게 비판했던 것과 달리, 새관점을 옹호하는 방향으로 선회한 김세윤 교수는, 성화를 새관점의 율법의 역할과 대비시키면서 "산상수훈은 이중사랑(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같이 사랑하라)에 대한 강해로서 서기관과 바리세인보다도 더 나은 의를 행해야한다"고 절망적인 방향을 제시하고있다. (칭의와 성화, 김세윤, 118)

이러한 새로운 기준은 성화를 구원의 조건이 되는 행함의 원리로 바꾸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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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라이트의 메시아 사상 비평


김원호(dent4834@hanmail.net)


메시아라는 용어는 이방인인 우리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개념이지만 유대인들에게는 절대적으로 중요하면서도 그들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개념이기에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과연 어떠한 메시아였는지는 우리에게도 그리스도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기름부음 받은 자로서의 메시아, 즉 그리스도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성경에 대한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


이제껏 기독교 안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는 교파 간에 큰 차이가 없었지만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이제껏 우리가 이해하였던 개념과 다른 개념의 메시아를 소개하고있다.


톰 라이트가 예수를 어떠한 메시아로 규정하는지 살펴봄으로서 톰 라이트가 말하는 새관점이 정통 개혁주의와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재정의된 메시아개념


톰 라이트는 메시아의 개념과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재정의한다.


재정의된 메시아는 포로 상태에서 귀환한 백성의 중심에 있었다.


예수님은 자신이 귀환한 포로의 중심에 있었기에 자신을 재정의된 메시아라고 생각하게되었다는 것이다.


이전의 왕으로서의 메시아는 유대적 이스라엘 성전을 관리 보수(?)하였지만 재정의된 메시아는 혁명적으로 재정의된 하나님 나라 개념에 맞는 것이다.


재정의된 하나님 나라는 포로 상태에서 귀환한 백성으로 구성되었다.(예수의 도전 116)


이와같이 톰 라이트는 예수를 이스라엘을 포로 상태에서 해방시키신 분으로 규정하며 예수님을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고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메시아로 한정 시키면서 메시아를 포로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중심의 혁명적인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방인인 우리에게 톰 라이트가 말하는 메시아로서의 예수는 어떠한 분이신가라는 질문을 낳게된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메시아의 의미


1. 메시아’라는 단어는 ‘신성’의 의미를 가졌다.


2. 예수는 자신을 메시아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그 분이 자신을 신적인 존재로 생각하셨다는 의미로 여겨진다. (예수의 도전 156)


3.제 2성전 유대교인들은 예수가 부활하시기 이전에  이미 예수를 메시아라고 생각했었다. (예수의 도전108.)




유대인들이 기대하였던 메시아


라이트가 전하는 유대인들이 기대하였던 메시아는


1. 이방인을 물리치고

2. 성전을 재건하며

3. 하나님의 공의를 온 세상에 실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님은


1. 자칭 메시아가 이방인의 손에 죽으시고

2. 성전을 재건하지도 못하셨고

3.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거나 공의를 세상에 실현시키지 못했다.

(예수의 도전 203)


여기서 라이트는 예수가 이방인의 손에 죽었다고 말한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는 분명하게 유대 지도자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리스도를 죽였다고 전하고있다.


그러나 라이트는 예수의 희생을, 유대인이 아닌, 세상을 대변하는 로마 정부에 의한 것으로 규정함으로서 메시아이신 예수를 세상 정부를 대변하는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신 분으로 재정의하고있다.



예수는 어떤 의미에서 메시아인가?


1) 단순한 부활 때문이 아니다. 제2성전 유대교인들은 예수가 부활하시기 이전에  메시아라고 생각했었다. 제자들이나 제2성전 유대인들이 부활을 통하여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생각했던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이전에 예수님이 (유대주의적)메시아라고 생각했지만 부활은 이러한 생각을 확증해 주는 사건이었다.


2) 예수의 임무는 이전의 왕족들이 가지고 있었던 임무를 완성하는 것이었다. 예수께서 진정한 메시아라는 믿음은 아주 초창기 기독교에 뿌리 박혀있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께 사용한  ‘크리스토스’(Christos)라는 단어는 왕족의 색체를 지니고있었지만 이들은 위험을 감수하고 예수께 이 용어를 사용하였다.


3) 예수께서는 이스라엘의 역사가 (자신이 사역하는 시간에) 초점에 도달했다고 믿으셨다. 즉 포로상태가 절정에 도달했고 이 중대한 시점에 자신이 이스라엘의 운명을 짊어진 인물이라고 믿으셨다. 예수는 이 운명을 자신의 것으로 삼고 메시아로서 이 임무를 완수하셨다.(예수의 도전 105, 128)


4) 예수는 성전을 재건하시기 위하여 오신 분이시다. 예수가 메시아이심을 나타내는 가장 확실하고 명백한 증거는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하신 행동에서 찾을 수 있다. 예수님의 성전에서의 행하심은 개혁의 시도로 보아서는 안되고 심판의 상징으로 보아야한다.


제2성전기의 유대인이 생각하는 메시아는 이스라엘을 구출하고 세상에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는 일이었다.

유대 역사의 왕권을 가진 이들은 첫째로 성전을 짓거나 보수할 것이고 둘째는 적을 상대로 결정적인 전투를 벌이는 것이다. 유대 역사의 왕들은 적과의 싸움과 동시에 성전을 짓거나 보수하는 일을 하였다. 메시아는  궁극적으로 유대 역사의 왕들이 하는 일을 완전하게 행하시는 이로 인식되었다.(예수의 도전 108)


예수님은 이러한 과업을 이어받아서 하셨다면 예수님은 메시아로서의 역할을 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소명이 이스라엘의 메시아가 되는 것이라고 줄곳 믿으셨던 것으로 보인다.(예수의 도전 116)


5) 메시아는 혁명적이다. 예수께서는 혁명적 메세지를 전하였는데 이 이중의 혁명적 메세지는 강경파의 단순한 혁명적 메세지가 아니라 혁명의 의제까지 포함하면서 다른 모든 의제를 뒤엎을 메세지다.이러한 혁명을 통하여 예수께서는 자신의 메시아적 역할과 구속적 고난의 소명이 모두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했다.(예수의 도전 72)


6) 예수는 십자가에 대한 소명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메시아로 부름 받았다는 예수의 믿음은 십자가에 대한 예수의 소명의식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이다.(예수의 도전117)


여기서 라이트는 메시아개념을 십자가와 연결시킨다. 여기서 메시아라는 개념은 왕의 개념과 연결되며 왕의 역할과 의무는 성전을 관리, 보수하는 일이었기에 메시아의 사역은 성전을 건축하는 일과 연결된다는 것이다. 예수가 메시아로 부름을 받았으며 또한 십자가에 대한 소명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십자가를 통하여 성전을 건축하는 일이되는 것이라고 라이트는 말한다.


7) 예수는 이스라엘의 대표이시다. “예수께서는 이스라엘이 이교사상과 싸우려는 욕망 자체를 타락으로 보셨는데 이는 이스라엘이 민족주의 혁명의 온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이스라엘의 대표로서 이스라엘의 고난의 문제를 스스로 짊어지시는 것이다.


예수는 이스라엘의 대표로서 이스라엘이 할 수 없었던 이스라엘의 소명, 곧 세상의 빛이요 종이 되는 그 소명을 이루시는 것이다.이건이 바로 예수께서 이해하셨던 자신의 메시아적 소명이다.(예수의 도전 109,  129)


8) 예수는 메시아적 저주(Messianic Woes)를 감당하신 분이시다. 구원이 실현되기 전에는 심한 고난의 시기를 거친다. 즉 대환란이 닥칠 것이고, 그것을 통해 구속, 새 시대, 죄 용서가 이루어질 것이다. 슈바이처는 예수께서 이스라엘에 도래하는 시험(메시아적 저주)의 때를 보셨고 예수께서 이 메시아적 저주를 온 몸으로 받으려고 하셨다는 것이다.(예수의 도전 116)



메시아의 실현을 위한 예루살렘 입성


라이트는 예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은 야웨께서 시온으로 귀한 하신 것을 분명히 하는 것이며, 예루살렘 입성은 예수께서 메시아적 소명을 감당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라이트가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이 뜻하는 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왕으로서의 상징적 행동이다.(예수의 도전, 110) 유다스 마케베우스가 이방인을 물리치고 성소에 참 예배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들어올 때 야자수 가지를 흔들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행동도 이와같이 왕으로서 행하신 것이다?(마카비후서 10:7)


2) 오랜 기다림 끝에 야웨께서 시온에 복귀하는 것을 상징하고 구현하는 것이다.(도전169)


3)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장면은 야웨께서  시온으로 귀환하셔서 자신의 백성들과 (언약백성으로 제대로 살았는지) 정산을 하고 모든 일을 결말짓기 위해 그들을 방문하시는 것이라고 말한다.(도전172)


4) 야웨께서 마침내 되돌아 오신다는 경고다. 야웨께서 예루살렘에  되돌아 오신 것은 “평화에 관한 일을  거부했던 자들에게 내려질 끔찍한 심판을 의미한다.(예수의 도전, 172)


5)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마태복음 25장의 왕/주인의 비유에 대한 것이다.


6) 예수님은 자신이 장차 야웨의 우편에 앉게 될 것을 받아들인 후에 자신을 통하여 메시아의 소명이 실현되는 것을 예견하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


7) 야웨께서 심판자이자 구속자로 시온에 돌아오실 것이라고 예언하고서 성전파괴를 상징하고 최후의 출애굽을 경축하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신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이 이야기를 몸소 구현하는 것이다. (예수의 도전 180)



예수의 이중의 혁명적 메세지


라이트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혁명적 메세지를 전하였는데 이 이중의 혁명적 메세지는 강경파의 단순한 혁명적 메세지가 아니라 혁명의 의제까지 포함하면서 다른 모든 의제를 뒤엎을 메세지다.(예수의 도전, 72) 예수의 혁명적 메세지의 특징은 다음과같다.


1) 예수가 이루고자하는 메시아적 소명은 물리적인 전쟁에 의한 혁명 프로그램의 참여가 아닌  예수의 메시아적 소명(아래 참조)을 예수의 방법을 통하여 실현한다. 예수의 혁명의 방식은 열혈당처럼 물리적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다른 뺨도 돌려대고 십리도 가라는 메세지의 실천이다.(예수의 도전, 122)


2) 예수의 혁명은 유대적 이스라엘의 성전회복을 통한 메시아적 소명의 성취를 말하고있다. 유대적 이스라엘에 대한 메시아적 성취는 유대인들이 포로에서 귀환함과 동시에 예수가 직접 유대적 이스라엘의 성전이 되심으로 포로에서 귀환한 백성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이루어가는 것이다.(예수의 도전, 116)


3) 기존 체제를 전복하는 예수의 의제의 중심에는 제자들에게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따르고, 자신이 실현하는 대안적인 나라(즉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에 동참하라는 요청이다.



톰 라이트의 메시아 사상 비평


포로에서 귀환한 백성들을 중심으로한 하나님 나라


라이트가 예수님께 대하여 사용하는 “메시아”라는 용어는 일반적으로 기독교에서 생각하는 의미와 많은 차이가 있다.


라이트가 말하는 메시아는 유대주의적 이스라엘의 한계를 받아나지 못하고있으며, 예수를 유대인을 중심으로한 지상에서의 유대적  하나님 나라를 완성시킨 유대주의적 메시아 사상을 가지고 있다.


라이트는 예수의 혁명이 유대적 이스라엘의 성전회복을 통한 메시아적 소명의 성취라고 말한다.


라이트에 의하면, 유대적 이스라엘에 대한 메시아적 성취는 유대인들이 포로에서 귀환함과 동시에 예수가 직접 유대적 이스라엘의 성전이 되심으로 포로에서 귀환한 백성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이루어가는 것이다.(예수의 도전 116)


톰 라이트의 메시아의 개념은 하나님 나라의 개념과 긴밀하게 연관되어있다.


라이트가 보는 예수는 포로 상태의 이스라엘에 혁명적인 하나님 나라를 세운 메시아이시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에는 포로 상태에서 귀환한 백성이 중심에 있다.




재정의된 메시아


톰 라이트는 예수가 귀환한 백성들의 한 가운데 있었기에 자신을 재정의된 메시아라고 생각하게되었다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메시아는 왕으로서의 개념으로서 유대적 이스라엘 성전을 관리 보수하는 역할을 하며, 이스라엘 성전을 중심으로하는 혁명적인 나라를 세우는 사람이었다.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는 스스로 유대적 이스라엘의 성전이 되심으로 귀환한 백성들의 중심에 설 수 있었으며, 유대적 이스라엘을 중심으로하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세우는 분이셨다.


여기서 라이트는 예수의 메시아적 소명을 민족적 이스라엘로 한정 시키고 있다.


이는 그가 민족적 이스라엘을 하나님 나라의 실체로 보고있기 때문이다.


정통 개혁주의에서 보는 유대적 이스라엘은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며,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한 신자들 가운데 임한 나라를 하나님 나라의 실체로 보고있다.


하지만 라이트는 신자들의 모임인 교회를 유대적 이스라엘의 확장 개념으로 보면서 개혁주의와 차이를 보이고 있다.


톰 라이트의 메시아 개념과 하나님 나라 개념은 톰 라이트가 유대중심적 신학자임을 보여주는 증거들이다.



예수, 제2성전 유대교에서의 해방자


톰 라이트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이전에 제2성전 유대교 안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이는 톰 라이트가 제2성전 유대교의 율법적 특징이 언약적 율법주의이며, 유대인들은 구원을 얻기 위해서 율법을 지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안에 머물기 위해서 율법을 지켰다는 신율주의적 사고 안에서 그리스도를 보고있었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구원을 가져다주시는 분이 아니시며, 단지 유대인들이 구원의 은혜 안에 제대로 머물기 위해서 포로된 상태에서 해방을 주시는 유대주의적 이스라엘의 해방자로서의 메시아를 말하고 있다.



이방인의 손에 죽은 메시아


톰 라이트는 예수를 이방인, 즉 로마인들에 의해 처형된 메시아들 중의 하나로 묘사하고있다.(예수의 도전 203)


부활은, 다른 메시아들은 실패했는데 예수가 메시아로서 성공했다는 근거가 된다고 말한다.


이와같이 라이트는 예수가 유대인, 즉 이스라엘의 새로운 희망을 위해서 세상을 대변하는 로마 정부에 의하여 희생되었다고 규정함으로서 유대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한 메시아로 규정하고있다.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의 죽음은 이전까지 유대인들이 로마에 대하여 타협하거나, 도피하거나, 투쟁하는 방식이 아닌, 희생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본을 보여주신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라이트가 보는 그리스도의 죽음은 인류의 죄를 대신한 속죄 사역도 아니며, 유대인들의 손에 죽지도 않았으며, 속죄 사역을 통한 의의 전가도 잘못된 교리라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루터는 이신칭의 교리가 교회의 존립을 좌우하는 문제라고 말하고 있지만, 톰 라이트는 루터의 생각이 전적으로 잘못된 사적인 생각일 뿐이라며 종교 개혁의 교리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다.


예수가 유대인들에 의하여 죽었다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하면서 인간이 얼마나 부패한 죄인이가를 보여주는 것이기에, 인간의 부패성을 부정하며 유대적 이스라엘을 옹호하는 라이트가 받아들일 수 없는 사실이다.


혁명가로서의 메시아


라이트에 의하면 예수는 이스라엘이 포로 상태에서 돌아오는 일이 자신의 사역 안에서 자신의 사역을 통하여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예수의 도전, 75)


라이트는 예수를 포로 상태의 이스라엘에 혁명적인 하나님 나라를 세운 메시아로 규정하고있다.


라이트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혁명을 통하여 자신의 메시아적 역할과 구속적 고난의 소명이 모두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했다.


라이트는 산상수훈을 혁명의 의제가 포함하고있는 예수가 전하는 메세지로 보고있다.


라이트가 말하는 산상수훈은 열혈당과 같이 물리적 힘에 의한 것이 아닌 희생적 메세지다.


라이트는 예수가 전하는 혁명적 메세지는 포로에서 귀환한 백성들을 중심으로 세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삶의 지침으로 제시한다.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의 혁명적 메세지는 대안적인 하나님 나라에 동참하기 위해서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의 희생정신을 본받아서 예수를 따르라는 것이다.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는 구체제의 이스라엘을 전복하고 새로운 체제로서의 대안적 하나님 나라를 세운 분이시다.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유대 이스라엘의 새로운 체제다.


라이트가 말하는 메시아는 이전의 왕으로서의 실패한 메시아와 혁명에 성공한 메시아로 구분함으로서 메시아 개념을 이스라엘의 민족적 해방의 관점으로 국한 시킨다.


혁명적으로 재정의된 하나님 나라는 유대적 이스라엘 성전을 관리 보수하였던 이전의 왕으로서의 메시아가 제공하였던 개념과는 다르다.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은 그리스도의 몸된 신자들이 아닌 포로에서 해방된 이들이 중심이다.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기 위한 조건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은 죄사함을 받은 이들과는 관계가 없다.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의 구속은 아담의 후손의로서의 인간의 보편적 죄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민족적 행동방식과 포로생활에 관한 것이다.


라이트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속죄 사역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 정부에 대항하는 새로운 방식의 투쟁이다.



왕로서 성전을  재건시킨 메시아


라이트는 예수님이 유대인이 기다리던 성전을 재건하신 분이라고 기술하고 있다(예수의 도전, 108)


유대인에게 메시아는 성전을 재건하시는 분이어야했기에 예수님은 성전에서 하시는 행동을 통하여 자신이 메시아이심을 증거한다고 말한다.


이전의 왕들은 메시아로서 성전을 건축하는 일을 하였지만 예수는 스스로가 성전이 되셔서 왕으로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신 분이다.


라이트는 사도신경에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만 호칭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며, 시편2편과 사무엘하7장에 비추어보면 예수는 유대인을 구출하여 왕으로 오신 분이라고 기술한다.(하나님은 어떻게 왕이 되셨나, 351)

라이트는 메시아라는 조건을 성전 재건과 연관시키고있다.


라이트가 예수님께서 진정한 메시아라는 인식은 역사적인 이스라엘의 회복이라는 시오니즘적 메시아사상을 말하는 것이다.


라이트가 주장하는 메시아로서의 싸움은 한마디로 유대교적 메시아 사상을 벗어나지 못하고있다.


U라이트가 묘사하는 메시아 개념은 유대적 이스라엘의 회복이며 이러한 회복은 유다 마카베우스 같은 열혈당의 폭력적 모습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비폭력적 희생적 방법으로 성취되며,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를 통하여 말씀하신 것을 손수 실천하는 본을 보여주신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예수님의 비폭력적 메시아로서 성취한 것은 유대적 방식의 하나님 나라이다.


톰 라이트는 예수님께서 메시아의 싸움을 싸우시기 위하여 죽음의 길을 걸으셨다고 말하고있다.(도전130)


이런 논리라면 김세윤 교수가 지적했듯이 새관점이 기독교를 유대교에 편입시키는데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유대교가 유대인만을 위한 종교라는 개념이 상실되는 또 다른 문제에 직면하게된다.

라이트는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메시아로 오셔서 이 세상의 왕이 되셨다는 논리를 전개하지만 이런 논리는 기독교를 유대교에 편입시키려는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예루살렘 입성이 뜻하는 것


라이트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장면은 야웨께서  시온으로 귀환하셔서 자신의 백성들이 언약백성으로 제대로 살았는지 정산을 하고 모든 일을 결말짓기 위해 그들을 방문하시는 것이라고 말한다.(예수의 도전172)


시온으로서의 예루살렘은 성전의 관점서 접근하여 한다.


아담은 성전으로서의 에덴에서 실패를 하였지만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성전으로서의 예루살렘에서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순종으로 구속사역의 삶을 마감하셔야만 했다.


라이트가 주장하는 것과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은혜 안에 제대로 머물었는지를 정산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순종한 아담의 후손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질 언약 백성의 모형일 뿐이지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는 실체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라이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실체적인 하나님 나라로 보고, 예수님이 이루시는 새로운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중심은 포로에서 귀환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라고 보고 있기에 이러한 해석이 나오는 것이다.


라이트는 예수님 자신이 장차 야웨의 우편에 앉게 될 것을 받아들인 후에 자신을 통하여 메시아의 소명이 실현되는 것을 예견하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고 말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예수님이 인간으로서 선지자적 소명을 가지고있었다는 말과 유사하다.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완전한 사람으로서 죄인을 구속하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오신 것이다.


아담은 성부 하나님께 범죄하였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성부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 아니시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불가능한 것이다.


구속사가 제거된 라이트의 관점이라면 구태여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신  예수님의 성육신이 아니어도 선지자 가운데 한 사람을 택하여 할 수 있는 것이다.


라이트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이방인을 물리치고 성소에 참배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들어온 유다 마카비우스와 마찬가지 차원의 왕으로서의 행동으로 규정한다.


이는 이스라엘의 실패한 여러 왕들을 실패한  메시아로 보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의 신격을 격하 시키는 것이다.


종종 라이트는 자신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정한다는 오해를 받는다고 항변하면서 이는 자신이 받는 모함이 마치 스데반 집사가 모함을 받는 것과 유사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님의 역할은 신격을 지니지 않은 선지자도 할 수 있는 역할로서, 마치 인간이신 예수님이 신의식에 의해서 하나님의 선택으로 신이 되셨다는 개념과 유사한 논리를 전개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라이트의 논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인정하지 않기에, 구태여 예수님이 하나님의 위격을 가질 필요가 없는 것이다.


라이트는 제2성전 유대교라는 기반 위에서 초기 기독교를 해석한다.


라이트가 말하는 ‘초기’ 나 ‘아주 초창기’는 기독교가 교리의 체계를 갖추기 전의 상태를 말한다.


라이트는 어거스틴 이후의 기독교 즉 체계적으로 교리가 갖추어지기 시작한 이후의 교리에 대하여 부정적 자세를 취함으로서 개혁주의의 기반이 되는 어거스틴의 해석과 충돌을 일으키는 것이다.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

톰 라이트의 예수에 대한 해석은 어디에서도 마지막 아담이라는 관점에서 해석되지 않는다.

또한 이스라엘 성전을 성전으로서의 에덴과 대비시켜 해석하지 않는다.

톰 라이트가 해석하는 예수는 아담의 범죄와는 관계가 없으며, 오직 아브라함으로부터 출발한다.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예수는 예수의 모형인 처음 아담으로부터 해석되어져야한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메시아 사상은 에덴에서의 아담의 실패와 관련지어 해석되지 않는다.

또한 이스라엘을 에덴과의 유비적 관련성에서 해석하지 않는다.

아담이 하나님과 행위 언약 관계에 있었다는 것과 이스라엘도 하나님과 행위 언약 관계에 있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마이클 호튼은 톰 라이트의 새관점이 언약에 대한 잘못된 해석으로부터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언약의 관점에서보면 성경은 창세전 구속 언약, 아담 언약과 노아 언약, 아브라함 언약, 모세 언약, 다윗 언약, 선지자 언약, 새 언약이 유형학적으로 차례로 전개되고있음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라이트는 성경을 단지 이야기라는 하나의 틀에서만 해석하면서 유대적 이스라엘을 그 중심에 둔다.

성경 해석의 출발이 되는 창세기 1~3장은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해석하는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창세기1~3장과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관련성을 제외시킨 해석으로, 유대적 이스라엘을 제2성전 유대교라는 역사적 예수 탐구 틀에서 자의적으로 해석한다.

참된 메시아로서의 예수는 유대적 이스라엘의 문제 이전에 처음 아담의 에덴에서의 실패로부터 해석되어져야한다.


부활을 통하여 메시아되신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메시아되심은 부활을 떼어놓고서 생각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는 부활을 통하여 새롭게 태어난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새이스라엘이 되신다.


성도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로서 대제사장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약속의 성취이다.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행 13:33)”


낳았다는 말은 부활을 지칭을 지칭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냐(히1:5)”라고 기록하고있다.


5장에서도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히5:5)” 기록함으로서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분이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은 것을 보게된다.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분은 유대적 이스라엘 만의 대제사장이 아니라 모든 신자를 대표하시는 것이다.


로마서에서도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 1:4)”라고 기록함으로서 하나님의 아들되심의 근거를 부활에 두고 있다.


그리스도의 메시아되심은 부활의 첫 열매되심으로 모든 믿는 자들에게 더 이상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해방케하심 때문이다.


부활은 톰 라이트가 말하는 바와 같이 “예수가 로마에 저항하는 행동방식이 옳음을 인정받은 것”이라는 편협되고 왜곡된 유대중심적인 해석으로 제한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낳으신 새이스라엘로서의 그리스도는, 성도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초대하셨으며, 이는 혈통으로난 유대적 이스라엘이나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이 중심이 된 하나님 나라 백성이 아니라, 믿음을 근거로한 새로운 이스라엘로서의 하나님 나라 백성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일으켜 아들 삼으신 것은 구약의 약속을 근거로 한 것이며, 그리스도는 부활로 인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심으로서, 유대적 이스라엘을 넘어서, 모든 믿는 자의 맏형이 되셨다.


바울이 전하는 그리스도는 새로운 하나님 나라 백성의 탄생을 통하여 모든 믿는 자의 대표되시는 메시아이시다.



결론


바벨론 포로의 귀환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가리키지만, 이는 궁극적으로 참된 이스라엘 즉  참다윗 왕이신 예수의 구속사역으로 말미암는 종말론적 메시아왕국을 지향하고있다.


유대적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로부터의 귀환을 통하여 역사적 이스라엘의 회복을 시도하였지만 죄의 문제는 바벨론 포로 이전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교회가 진정한 하나님 나라가 되려면 대속적 사역을 통해서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새관점에서는 예수가 삶의 본을 보여줌으로서 모델이 되어 율법을 대신하는  산상수훈을 주셨다고하지만 아담의 후손으로서의 본질적 죄성을 극복할 수는 없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인간의 능력의 부족, 즉 전적인 부패와 전적인 무능력을 인식시킴으로서 대속적 죽음을 통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요구될 수 밖에 없음을 증명해주는 것이었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인간 스스로의 능력에 의지하여, 새로운 모델을 따라서, 산상수훈을 새로운 율법으로 삼고서, 종말론적인 이스라엘을 확장시키면서,  이를 신약의 교회와 연계시키려는 시도를 하고있다.


인간은 전적으로부패한 아담의 후손으로서 죄를 짓기 이전부터 본질적인 죄인이었기에 진정한 메시아는 처음 아담의 죄를 해결하는 마지막 아담이 되어야만 한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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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 따름의 대상인가?


김원호(dent4834@hanmail.net)


예수가 나에게 어떠한 분이신가는 신앙인에게 꼭 필요한 질문이다.


최근에 들어와서 예수가 따름의 대상으로 새롭게 조명되고있다.


최근 톰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는 이제껏 개혁주의에서 말하여왔던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는 우리에게 의를 전가시켜주신 분도 아니다.


그렇다면 톰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가 도덕적 윤리의 기준을 제시해주는 따름의 대상이라면 어떠한 문제가 있는지 살펴보고자한다.



1. 새로운 도덕률을 만드신 예수님


톰 라이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하시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시는 것은 그들에게 새로운 도덕률을 제시하시려는 것이다.


● 예수님이 사시던 유대인들은 이미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높은 도덕률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들에게 더 높은 도덕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도덕과는 다른 새로운 도덕률을 제공하시기 위한 것이다.


●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행실이란 하나님의 주도권과 언약에서 마땅히 흘러 나오는 것이다.(예수의 도전, 톰 라이트, 61)


톰 라이트는 유대인의 행실과 예수님의 행실을 같은 목적을 가진 다른 차원의 동일한 맥락에서 기술하고있다.


유대인의 행실과 예수님의 행실이 하나님의 주도권과 언약이라는 동일한 맥락 안에 있는 것이라면 유대인의 행실과 예수님의 행실이 같은 속성을 가지고 같은 목적과 방법으로 행하여 질 수밖에 없다.


부자 관원의 예를 들어보자.


톰 라이트는 부자 관원에게 요구되었던 것은 예수를 따르는 것으로서 이는 토라를 성취하는 것이며 토라를 준수하는 방식으로 예수를 따르는 자는 칭의 될 것이라고 말한다. (Jesus and the Victory of God, N. T. Wright, 303, 307)


토라를 잘 준수하는 것이 중요하며 이와같은 방식으로 예수를 따르는 자들은 칭의될 것이라고 말한다.

라이트는 예수를 따름에서 예수가 성전된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이전에 성전에서 제공하였던 속죄의 방식으로서, 예수를 따름으로서 이전에 성전에서 얻을 수 있었던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challenge of Jesus 112)

톰 라이트에게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마땅히 실천하는 따름과 하나님 나라의 요원이 되어 그 나라를 선포하고 그 실천을 수행하는 것은 일종의 칭의를 위한 공로로 드러난다.


라이트에게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공로적 행위로서, 종말에 이루어질 최종적 칭의의 조건이 된다.


김세윤 교수는 라이트의 종말론적 칭의 개념에 동의하면서 성화를 최종적 칭의를 위한 현재적 칭의의 관점에서 보고있다.


2. 도덕적 변화


메이첸은 “기독교와 자유주의”(86)에서 “기독교가 제공하는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이었으며 죄로부터의 구원은 즉각적인 도덕적 변화도 수반한다”고 말한다.


도덕적 변화는 훈련과 연습을 통하여 나오기 이전에 열매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자신의 저서 "그리스도인의 미덕"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삶은 훈련과 연습을 통한 삶이 되어야한다고 강조한다.

이는 성령의 열매로서의 삶과 차이가 있으며, 삶의 주체가 성령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이며, 성화의 과정에 훈련과 연습이라는 방법을 도입하는 것이다.

하지만 도덕적인 삶은 외적인 행동 이전에 내면의 변화에서 나오는 것이다.

내면의 변화가 없는 도덕적 삶은 바리세인들의 위선(hypocrite)과 다를 바가 없다.

만약에 내면의 변화가 없이 훈련과 연습을 통한 도덕적 삶이 강조된다면  인간은 질병과 어려운 환경과 위기 상황에서는 절망 할 수 밖에 없다.

참된 복음은 인간의 의지에 호소하여 사람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한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내적인 변화를 통하여 외적인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다.


3. 그리스도의 위격과 속죄 사역

인도 사람들은 종종 기독교를 아무 저항없이 수용하지만 이들에게 예수는 여러 성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예수가 따름의 대상이 된다면 복음을 전함으로 인한 박해도 없었을 것이다.

사도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이 받았던 박해는 예수를 믿음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신 위격을 가지고 계신 예수님이 따름의 대상이 될 경우에는 예수님을 속죄 사역에서가 아니라 교훈과 본이 되는 삶을 사신 최고의 선지자의 위치로 격하시키는 것이다.

속죄 사역은 오직 성부 하나님과 동등한 위격에서만 가능하며,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창세 전 택하신 자들을 위한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에 근거를 두고있다.

속죄 사역이 제거된 예수의 역할은 선지자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에게서 속죄 사역을 제거하는 것은 삼위 하나님으로서의 성자 그리스도의 위격 자체를 없애버리는 것이다,

따름의 대상이 된 예수의 교훈은 공자의 교훈과 비교되며 간디가 산상순훈을 통하여 존경할 수 있었던 선지자 수준으로 예수님을 격하시키는 부작용을 낳게될 것이다.

예수님이 따름의 대상이 될 때는 기독교와 타 종교의 차이가 있을 수 없게 되며 예수는 단지 기독교라는 종교의 성인에 불과한 인물이 되고만다.

마가복음 10장 45절에는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기록되어있다.

예수님의 사역에서 속죄 사역이 제거될 때 기독교는 더 이상 기독교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기독교는 인간이 만든 여러 종교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4. 따름과 성화

사람들은 예수를 따르는 삶에 너무 나도 관심이 많다.


그러나 인간은 예수를 따를 수가 없다


인간은 예수의 삶을 본받을 수는 있지만 속죄 사역까지 따라 할 수는 없다.


예수의 희생의 주 목적은 따름의 본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한 속죄 사역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다.


예수의 속죄 사역은 누구도 따라할 수가 없다.


예수를 따름의 대상으로 규정하다 보면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가리워 질 수 밖에 없고 기독교는 예수의 희생정신을 따르는 윤리적 종교가 될 수 밖에 없다.


칼빈은 윤리의 개념보다도 더욱 강도가 높은 성화의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성화가 없이 구원의 칭의만을 강조하는 것은 복음이 아니다.


이와는 반대로 성화를 너무 강조하다보면 성화가 구원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러한 경우가 김세윤 교수가 주장하는 유보적 칭의론으로서 성화가 최종적 칭의에 영향을 미친다는 개념이다.


또한 성화는 윤리로 대체되어서는 안된다.


인간이 생각하는 윤리와 성령의 열매로서의 성화는 기준이 다르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성화는 언약 안에 머물기 위한 수단으로서 율법을 지키는 것이다.


새관점에서 보는 산상수훈은 또 하나의 율법일 뿐이며, 이를 지킴으로서 최종적 칭의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산상수훈은 율법보다도 더 지키기 어렵기에 이를 기준으로한다면 이 세상에 최종적 구원을 얻을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성화는 로마 가톨릭에서 주장하는 것과 같이 공로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


로마카톨릭은 은혜를 말하여도 '오직 은혜'를 말하지는 않는다.


공로주의는 인간이 어느 정도는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말하지만 종교개혁자들은 인간의 전적인 부패 즉 '노예의지'를 말한다.


윤리는 성화를 대체할 수 없다.


성화는 (나 자신이 전적으로 부패했기에)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이 주체가 되시지만 윤리는 (내가 그래도 조금은 살아 있다고 생각하기에) 내가 주체가 되려한다.


내가 조금이라도 살아 있다면 따름의 대상이 필요할 것이다.


(새관점주의자들과 같이) 인간의 전적인 부패를 인정하지 않는 이들이 보는 예수는 속죄 사역의 예수가 아니라 희생정신을 보여주신 예수다.


하지만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하였고 노예 의지만을 가지고 있다면 예수를 따를 수 있는 힘은 인간에게는 없다.


오직 성령님이 안에서 역사 하실 때 예수의 길로 인도되는 성화의 삶을 살 수 있다.


성화는 성령님이 주체가 되시기에 윤리와는 비교될 수 없다.


윤리적 삶은 일반 은총의 영역에 속하여있지만 성화는 특별 은총에 의한 것이다.


인간은 누구도 속죄 사역을 할 수 없기에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 성화의 과정을 밟아가는 삶을 살아가야한다.


성화는 칭의를 위한 공로가 아니다.


현대 교회에서 실종된 윤리는 이들이 예수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5. 따름의 대상이 되실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


예수가 따름이 대상이 되어야한다면, 예수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우리가 본받아야한다.


예수를 따름의 대상으로 본다면 예수는 또 다른 기독교의 창시자가 되는 것이다.


예수와 우리는 엄연히 다른 존재이다.


예수는 100% 하나님이시면서 100% 사람으로서 죄가 없으신 분이시다.


기독교는 죄를 사함받기 위하여 죄를 가지고 있어야하는데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기 때문이다.

예수의 종교는 아무 문제가  없는 아들의 위치에서 가지는 종교이기에 우리는 그러한 종교를 가질 수 없다.

그럼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예수의 믿음을 제외한 행동양식을 따라야하는 것인데 이러한 방식은 의식구조가 없는 행동양식이 되는 것이다.

예수를 따름은 윤리의 영역에 한정되어야한다.

예수의 신성이 아닌 인성의 영역에서만 우리의 모범이 되시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예수의 인성에 국한되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의 신성을 깍아 내려서 우리의 모범이 되게끔하는 것은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 것이된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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