톰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 따름의 대상인가?


김원호(dent4834@hanmail.net)


예수가 나에게 어떠한 분이신가는 신앙인에게 꼭 필요한 질문이다.


최근에 들어와서 예수가 따름의 대상으로 새롭게 조명되고있다.


최근 톰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는 이제껏 개혁주의에서 말하여왔던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는 우리에게 의를 전가시켜주신 분도 아니다.


그렇다면 톰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가 도덕적 윤리의 기준을 제시해주는 따름의 대상이라면 어떠한 문제가 있는지 살펴보고자한다.



1. 새로운 도덕률을 만드신 예수님


톰 라이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하시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시는 것은 그들에게 새로운 도덕률을 제시하시려는 것이다.


● 예수님이 사시던 유대인들은 이미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높은 도덕률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들에게 더 높은 도덕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도덕과는 다른 새로운 도덕률을 제공하시기 위한 것이다.


●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행실이란 하나님의 주도권과 언약에서 마땅히 흘러 나오는 것이다.(예수의 도전, 톰 라이트, 61)


톰 라이트는 유대인의 행실과 예수님의 행실을 같은 목적을 가진 다른 차원의 동일한 맥락에서 기술하고있다.


유대인의 행실과 예수님의 행실이 하나님의 주도권과 언약이라는 동일한 맥락 안에 있는 것이라면 유대인의 행실과 예수님의 행실이 같은 속성을 가지고 같은 목적과 방법으로 행하여 질 수밖에 없다.


부자 관원의 예를 들어보자.


톰 라이트는 부자 관원에게 요구되었던 것은 예수를 따르는 것으로서 이는 토라를 성취하는 것이며 토라를 준수하는 방식으로 예수를 따르는 자는 칭의 될 것이라고 말한다. (Jesus and the Victory of God, N. T. Wright, 303, 307)


토라를 잘 준수하는 것이 중요하며 이와같은 방식으로 예수를 따르는 자들은 칭의될 것이라고 말한다.

라이트는 예수를 따름에서 예수가 성전된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이전에 성전에서 제공하였던 속죄의 방식으로서, 예수를 따름으로서 이전에 성전에서 얻을 수 있었던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challenge of Jesus 112)

톰 라이트에게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마땅히 실천하는 따름과 하나님 나라의 요원이 되어 그 나라를 선포하고 그 실천을 수행하는 것은 일종의 칭의를 위한 공로로 드러난다.


라이트에게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공로적 행위로서, 종말에 이루어질 최종적 칭의의 조건이 된다.


김세윤 교수는 라이트의 종말론적 칭의 개념에 동의하면서 성화를 최종적 칭의를 위한 현재적 칭의의 관점에서 보고있다.


2. 도덕적 변화


메이첸은 “기독교와 자유주의”(86)에서 “기독교가 제공하는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이었으며 죄로부터의 구원은 즉각적인 도덕적 변화도 수반한다”고 말한다.


도덕적 변화는 훈련과 연습을 통하여 나오기 이전에 열매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자신의 저서 "그리스도인의 미덕"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삶은 훈련과 연습을 통한 삶이 되어야한다고 강조한다.

이는 성령의 열매로서의 삶과 차이가 있으며, 삶의 주체가 성령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이며, 성화의 과정에 훈련과 연습이라는 방법을 도입하는 것이다.

하지만 도덕적인 삶은 외적인 행동 이전에 내면의 변화에서 나오는 것이다.

내면의 변화가 없는 도덕적 삶은 바리세인들의 위선(hypocrite)과 다를 바가 없다.

만약에 내면의 변화가 없이 훈련과 연습을 통한 도덕적 삶이 강조된다면  인간은 질병과 어려운 환경과 위기 상황에서는 절망 할 수 밖에 없다.

참된 복음은 인간의 의지에 호소하여 사람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한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내적인 변화를 통하여 외적인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다.


3. 그리스도의 위격과 속죄 사역

인도 사람들은 종종 기독교를 아무 저항없이 수용하지만 이들에게 예수는 여러 성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예수가 따름의 대상이 된다면 복음을 전함으로 인한 박해도 없었을 것이다.

사도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이 받았던 박해는 예수를 믿음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신 위격을 가지고 계신 예수님이 따름의 대상이 될 경우에는 예수님을 속죄 사역에서가 아니라 교훈과 본이 되는 삶을 사신 최고의 선지자의 위치로 격하시키는 것이다.

속죄 사역은 오직 성부 하나님과 동등한 위격에서만 가능하며,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창세 전 택하신 자들을 위한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에 근거를 두고있다.

속죄 사역이 제거된 예수의 역할은 선지자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에게서 속죄 사역을 제거하는 것은 삼위 하나님으로서의 성자 그리스도의 위격 자체를 없애버리는 것이다,

따름의 대상이 된 예수의 교훈은 공자의 교훈과 비교되며 간디가 산상순훈을 통하여 존경할 수 있었던 선지자 수준으로 예수님을 격하시키는 부작용을 낳게될 것이다.

예수님이 따름의 대상이 될 때는 기독교와 타 종교의 차이가 있을 수 없게 되며 예수는 단지 기독교라는 종교의 성인에 불과한 인물이 되고만다.

마가복음 10장 45절에는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기록되어있다.

예수님의 사역에서 속죄 사역이 제거될 때 기독교는 더 이상 기독교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기독교는 인간이 만든 여러 종교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4. 따름과 성화

사람들은 예수를 따르는 삶에 너무 나도 관심이 많다.


그러나 인간은 예수를 따를 수가 없다


인간은 예수의 삶을 본받을 수는 있지만 속죄 사역까지 따라 할 수는 없다.


예수의 희생의 주 목적은 따름의 본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한 속죄 사역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다.


예수의 속죄 사역은 누구도 따라할 수가 없다.


예수를 따름의 대상으로 규정하다 보면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가리워 질 수 밖에 없고 기독교는 예수의 희생정신을 따르는 윤리적 종교가 될 수 밖에 없다.


칼빈은 윤리의 개념보다도 더욱 강도가 높은 성화의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성화가 없이 구원의 칭의만을 강조하는 것은 복음이 아니다.


이와는 반대로 성화를 너무 강조하다보면 성화가 구원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러한 경우가 김세윤 교수가 주장하는 유보적 칭의론으로서 성화가 최종적 칭의에 영향을 미친다는 개념이다.


또한 성화는 윤리로 대체되어서는 안된다.


인간이 생각하는 윤리와 성령의 열매로서의 성화는 기준이 다르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성화는 언약 안에 머물기 위한 수단으로서 율법을 지키는 것이다.


새관점에서 보는 산상수훈은 또 하나의 율법일 뿐이며, 이를 지킴으로서 최종적 칭의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산상수훈은 율법보다도 더 지키기 어렵기에 이를 기준으로한다면 이 세상에 최종적 구원을 얻을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성화는 로마 가톨릭에서 주장하는 것과 같이 공로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


로마카톨릭은 은혜를 말하여도 '오직 은혜'를 말하지는 않는다.


공로주의는 인간이 어느 정도는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말하지만 종교개혁자들은 인간의 전적인 부패 즉 '노예의지'를 말한다.


윤리는 성화를 대체할 수 없다.


성화는 (나 자신이 전적으로 부패했기에)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이 주체가 되시지만 윤리는 (내가 그래도 조금은 살아 있다고 생각하기에) 내가 주체가 되려한다.


내가 조금이라도 살아 있다면 따름의 대상이 필요할 것이다.


(새관점주의자들과 같이) 인간의 전적인 부패를 인정하지 않는 이들이 보는 예수는 속죄 사역의 예수가 아니라 희생정신을 보여주신 예수다.


하지만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하였고 노예 의지만을 가지고 있다면 예수를 따를 수 있는 힘은 인간에게는 없다.


오직 성령님이 안에서 역사 하실 때 예수의 길로 인도되는 성화의 삶을 살 수 있다.


성화는 성령님이 주체가 되시기에 윤리와는 비교될 수 없다.


윤리적 삶은 일반 은총의 영역에 속하여있지만 성화는 특별 은총에 의한 것이다.


인간은 누구도 속죄 사역을 할 수 없기에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 성화의 과정을 밟아가는 삶을 살아가야한다.


성화는 칭의를 위한 공로가 아니다.


현대 교회에서 실종된 윤리는 이들이 예수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5. 따름의 대상이 되실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


예수가 따름이 대상이 되어야한다면, 예수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우리가 본받아야한다.


예수를 따름의 대상으로 본다면 예수는 또 다른 기독교의 창시자가 되는 것이다.


예수와 우리는 엄연히 다른 존재이다.


예수는 100% 하나님이시면서 100% 사람으로서 죄가 없으신 분이시다.


기독교는 죄를 사함받기 위하여 죄를 가지고 있어야하는데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기 때문이다.

예수의 종교는 아무 문제가  없는 아들의 위치에서 가지는 종교이기에 우리는 그러한 종교를 가질 수 없다.

그럼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예수의 믿음을 제외한 행동양식을 따라야하는 것인데 이러한 방식은 의식구조가 없는 행동양식이 되는 것이다.

예수를 따름은 윤리의 영역에 한정되어야한다.

예수의 신성이 아닌 인성의 영역에서만 우리의 모범이 되시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예수의 인성에 국한되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의 신성을 깍아 내려서 우리의 모범이 되게끔하는 것은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 것이된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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